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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이방석. 부모의 욕심 때문에 조선 최초의 세자가 되었지만 결국 형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인물

by 사탐과탐 2022.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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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욕심 때문에 조선 최초의 세자가 되었지만 결국 형이었던 이방원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방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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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말이 있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것 이상의 것을 바라거나 남의것을 탐내다가 좋지못한 꼴을 당하곤 하는데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의안대군 이방석 또한 어머니 신덕왕후의 지나친 욕심때문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게되죠

조선 최초의 왕세자였던 이방석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이방석은 1382년 고려 개성에서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로 태어났죠

이방석이 6살이 되던해에 그의 아버지인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사건을 일으키자 이성계의 정적이자 고려최후의 충신이라 불렸던 최영은 이성계의 반란에 참여한 장수들의 가족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의 집에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의 집은 5남 이방원이 가족들을 미리 피신시킨 덕분에 이방석을 포함한 가족들 모두가 화를 피해갈수 있었는데요

이 사건을 봐도 알수있듯이, 이때까지만 해도 이방원을 포함한 형제들과 이방석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죠

하지만 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자식을 세자로 세우려는 욕심을 부리면서 훗날 그들 형제간에 끔찍한 피바람이 몰아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원래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웠던 개국공신들은 대부분이 유학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중 가장 맏이인 아들이나 조선을 세우는데 가장 공이 컸던 인물이 세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성계와 신덕왕후 그리고 정도전이 내세운 세자후보는 신덕왕후의 아들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방번이었죠

하지만 공신들인 배극렴과 조준,정도전등이 이방번은 성격이 포악하니 세자감이 못된다며 반대한 끝에 결국 신덕왕후의 또다른 아들인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방번의 성격문제는 겉으로 내세운 핑계였을뿐 실제 그를 반대했던 이유는 바로 이방번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만약 그가 세자가 된다면 이성계가 죽인 공양왕의 형이 훗날 조선의 국구(왕의 장인)가 될수 있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이방석이 세자가 되면서 대체 어떤 기준으로 그가 왕세자가 된것인지에 대한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이방번의 경우 앞에서 말한 문제로 제외가 됐지만 장자가 뒤를 잇는다는 원칙에 따르면 장남인 이방우를 조선을 건국하는데 세운 공으로 따지면 이방원을 세자로 뽑아야되는데 이방석은 그중 어떤것에도 해당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이방번과 이방석은 조선이 세워질때 겨우 10살밖에 안되는 어린 나이였던데다가 그들이 가진 능력조차 아무런 검증이 되어있지 않았던 반면에 오랜 관직생활을 했던 이방우나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이방과 그리고 역대 최연소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했고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인 정몽주까지 살해하며 조선을 세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 등은 조선을 개국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동시에 가지고 있는 능력도 잘 검증되어 있었죠

 

심지어 1차 왕자의 난 때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뭔가를 보여준 적이 없는 이방간이나 별다른 업적을 세우지 못한 이방의도 비록 방과와 방원만은 못하지만 어린 이복동생들과 비교당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이방석이 형들을 다 제치고 황제가 된 청나라의 성군 강희제처럼 5살 때부터 책을 읽으면 바로 그내용을 다 외우는 등 뛰어난 왕이 될 자질을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이방석에게서는 딱히 그런 모습도 찾을수 없었다고 하죠

 

때문에 이방석을 세자로 내세운 이성계의 모습은 죽을 고생을 다해 나라를 세우는데 협조한 형제들을 내팽개쳐둔채 새엄마의 자식만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수밖에 없었고 이방원을 비롯한 형제들이 느꼈을 섭섭함과 실망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컸을것이라 짐작되는데요

사실 이성계가 이방석을 세자로 내세운데에는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남아있던 고려의 왕족들을 모두 몰살시켰을만큼 자신이 세운 조선이 이전 왕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것을 보여주고 싶어했죠

 

그런데 문제는 이성계가 고려 권력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 바로 자신의 아들들을 고려 권세가의 딸들과 혼인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 조선을 건국할 시점에 와서는 방석을 제외한 모든 아들들이 고려 왕족을 포함한 고려의 귀족들과 혼인으로 얽히면서 깊은 연관을 맺은 상태였다는 것인데요

