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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소수림왕.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전사하고나서 망하기 직전이던 고구려를 다시 일으킨 왕

by 사탐과탐 2024.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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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전사하고나서 망하기 직전이던 고구려를 다시 일으킨 왕
소수림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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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버지인 고국원왕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어 주었던 소수림왕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그는 하마터면 전성기는커녕 회복 불능으로 빠진 채 극단적으로는 나라가 망할 수도 있었던 위기의 고구려를 다시 일으킨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군 중 한 명이었죠

 

371년 10월, 고구려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16대 국왕인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 '근초고왕'이 이끄는 군대와의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는 안과 밖으로 큰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요

 

대외적으로는 정복왕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의 맹렬한 공세에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북쪽의 신흥 강국이었던 전연의 침략으로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어 국력이 크게 쇠퇴한 상태였죠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고국원왕의 장남인 '고구부'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소수림왕입니다

소수림왕은 '소해주류왕' 또는 '해미류왕'이라고도 불리죠

 

소수림왕의 즉위는 고구려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체가 장대하고 뛰어난 지략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진짜 암울했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소수림왕은 어떻게 해서든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소수림왕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국가 체제의 정비였었죠

그는 즉위 후, 불과 3년 만에 고구려의 정치, 사회,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올 세 가지 중요한 정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첫째, 372년 6월에 소수림왕은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사신과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소수림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죠

2년 후인 374년에는 또 다른 승려인 아도가 고구려에 들어왔고, 375년에는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각각 순도와 아도를 머물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죠

 

이는 단순한 종교의 수용을 넘어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다지고 백성들을 통합하려는 의도였는데요

불교의 윤회사상은 왕과 귀족들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에도 활용되었죠

이는 해동 불교의 시작으로 평가받으며, 고구려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둘째, 372년에 태학을 설립했습니다

태학은 고구려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귀족과 관리의 자제들에게 유교를 가르치고 국가 행정을 담당할 관료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소수림왕은 훗날 고구려가 더욱 강성해지기 위해선 반드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재를 체계적으로 육성 시켜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태학의 설립은 고구려가 문치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며, 이는 이전의 고구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변화였죠

 

셋째,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했습니다

율령은 국가 통치의 기본이 되는 법령 체계로, 이를 통해 고구려는 보다 체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해졌는데요

율령의 반포는 고구려가 이전의 부족연합적 성격에서 벗어나 통일된 법체계를 가진 국가로 발전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법치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렇듯 소수림왕의 세 가지 정책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수용은 국가의 정신적 통합을, 태학의 설립은 유교적 관료제의 기반을, 율령의 반포는 법치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것입니다

소수림왕은 이를 통해 고구려의 국가 체제를 한 단계 발전시키고, 무엇보다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빠르게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것이죠

 

그리고 소수림왕은 내정 개혁과 함께 대외 관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특히 전진과의 관계 유지에 힘썼는데, 이는 서쪽 국경의 안정을 확보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함이었죠

전진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제 고구려는 오로지 철천지 원수가 된 백제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인데요

이는 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의 국력이 원래대로 회복되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습니다.

375년 7월, 소수림왕은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소수림왕 즉위 후 처음으로 벌인 대규모 군사 행동이었죠

 

수곡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역에 있던 중요한 요새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수림왕의 수곡성 함락은 그동안 고구려를 만만하게 봤었던 백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요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근초고왕은 즉시 장수를 보내 수곡성을 수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규모 보복 공격을 계획했으나 흉년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군사력이 회복되었음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었고, 백제의 북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듬해 11월에 소수림왕은 다시 한 번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는 백제의 북쪽 변경을 대상으로 삼았죠

이 전투 또한 구체적인 전투 상황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 공격으로 고구려는 백제의 북쪽 영토 일부를 차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침공은 전년도의 수곡성 전투에 이은 연속적인 공세로, 고구려가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백제 또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호락호락 하지 않았는데요

377년 10월, 백제는 대대적인 역공에 나섰습니다

근초고왕에 이어 새로 즉위한 백제의 근구수왕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한 것이죠

이는 374년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 이후 3년 만에 다시 이루어진 대규모 침공이었습니다

 

당시 평양성은 고구려의 남쪽 전초 기지로, 한강 유역 진출을 위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는데요

근구수왕의 평양성 공격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한강 유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벌어지게 되었죠

소수림왕은 근구수왕의 맹렬한 공격을 잘 막아내면서 그들을 물리쳐버린 겁니다

불과 3년 사이에 고구려 군사력이 급격히 강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죠

 

그렇게 평양성 방어에 성공한 소수림왕은 한달 뒤에 곧바로 반격에 나서게 됩니다

백제의 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신속하게 백제 영토를 공격한 것이죠

 

이러한 백제와의 전투들은 소수림왕 치세 동안 고구려가 이룩한 군사적 성과를 잘 보여줍니다

즉위 초기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 수년 만에 공세적인 대외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은 소수림왕의 내정 개혁과 군사력 증강 노력의 결과였죠

 

특히 평양성 방어 성공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요

이는 고국원왕이 전사한 곳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선왕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의 자존심을 회복했다는 상징적 의미라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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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수림왕의 군사 활동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378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같은 해 거란의 침입을 받아 8개 부락을 빼앗기기도 했죠

이러한 자연재해와 외침은 소수림왕의 통치에 큰 시련이었을 테지만 그는 이를 잘 극복하고 고구려의 국력을 꾸준히 신장시켜 나갔습니다

 

결국 소수림왕의 이러한 내정과 군사적 성과는 고구려가 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초석이 되었죠

이는 후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의 영토 확장과 전성기로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소수림왕의 재위 기간은 371년부터 384년까지 14년으로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가 고구려 역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데요

 

불교를 한반도 내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물론 뛰어난 외교적 수완도 대단했었죠

소수림왕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아버지 고국원왕 때 크게 쇠퇴했던 국력을 상당 부분 회복시킨데다가 고구려의 전성기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 정말 대단한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훗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 때 고구려가 최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으니 말이죠

그 덕분에 고구려하면 막강한 군사력과 한반도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나라로 기억하게 됐으니까요

 

지금까지 고구려의 존폐 위기 상황에서 즉위하자마자 과감한 개혁을 통해 나라를 구해낸 명군, 소수림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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