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고국천왕에게 등용되어 한번에 고구려 최고 관직 국상에 오른
을파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과 위인들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한 시대에 이름을 알린 것도 모자라 나라의 운명까지 바꾼 이들이 있었죠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가 바로 그런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2세기 말, 고구려가 집안싸움으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했었는데요
을파소는 단순히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개혁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업적 중 특히 주목받는 것은 '진대법'의 실시인데, 이는 당시로서는 혁신을 넘어 혁명적인 복지 정책이었죠
농사짓던 농부가 어떻게 고구려의 재상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인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을파소는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 시대의 대신 '을소'의 후손이었죠
하지만 을파소가 살던 시기에는 그의 가문이 이미 몰락해 있었고, 그는 서압록곡의 좌물촌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을파소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1년 고국천왕이 고구려를 다스리던 시기였는데요
당시 고구려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왕후의 외척인 '어비류'와 '좌가려' 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죠
이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결국 고국천왕이 이들을 처벌하려 하자 좌가려 등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죠
고국천왕은 이 반란을 진압한 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4부에 명령을 내려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동부의 '안류'라는 인물이 추천을 받았는데 안류는 자신 대신 을파소를 천거했죠
안류는 을파소에 대해 "성품이 강직하고 지혜와 사려가 깊지만,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힘들여 밭을 갈아 스스로 먹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했는데요
그러자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직접 만나보기로 하고 그를 초빙했습니다
그러고는 을파소에게 '중외대부'라는 높은 관직을 내리고 '우태'의 작위를 주었죠
그런데 을파소는 고국천왕이 내려준 관직을 거절했는데요
그는 "신은 미련하고 게을러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 수 없으니 어진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시고, 큰일을 이루시옵소서"라고 말했죠
시골에서 농사 짓던 농부가 정치를 하면 수많은 귀족들의 반발이 있을게 뻔했기 때문에 중외대부 정도의 관직으로는 나라의 큰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이러한 속뜻을 간파하고 그를 고구려 최고의 관직인 '국상'에 임명했죠
농부 출신인 을파소가 단숨에 고구려 최고위직에 오른 것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을 겁니다
당연히 기존의 귀족들과 신하들은 을파소를 시기하고 반발했죠
그러나 고국천왕은 "국상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할 것"이라는 강력한 엄포를 내려 을파소에게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국상의 자리에 오른 을파소는 곧바로 개혁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는데요
첫째, 을파소는 교육 제도를 개편했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등용하는 것이 국가 발전의 핵심이라고 보았죠
이를 위해 학문을 장려하고, 관리 선발 제도를 개선했습니다
둘째, 을파소는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죠
그는 관리들의 비리를 엄중히 처벌하고 공정한 행정 체계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셋째, 을파소는 경제 정책 개혁을 통해 국가의 재정 기반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고자 했죠
특히 그가 실시한 진대법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정책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농부 출신으로서 백성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을파소의 이러한 정책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가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치를 밝히며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죠
을파소의 개혁은 단순히 정책의 변화를 넘어 고구려의 정치 체제 자체를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그의 등장 이전 고구려는 여러 귀족 세력들이 힘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체제였는데요
그러나 을파소의 개혁을 통해 점차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체제로 변화해 갔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보다 강력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죠
뭐니뭐니해도 을파소의 업적 중 가장 대단했던 것은 '진대법'을 실시한 것인데요
진대법은 '춘궁기'인 3월부터 7월 사이에 관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인 10월에 갚게 하는 그 당시에는 정말 획기적인 제도였죠
이는 당시 농민들이 겪던 가장 큰 어려움인 봄철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다만 진대법이 실시된 정확한 시기와 을파소의 직접적인 관여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진대법이 시행된 시기가 을파소가 국상으로 활약하던 때와 일치한다는 점, 그리고 을파소가 농부 출신으로서 농민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을파소가 이 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진대법의 실시 덕분에 당시 농민들의 삶이 크게 개선됐습니다
봄철 식량난으로 인해 농사를 포기하거나 유랑민이 되는 농민들이 줄어들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국가의 생산력 증대로 이어졌죠
또한 이 제도는 농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대법의 영향은 고구려 시대에 그치지 않았는데요
이 제도는 훗날 11세기 송나라의 '청묘법'과 조선 시대의 '환곡제'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의 환곡제는 진대법을 더욱 발전시킨 형태로 조선 후기까지 지속된 중요한 국가 정책이었죠
진대법은 단순히 굶주린 백성들에 대한 구휼 정책을 넘어
국가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복지 정책의 원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을파소는 9대왕 고국천왕에 이은 산상왕 시기에도 국상으로 지내다가 20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가 죽으니 백성들이 대단히 슬퍼하며 곡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는 을파소가 얼마나 백성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죠
시기와 나라를 불문하고 현재까지도 부정부패는 항상 존재해오고 있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항상 배고프고 굶주리기 마련인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19세기 전에 이미 관직에 귀천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만 보고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한 고국천왕도 대단하고 농부 신분에서 고구려의 명재상이 되어 백성들에게 큰 존경을 받은 을파소 또한 정말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농사 짓다가 한순간에 고구려의 최고 관직에 오른 후, 수많은 개혁정치를 실시했던 명재상 을파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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