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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야기들

잘못 알고 있었던 우리나라 역사 상식들

by 사탐과탐 2024.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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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고 있었던 우리나라 역사 상식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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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속에는 수많은 명마가 등장하는데요

 

흔히 관우의 말로 알려진 적토마는

사실 관우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사에는'여포가 적토라는 좋은말을 타고다녔다' 라는 기록외엔

아무런 기록이 없고 관우에게 갔다는 이야기도 없다고 하죠

 

여포가 죽은 이후 적토마를 조조가 가지고 있다가

관우에게 선물로 주고

훗날 관우가 죽고나서 적토마도 주인따라 죽었다 라는

이야기는 오직 소설인 삼국지 연의에만 나오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사실 저도 적토마는 관우의 애마로 알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죠

 

오늘은 이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역사 상식 중

사실과 다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먼저 고구려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했다고 알려져있는

광개토대왕에 대한 이야기 인데요

 

사실 고구려의 왕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손자였던 '문자명왕'이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넓혀놓은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 영토를

문자명왕이 이어받았고

이후 그가 더 영토를 확장했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던 왕은 문자명왕인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왕중 영토를 가장 많이 넓힌왕인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다음 이야기는 신라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김춘추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켰다 해서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죠

 

하지만 이것은 지금 현대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고대사에 투사한 시대착오적 해석입니다

 

당시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같은 민족이니 같은편이니 하던게 아니라

서로 죽고 죽이던 사이로 봐야 맞는것이죠

 

만약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지 않았다면

백제나 고구려에게 자신들이 먹힐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백제의 개로왕이나 위덕왕, 무왕도 당나라에 여러번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면 자신들도 협공하겠다고

고구려를 공격해달라며 간절히 요청하기도 했었죠

 

그 외에도 백제는 왜군과 손을잡고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것만 봐도 김춘추의 전략이 탁월했던 것일뿐

그가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 반역자 라는것은

김춘추 입장에서는 억울할수도 있는것이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당나라가 김춘추에게 이용당했다고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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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우리나라 영문표기에 대한 이야기 인데요

 

과거엔 우리나라를 영어로 Corea라고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Japan의 J보다 Corea의 C가

일본 영어명의 앞에 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한국의 영어 표기를 알파벳 나열상 J보다 뒤에 있고

발음이 같은 Korea로 바꿔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죠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그저 여러나라의 언어 특성상

어떤나라에서는 코리아 라고 부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꼬리아라고 부르면서

이를 적을때 C를 쓰는나라도 있고 K를 쓰는 나라도 있었던 것이죠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C와 K가 함께 혼용해서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여러 나라들이 합의해서 Korea로 맞춘것이죠

 

다음은 목화씨의 전설 문익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붓대에 숨겨 들어왔다고

다들 알고 있을텐데 사실 숨기고 자시고 한것이 아니라 그냥 들고왔다고 하죠

 

사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무기나 화약 등

국방에 관련된 품목만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뿐

남쪽지방에 널리고 널린 목화는 금수품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익점이 목숨을 건 밀수를 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결국 목화씨 밀반입에 성공해

백성들이 겨울을 그나마 따뜻하게 보낼수 있게 된것이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약 100여년이 흐른뒤 김굉필이라는 사람이

문익점의 공을 기리는 시에서

'몰래 들고왔다'라는 글씨를 적었던 탓에

이 이야기가 사실인 양 널리 퍼지게 된것이죠

 

다음은 고려 최후의 충신인 최영 장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문(文)으로는 정몽주가 있다면

무(武)로는 최영이 있었다' 라고 불릴 정도로

최영은 대단한 인물로 묘사 되는데요

 

그가 말한 명언으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죠

 

하지만 이는 최영이 한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명언은 그의 아버지인 최원직의 유훈인데

이를 최영이 평생 따랐다고 하죠

 

다음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 이야기 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 왕위에 오르자

고향이던 함흥으로 돌아가버리는데요

 

이후 태종은 아버지를 한양으로 모시기 위해

차사를 함흥으로 보냈지만

태조는 자신을 데리러온 차사들을 모두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온 사자성어가 바로 '함흥차사'라는 말이죠

 

하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사인 <조선 왕조 실록>에도 이성계가 차사를 죽였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이성계가 차사를 보내지 않는 이방원에게 섭섭해 했다고 하죠

 

박순 이라는 인물은 함흥차사로 갔다가 죽었다는 유명한 인물 중 한명인데

그가 실제로 함주에 갔다가 목숨을 잃은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이성계에 의해 죽임 당한것이 아니라

조사의가 일으킨 반란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2절에는 이런 내용이 있죠

 

바로 '대마도 정벌 이종무' 라는 가사입니다

 

