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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대무신왕.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등장 하기 전에 고구려의 패왕, 전쟁의 신으로 불린왕

by 사탐과탐 2024.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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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장수왕이 등장 하기 전에 고구려의 패왕, 전쟁의 신으로 불린왕
대무신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705년이나 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는 무려 28명의 왕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정복군주로 우리에게 유명한 왕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있죠

그런데 이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 졸본 땅의 소국에 불과하던 고구려를

압록강의 패자로 만들었던 고구려의 첫 패왕이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대무신왕'입니다

 

고구려의 3대 국왕인 대무신왕은 이름부터가

'전쟁의 신', '무에의 신'이라는 엄청난 뜻을 가지고 있죠

유명만화인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이자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에 나오는 호동왕자의 아버지가 되는 인물인데

낙랑국에서는 대무신왕을 '북국신왕'이라 부를 만큼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무신왕의 이름은 '무휼'로 제2대 왕인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장남이었던 도절이 어린 나이에 죽고

둘째 아들인 해명은 황룡국 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죠

때문에 셋째인 무휼이 태자 자리에 앉게 됩니다

 

'삼국사기'에 대무신왕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유리명왕 28년 8월인데

이때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올 것을 명령하는 사건이 있었죠

아직은 고구려의 세력이 부여에 비해 약하다고 생각했던 유리명왕은

부여의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보냈는데

 

이때 어린 나이의 무휼이 부여에서 온 사신을 직접 만나 부여의 현재 상황을 두고

달걀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처럼 위태롭다는 '누란지위'라고 평가하며

부여 왕인 대소왕에게 부여의 내부사정이나 잘 다스리라는 경고를 남겼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사건이 있은지 4년 후 11월에 기어이 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해 왔는데

이때 무휼이 얼마 되지 않는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학반령 전투에서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부여군을 기습하는 계책을 써서

부여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고 하네요

 

부여를 격파한 다음 해부터 무휼은 고구려의 태자로서 직접 국정에 참여했으며

4년 후 유리명왕이 승하하자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구려의 제3대 국왕이 되었죠

대무신왕 3년 10월 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통해 붉은 까마귀 한 마리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까마귀는 머리가 하나에 몸통이 둘인 돌연변이었는데요

 

부여의 백성이 이 까마귀를 잡은 후 대소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그 까마귀를 두고 "원래 까마귀는 검은색인 것이 정상인데

저토록 붉은색을 하고 있으니 무척 기이한 일입니다

그리고 몸통은 둘인데 머리가 하나인 것은

두 나라가 한 명의 왕 아래로 합쳐진다는 의미이니

장차 고구려가 부여의 밑에 들어올 징조이옵니다"라고 말했죠

그 말을 들은 대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

자신이 들은 말까지 사신을 통해 전달하며 고구려를 협박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무신왕은 오히려 까마귀의 검은색은 북방을 뜻하는데

 

이 까마귀는 남방을 뜻하는 붉은색을 띠고 있으니

이는 남쪽에 있는 고구려를 하늘이 선택한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행운의 상징을 고구려에 넘겨준 부여에 감사를 표했죠

그 말을 전해 들은 대소왕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다음 해 겨울 대무신왕은 군대를 소집해 오랜 숙적인 부여를 공격했죠

부여의 남쪽지역으로 진군하던 고구려군은

일부러 진흙이 많은 땅의 평지를 골라 그곳에 진지를 짓고 적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얼마 후 부여의 대소왕이 병력을 끌고 공격을 해왔는데

고구려군의 진지 주변이 온통 진흙투성이었기 때문에

많은 부여군이 진창에 빠져버리고 말았죠

 

그 모습을 본 고구려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졌고

결국 고구려의 장수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베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왕이 죽는 것을 본 부여의 병사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분노에 휩싸여 거세게 공격을 해왔고

오히려 고구려군을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죠

 

위기감을 느낀 대무신왕은 풀로 만든 허수아비에게

무기를 쥐어줘서 거짓으로 군사들이 진지에 있는 것처럼 꾸며놓은 후

샛길로 자신의 병사들을 끌고 겨우 도망쳐 나왔다고 합니다

 

대소왕을 잃은 부여가 분열하기 시작하면서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은 압록곡 주변에 '갈사부여'라는 나라를 세웠고

대소왕의 사촌동생은 부여의 백성 1만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을 청했죠

대무신왕은 그를 왕에 봉하고, 연나부 소속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연나부는 이후 절노부로 이름이 바뀐 후 대대로 고구려의 왕후를 배출했으며

고추가라는 높은 지위를 얻는 등 왕실이 소속되어 있는 계루부를 제외하면

소노부와 함께 고구려의 최상위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곳이죠

 

재위 9년 대무신왕은 개마고원 일대의 나라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개마국'을 정벌하고,

2달 후에는 구다국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을두지'와 '송옥구'라는 인물들을 재상으로 임명해

나라의 내정을 다스리는데 힘쓰기도 했죠

 

고구려에서는 8대 국왕인 신대왕 시절의 인물인 명림답부가

최초로 '국상'이 되기 전까지 좌보와 우보라는 직책이 최고의 지위였는데

을두지와 송옥구가 각각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고 하네요

 

2년 후인 28년 음력 7월에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 왔습니다

이때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계책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버티고 있었는데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한나라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또다시 계책을 세웠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위나 암성 주변은 모두 암석지대라 적들은 성내에 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고구려군의 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 같으니

성내에 있는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서

아직 물이 많은 것처럼 적을 속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에서 보내온 잉어를 받은 적장은 아직 성 안에 물이 많이 남은 것으로 오해하고는

짧은 시간 안에 성을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 결국 퇴각을 하게 되죠

 

재위 15년에는 낙랑왕 최리가 다스리는 낙랑국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바로 이때의 일화죠

고구려가 낙랑 정벌을 시작하기 전 호동왕자가 옥저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와 만나 그의 사위가 되기로 약속을 했는데

호동은 고구려로 귀국한 후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

낙랑의 무기고에 있는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숴버린다면 당신을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고구려가 낙랑국을 기습하면서 항복을 받아내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때의 기록을 보면 아무리 봐도 로맨스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것이

호동왕자가 낙랑공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네가 너희 나라를 팔아먹지 않으면 너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겠다는 협박이 써져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면 분노한 낙랑왕 최리가 딸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데

정작 호동왕자는 이후 그녀를 구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낙랑공주를 사랑했다기보다는 그저 이용해 먹을 대상으로 본 것일 뿐이라 짐작되죠

 

결국 호동왕자 또한 낙랑공주를 이용한 업보를 받게 됩니다

호동왕자가 낙랑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우며 명성을 높이자

그가 태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는

대무신왕에게 왕자 호동이 자신을 음란한 눈으로 쳐다본다며 모함했고

결국 누명을 쓴 호동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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