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장수에서 고구려 전성기의 뿌리를 마련한 명군이었지만
마지막이 최악이었던 고구려의 왕 미천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왕족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고, 소금장수로 연명하다 극적으로 왕위에 오른 그의 이야기는 지금 봐도 정말 신기할 정도입니다
미천왕은 300년부터 331년까지 32년간 고구려를 통치하며 영토 확장과 국력을 키우는데 힘썼습니다
그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서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기틀을 마련할 정도로 명군이었지만 동시에 한국사 역대급으로 고인능욕을 당한 비운의 왕이기도 했죠
오늘은 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미천왕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천왕의 본명은 '을불' 또는 '을불리'입니다
그는 고구려 제13대 왕인 '서천왕'의 손자이자, 제14대 '봉상왕'의 조카였습니다
을불의 아버지 '돌고'는 봉상왕의 동생이었는데, 293년 봉상왕에 의해 반역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죠
그 사건으로 인해 어린 을불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궁궐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도망친 을불은 수실촌이라는 시골 마을의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부자는 을불이 왕족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를 마구 부렸습니다
낮에는 쉴 새 없이 땔감을 해오게 하고, 밤에는 개구리 소리가 시끄럽다며 연못에 돌을 던지게 했다고 하죠
이런 고된 노동을 1년간 견디다 못한 을불은 결국 그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을불은 재모라는 사람을 만나 소금장수가 되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수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을불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죠
주인 할머니가 소금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을불의 소금 자루에 몰래 자신의 신발을 넣어두었던 것입니다
졸지에 을불은 도둑으로 몰려 관가에 끌려가 매를 맞고 소금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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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구려의 궁궐에서는 봉상왕의 폭정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자연재해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봉상왕은 백성들을 동원해 궁궐을 증축하는 등 사치를 일삼았죠
이에 국상 '창조리'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봉상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창조리는 자신의 부하에게 을불을 찾아오도록 시켰고 마침내 비류강 기슭에서 그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을불은 처음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를 주저했습니다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계속 숨어지냈기 때문에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이 아닌지 경계했던 거죠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끝에 겨우 설득하고 그를 창조리에게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300년, 창조리와 여러 신하들의 주도로 봉상왕이 폐위되고 을불이 미천왕이 됩니다
이렇게 을불은 한순간에 소금장수에서 고구려의 왕이 되었죠
미천왕은 즉위 후 곧바로 영토 확장에 나섭니다
당시 중국은 진 왕조가 쇠퇴하면서 5호16국 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미천왕은 이러한 정세를 잘 이용해서 중국 동북 변방의 영역을 공격해 영토를 야금야금 넓혀 나갔죠
먼저 302년에 미천왕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해 8천여 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어 311년에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서안평을 점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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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평 점령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요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중국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가는 육로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천왕의 가장 큰 업적이었던 313년 낙랑군과 314년 대방군을 차례로 정복하게 됩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고조선의 옛 영토를 수복하게 되었죠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나라 때부터 설치되어 400여 년간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곳으로
이 지역의 정복은 고구려가 명실상부한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천왕의 낙랑군과 대방군 정복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한 것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의 국력을 키우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되는데요
왜냐하면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은 비옥한 평야 지대로, 이 지역에서 생산된 곡식들이 고구려의 경제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죠
또한 이 지역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있었기에 고구려는 이를 흡수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미천왕이 당시 어지럽던 정세를 잘 이용했던 것처럼 모용선비 또한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는데요
모용선비는 선비족의 한 갈래로, 모용외의 통솔 아래 급속도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죠
319년, 동진의 평주자사 최비는 고구려와 단부, 우문부 등을 규합해 모용선비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작전은 모용외의 책략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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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는 사자를 보내 우문부에게 소고기와 술을 내주었는데, 이를 알게 된 고구려와 단부는 우문부와 모용외가 모의했다고 의심하고는 바로 군사를 물려 버렸습니다
결국 우문부 홀로 단독으로 모용외를 공격했지만 대패 당하고 말았죠
만약 모용선비를 공격하는 합동작전이 성공했다면 고구려가 100년이나 앞서서 요동 진출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대신에 모용외는 이를 계기로 주변 세력을 정복하면서 훗날 전연이 건국되는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전연은 순식간에 강대국이 되어 고구려에게 치욕스러운 굴욕을 안겨주게 되었죠
아무튼 이후 미천왕은 여러 차례 요동을 공격했지만, 모용선비의 굳건한 방어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심지어 한때는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화친을 맺기도 했죠
미천왕은 고구려 단독으로는 모용선비를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330년에 후조의 왕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연합을 구성해 모용선비를 협공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이듬해 미천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죠
미천왕과 모용외의 대립은 후대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에 의해 건국된 전연은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이 고구려를 다스리던 시기에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었죠
하지만 고국원왕은 전연의 뛰어난 책략가 모용한의 양동작전에 걸려들어 완패 당하면서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당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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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은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모용황은 그의 어머니와 왕비가 사로잡혔고 심지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지고 돌아가버렸죠
결국 고국원왕은 어쩔 수 없이 모용황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면서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 받을 수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 주태후는 13년이 지나서야 고구려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미천왕과 그의 아들 고국원왕 때까지는 모용선비와 전연에게 줄곧 패하며 요동 지역으로의 진출에 애를 먹었지만
결국 그들의 후손인 광개토대왕 때 이르러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선조들의 염원을 풀게 되었죠
역사적으로 볼 때, 미천왕은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가 이룩한 영토 확장 중에서 특히 낙랑군과 대방군의 정복은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이죠
어린 시절의 고난, 소금장수로서의 경험, 그리고 마침내 왕이 되어 고구려를 잘 이끈 그의 삶은 정말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미천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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