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정복왕 근초고왕에게 원통하게도 전쟁터에서 전사해버린 고구려 비운의 왕이자 최전성기로 갈 수 있었지만
거꾸로 고구려의 잃어버린 40년을 만든 고국원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4세기 초반, 동아시아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진 왕조가 무너지고 5호 16국 시대가 도래했으며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패권을 다투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죠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고구려의 제16대 왕으로 즉위한 이가 바로 '고국원왕'입니다
331년, 아버지 '미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국원왕의 본명은 '사유' 또는 '쇠'였습니다
미천왕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왕으로
고국원왕에게는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 고구려를 더욱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고국원왕은 즉위 직후부터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백성들의 민생을 돌보는데 힘썼는데요
그는 졸본에 있는 시조 주몽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전국을 순행하며 늙고 병든 자들을 위문하고 물품을 지급하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노력했죠
이는 새로운 왕으로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국가의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국원왕의 치세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북쪽으로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 남쪽으로는 훗날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근초고왕과 맞서야 했죠
우선 고국원왕 즉위 초기에 고구려의 가장 큰 위협은 북쪽의 전연이었습니다
전연은 선비족 모용부가 세운 나라로,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죠
고구려 역시 요동 지역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고국원왕은 전연의 위협에 대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는데요
우선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하고, 335년에는 신성을 쌓았습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336년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전연을 견제하려 했고, 338년에는 전연과 전쟁 중이던 후조와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원으로 진출을 꾀하던 전연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339년 전연의 모용황이 이끄는 대군이 고구려의 신성까지 진격해 왔죠
고국원왕은 전쟁을 하기보다는 일단 화친을 요청했고, 이후 태자를 전연에 보내는 온건책으로 전연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죠
결국 342년, 전연은 55,000명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모용한이 전연의 황제 모용황에게 고구려와 우문부를 먼저 멸망시켜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는 조언을 했던 것이죠
훗날 후금이 우선 조선부터 굴복시키고 중원의 명나라와 전쟁에 집중했던 것처럼 전연 입장에서는 후방의 고구려가 눈에 가시였던 겁니다
그러나 고구려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환도성과 국내성을 증축시키면서 전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허를 찔리고 말았는데요
그 당시 북방에서 고구려로 쳐들어오는 곳은 평탄한 지형인 북도와 험난한 지형인 남도가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고구려에서는 적의 주력이 기병인 점을 고려해서 북도로 침공해 올 것으로 예상했죠
그러나 전연 최고의 전략가 모용한의 계책으로 전연은 고구려가 예상하지 못하게 남도로 정예 주력 4만을 보냈고
북도로는 15,000명을 보내는 양동작전으로 침공했던 것입니다
고국원왕은 고구려는 정예군 5만을 북도에만 배치하는 실수를 범했고
결과적으로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는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히는 큰 타격을 입었죠
게다가 미천왕의 무덤마저 도굴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으며 고국원왕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패배 이후 고국원왕은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바치는 등 굴욕적인 외교를 펼쳤는데요
마치 조선의 인조가 청나라의 홍타이지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것처럼 말이죠
어쨌든 이후 미천왕의 시신은 돌려받았지만, 어머니 주씨는 10년 넘게 인질로 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고구려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고국원왕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소문이나 비난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고국원왕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그는 343년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낙랑과 대방 지역을 경영하는데 힘썼습니다
전연의 위협에 대비하면서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기반을 다지려는 시도였죠
한편, 전연과의 갈등이 일단락되자 고국원왕은 남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이 시기 백제는 '근초고왕' 덕분에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고, 남쪽의 마한 세력을 어느정도 병합하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죠
그렇게 북쪽이 막히자 남쪽으로 눈을 돌려야 했던 고구려와 남쪽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백제는 한반도 중부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69년, 고국원왕은 먼저 선수를 쳐 2만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의 치양성(현재의 황해도 배천 지역)을 공격했죠
그러나 이 공격은 백제의 태자였던 근구수의 활약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고구려군 5천 명이 포로로 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게 오히려 선제 공격을 했지만 역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죠
그로부터 2년 후인 371년, 고국원왕은 다시 한 번 백제를 공격했지만 또다시 패배했습니다
그러자 기세를 탄 근초고왕은 직접 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죠
고국원왕은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결사적으로 방어했지만, 불행히도 전투 중에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고국원왕의 전사는 고구려에 엄청난 충격이었죠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면서 앙숙의 관계가 됩니다
이렇게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두 차례나 당했으니 무능한 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좀 달랐는데 우선 그 시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가 그렇듯 창업군주 시기일 때가 그 나라의 국력이 가장 강할 때이기도 하죠
모용황이 건국한 전연 또한 그랬으며, 하필 그를 보좌했던 모용한은 전연 최고의 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입장에선 처음 당해보는 모용한의 양동작전에 힘없이 패배했던 것이죠
그리고 백제의 근초고왕 역시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정복왕으로 불리면서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였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고국원왕이 무능했다기보다는 불운했다고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이렇듯 고국원왕의 재위 기간은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치세를 단순히 실패로만 볼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불운했든 무능력했든 고국원왕은 아버지 미천왕이 확보했던 알짜배기 영토들을 지키지 못하고 날려먹은 건 비판받아야 할 텐데요
심지어 고국원왕 치세기를 고구려의 잃어버린 40년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같은 시기 고구려보다 한참 늦게 도시국가 수준에서 벗어났던 백제와 신라가 고국원왕 때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전연에게 대패하고 수습하는 사이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정복왕답게 수많은 지역을 정복하게 되면서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이죠
만약 고국원왕이 아버지 미천왕이나 후손들만큼 뛰어난 군주였다면 그때까지만해도 백제와 신라 등의 나라가 힘이 약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반도 중남부를 손쉽게 장악했을 거란 주장이 많습니다
어찌됐든 고국원왕은 고구려의 왕권을 안정시킨 인물이었으며 태왕으로 기록된 첫번째 왕이었죠
태왕은 왕 중의 왕이란 뜻으로 그만큼 고국원왕은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왕의 권위를 드높인 군주였습니다
비록 뼈아픈 패배를 두 차례나 당하긴 했지만 굴하지 않고 전쟁 때마다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앞장서는 리더십과 카리스마있던 왕이었죠
그리고 고국원왕 자신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그리고 손자인 광개토대왕은 모두 뛰어난 왕으로 고구려의 부흥을 이끌며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지금까지 후손들 농사는 아주 잘 지었지만 정작 본인은 운 나쁘게 명군이 되지 못하고 고구려의 잃어버린 40년이라는 오명을 남겼던 고국원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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