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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전쟁과 약탈만 한게 아니었던 고구려의 막강한 경제력

by 사탐과탐 2024.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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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약탈만 한게 아니었던 고구려의 막강한 경제력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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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영토는 척박한 산지 지형이 많아서

주로 주변국가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물론 고구려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부터

꾸준히 약탈을 통해 나라의 경제를 유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고구려가 약탈만을 통해 나라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체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하죠

지금부터 고구려의 경제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가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초기에는 약탈 중심의 경제 체제를 유지했다고 하죠

그들의 영토는 대부분이 농사를 짓기에 불리한 지역이었으며

인구 역시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구가 적다 보니 대규모 병사들을 동원할 능력 또한 없었기 때문에

부여나 옥저와 같이 국가 규모를 갖춘 강한 세력들과

정면승부를 해서 이길만한 능력도 없었다고 하죠

 

때문에 초기의 고구려가 했던 약탈방식은

대규모의 병사들이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집단적으로 약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국가의 변방지역에 소규모의 병사들이 몰래 침입해서

말이나 소 같은 가축을 훔쳐서 달아나는 도둑질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남아있는 기록이나 벽화를 봐도 고구려와 오랜 숙적이었던

부여에서 말을 훔쳤다는 기록은 많이 볼 수 있지만

부여에 대규모 공격을 했다는 기록은 많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다만 고구려가 위치해 있던 남만주 지역은 좋은 말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던 곳이기 때문에

고구려도 언제까지고 계속 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시간이 흐르면서 고구려에도 충분한 수의 말이 생겨나게 됐고

그때부터 고구려는 적극적인 약탈 전쟁에 나섰는데

이때가 바로 고구려의 3대 왕인 대무신왕의 시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절부터 우리가 흔히 고구려 하면 생각나는 기마민족형 약탈이 시작된 것이죠

 

고구려는 부여와 낙랑, 대방을 비롯한 다수의 주변국가를 침략해 약탈을 시도했고

고구려가 동북아 최강의 세력으로 떠오른 시기에도

고구려의 경제는 여전히 약탈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고구려의 인구 3만 호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 호가

'앉아서 먹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좌식자'들이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이 좌식자들은 전투가 없을 때에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전쟁에서 약탈해 온 물건과 고구려의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먹고살았다고 하죠

그러다 주변국과 전쟁을 하거나 약탈을 해야 할 시기가 오면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좌식자들이 백성들에게 세금까지 걷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고구려에서는 지배계급이 약탈행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렇게 약탈로 세력을 키워나간 고구려는

6대 국왕인 태조대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2세기말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단순 약탈이 아닌 주변국가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주변에 있는 국가들을 정복해서 자신들의 세력으로 흡수시킨 후

그 영토에서 나오는 가축과 특산품들을 진상받기 시작했죠

태조대왕의 시절부터 고구려의 기록에서 약탈집단인 좌식자는 사라지고

백성들의 대부분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고구려가 자리 잡은 한반도 북부 지역이

농사짓기에는 그리 좋지가 않은 장소라서 식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명재상으로 이름난 을파소가 고국천왕 시절에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진대법'을 시행하기도 했었죠

 

식량이 모자라면 주변국가를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진대법을 시행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백성들이 추수를 하고 나면 빌린 식량을 갚을 수 있을 만큼

농사를 짓고 있는 백성들이 많았다는 말이기 때문에

진대법만 봐도 고구려의 경제가 약탈중심에서 농사 중심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때문에 고구려에서 정기적으로 시행되던 축제도

초기에는 자신들이 주로 약탈하는 지역의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행해졌지만

2세기말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축제도 다른 농경사회처럼

자신들의 땅에서 수확이 잘되기를 바라는 형태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고구려는 농사 외에도 압록강을 중심으로 해서

물길로 짐을 운송하는 수운 체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으며

11대 왕인 동천왕의 시기에는 서안평을 공격해서 바닷길까지 뚫으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경제활동을 하려는 시도가 발견되죠

 

그런 노력의 결과 끝에 15대 왕인 미천왕의 시기에는

외부에 지어놓은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어서

그것을 내륙 지역에 가져다 파는 소금장수가 등장했으며

새경을 받으며 지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전문적인 노동인력까지 생겨났습니다

 

소금을 파는 소금장수가 있었다는 것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또한 생겨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런 형태의 경제활동은 조선에서도 중기를 지나서야 볼 수 있는 고도로 발달한 경제체제였죠

광개토대왕 시절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손에 넣은 지역에서

꾸준히 삼베나 소금, 생선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대규모 군대를 신속하게 움직이기 위한 도로망까지 정비된 탓에

그 도로망을 통해 여러 가지 물품들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인데요

 

총인구수가 수백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고구려가

수만 명의 병사들을 정복전쟁에 투입하고 전쟁을 오래 이어나갔음에도

나라의 경제가 무너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가 됐다는 것은

고구려의 경제가 이미 백제와 신라를 압도할 수준까지 올라섰다는 증거라고 하죠

 

그래서 장수왕 시기에는 고구려가 군사력뿐 아니라 경제력으로도

중국의 왕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남북조시대의 국가인 남조에서

고구려에게 800 필의 말을 빌린 것이라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남조는 강대한 기병을 거느리고 있던 북위와 맞서는 과정에서

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구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말이 부족해서 소규모로 좀도둑질을 하던 고구려가

중국의 왕조에 지원을 해줄 만큼 강한 경제력을 갖추게 된 것이죠

 

넓은 평야지역이 있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장수왕 시절부터는

금속 세공과 도제 기술까지 발달해서

청동으로 된 호우명 그릇을 신라에 보낼 정도였으며

일본에도 모피와 삼베 등의 물품을 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대한 수군까지 보유하게 된 고구려는

신라의 진흥왕이 가야를 멸망시킨 후 그곳의 광산과 항구를 손에 넣기 전까지

무역량과 제철량에서도 신라와 백제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고 하죠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북위와 교역을 할 때

그 규모가 황금으로 무려 200근, 은 400근에 달했다고 하네요

 

가야가 멸망한 후 한반도에 있던 왕조 중에서

주요 생산품으로 철을 수출한 기록이 있는 국가는 고구려 뿐이라고 합니다

고구려에서 만든 철은 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생산된 철은 병사들을 무장시키는데 쓰인 것은 물론

농사 도구와 식기 등을 만드는데도 쓰였다고 하죠

 

고구려의 생산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바로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당 태종이 고구려의 요동성을 무너뜨렸을 때의 일인데

당태종이 병사들을 시켜 성을 뒤져본 결과

그 안에서 무려 50만 석이나 되는 곡식이 나와서 당태종도 놀랐다고 합니다

멸망의 위기에 처했던 순간까지도 성에 그 정도의 식량을 보유할 수 있을 만큼

고구려의 경제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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