이것만 봐도 이종무가 멋있게 대마도로 쳐들어가

조선을 괴롭히던 왜구들을 소탕하고

제대로 혼쭐을 내고 돌아온 대단한 장군으로 느껴지는데

사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있죠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하긴 했지만

이때 대마도에서는 정말 졸전 중에 졸전이라고 할수있는 전투가 벌어집니다

 

1419년 태종의 명을받아 이종무는 1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떠났는데요

 

이때 왜구 100여명을 죽이고 집 2000여채를 불태웠으며

포로로 잡혀있던 명나라인과 조선인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왜구들은 섬 깊숙한곳으로 도망쳐버렸죠

 

이때 식량도 제대로 없었던 왜구들이었기에

그대로 버티고만 있어도 이길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종무는 욕심을 내기 시작해

도망친 왜구들을 추격하기로 한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실 대마도의 지리는 전혀 모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섬 깊숙한 곳으로 공격해 들어갔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그냥 왜구들이 두손들고 나올때까지 기다리기만 해도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심지어 추격병을 뽑을때 제비뽑기로 뽑아서

재수 없는 사람이 차출되어 나가게되자

뽑힌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을 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대마도 깊숙한곳으로 왜구들을 추격한 조선군은

매복해있던 왜구들에게 공격당해 참패 해버렸고

180여명이나 되는 조선군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죠

 

심지어 이들을 이끌었던 박실은 2번이나 구원요청을 보냈지만

이종무는 모두 무시한채 배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을 뿐만아니라

왜구들은 도망치는 조선군들을 포구까지 쫓아와 죽여버렸는데

배위에 남아있던 조선군은 멀뚱멀뚱 보고 있기만 할뿐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죠

 

참혹한 패전을 지켜만 보고있던 이종무는

얼마 안있으면 태풍이 불것 같다며

65일치의 군량을 들고 갔지만 고작 15일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버렸습니다

 

그러자 당시 상황을 몰랐던 태종은 이종무 등 출전 장수들에게

상을 내리고 연회를 베풀었는데

훗날 졸전을 펼친것이 밝혀지자

대신들은 이종무를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죠

 

하지만 대마도 정벌은 태종 자신의 업적이기도 했고

이종무를 벌준다는것은 자신의 실패이기도 했기 때문에

태종은 신하들에게 더이상 왈가왈부 하지말라고 했지만

빗발치는 상소는 끊임이 없었고

결국 태종은 대마도에서 있었던 작전실패가 아닌

다른 일을 빌미로 이종무를 유배 보내버리고

이 일을 마무리 해버렸다고 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조선시대 양반들에 대한 이야기 인데요

 

다들 양반하면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1890년부터 약 20여년간 자전거를 타고 조선 전역을 누비고 다녔던

미국의 선교사 제이콥 로버트 무스는

자신의 저서 <1900, 조선에 살다>에

한양에 있던 집에 약 80%가 초가집이었다고 말하고 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엄청나게 지체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대가집 아닌 이상

조선시대 대부분의 양반들도 초가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죠

 

양반가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면

집에 돈이 없어 먹고 살려고 일을 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양반 취급도 못받고

평민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어야 했습니다

 

이런 몰락한 양반들을 잔반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농사도 짓고 다른집 머슴짓을 해서라도 먹고 살아야했죠

 

그런데 조선의 신분제는 굉장히 차별이 심해서

한번 천민이면 절대 신분상승을 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조선 후기에는 나라에 쌀 일곱석을 바치면

노비신분에서 벗어날수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성종때 임복이라는 외거노비는 열심히 재산을 모아

나라에 쌀 3000석을 바쳤고 성종의 특명에 의해

네명의 아들과 함께 평민이 되기도 했죠

 

또한 우리나라는 타민족을 침략한 적이 없고

침략만 받아 왔다 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데

고구려의 미천왕이나 고국양왕, 영양왕, 광개토대왕도

여러 나라에 침략을 했고

신라의 해적들은 일본의 규슈지방을 약탈하기까지 했죠

 

또한 이종무도 대마도를 공격했고

세종대왕은 북방의 여진족을 공격해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다들 우리나라의 신분제 철폐는 갑오개혁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일제강점기 때도 신분제는 계속 이어져 내려와

당시에도 머슴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죠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고나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른분들도 많이 알고 계실것 같은데요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었습니다

 

윤봉길의사는 홍커우 공원 의거 당시

두개의 폭탄을 들고 갔는데 하나는 도시락 폭탄이고

다른 하나는 물통 폭탄이었죠

 

그 중 물통 폭탄이 공격용이었고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던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물통 폭탄을 던지고나서

자결용 도시락 폭탄을 터트리지 못했고 결국 붙잡혀버렸죠

 

지금까지 알려진것과는 다른 역사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였는데요

 

생각보다 많은 사실이 잘못 알려져 있다는걸

저도 이제서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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