이런 인맥들은 일개 무장에 불과했던 이성계가 고려권력의 정점에 도달하고 이후 새 왕조를 세울때까지는 큰 도움이 됐지만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오히려 그에게 부담을 주는 요소가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때문에 이성계 입장에서는 더이상 옛고려의 인맥과도 엮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왕비였던 신덕왕후의 소망도 들어주기 위해 그녀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던 것인데요

무장출신이라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못한 자신과 달리 어린 방석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면서 아들이 경력을 쌓을동안 자신이 뒤에서 든든한 빽이 돼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계획은 시작부터 엇나가기 시작했으니 바로 방석의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던 현빈 유씨가 어린 남편으로는 만족을 하지 못했는지 내시와 간통을 하다 들키면서 내시는 참수되고 유씨가 세자빈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게다가 태조실록에 기록된 세자 이방석의 모습을 보면 그는 세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조 2년 평소 자신을 따라다니던 직속 관원에게 자신이 지금 지내는 거처는 너무 작고 좁아서 여름에 무더우니 바람이 잘 통하는 방식으로 지은 여름용 건물인 양청을 새로 지었으면 한다는 말을 했는데요

 

이것이 당시 최고 정무기관이었던 도평의사사에까지 전해졌고 얼마후 세자가 지낼 양청을 지으라는 지시를 내려지게 되죠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가 가뜩이나 지금 공사할 곳이 많은데 세자한테 꼭 필요한것도 아닌 양청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 덕분에 계획이 중지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방석은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도 세자로서 딱히 나랏일을 돌보기 위한 경험을 쌓으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죠

그가 기껏 했던 일들은 다른 대군들에게 연회를 베풀거나 법회를 여는 정도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틈만 나면 장군들과 궁 밖에 나가 남의 집 가축을 쏴죽이거나 궁 안에 몸을 파는 기생들을 들이는 등 공부할 생각은 전혀 하지않은체 놀 생각만 해서 분노한 이성계가 직접 세자가 놀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는 등 자신의 후손인 양녕대군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하죠

 

하루는 이방석이 대장군 남지와 신덕왕후의 친척인 강유신이란 인물들을 따라 말을 타고 궐 밖을 나갔는데 이들이 민가의 염소와 오리 등을 쏴 죽이는 사고를 쳐서 간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은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가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는것을 감안해도 아버지인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가 그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것이 분명할텐데도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인것인데요

 

이렇게 실록에 남아있는 기록들만 봐도 평소 상당히 노는것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죽하면 1차 왕자의 난 이후 공신들이 이방석과 이방번의 첩들을 전리품삼아 데려갔는데 16살밖에 되지 않았던 이방석의 첩이 두명이나 있었으며 그것도 모두 기생 출신들이었다고 하죠

 

애초에 이방석 본인도 놀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는데 그의 주변에 들러붙은 인물들도 그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보다는 그저 세자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니 주변환경마저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인데요

이후 이방석의 나이 14세가 되었을때 그의 어머니 신덕왕후가 세상을 뜨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아버지인 태조와 정도전이 있었죠

 

게다가 정도전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사병을 중앙군으로 흡수시키면서 이대로 방석이 다음 왕이 되는가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들의 세력이 약해진것을 보고 정도전과 이성계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이방원이 1차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이방석의 운명도 급격히 암울해지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방석은 급히 궁궐에 있던 수비대를 끌고가 반란군을 막아보려 했지만 봉원량이라는 신하가 "광화문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이방원이 끌고온 정예기병들이 가득 차있습니다"라는 보고를 올리자 더이상 저항할 의지를 잃고 항복을 하게되는데요

이후 세자를 지지하던 정도전을 비롯해 심효생, 남은등의 신하들이 모두 살해되고 이방원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되자 세자의 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폐세자된 이방석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했기때문에 이성계또한 그말을 믿고 방석을 궁궐밖 그의 저택으로 내보냈죠

세자빈이었던 현빈심씨만이 위험하다며 그를 말렸지만 설마 나를 죽이기야 하겠냐는 말을 남기고 형인 이방번과 함께 궁궐문을 나섰다가 이거이 등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네요

 

부모의 욕심 때문에 별다른 능력도 없이 자신의 것이 아닌 자리에 올랐다가 결국에는 목숨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지금까지 조선 최초의 왕세자였던 이방석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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