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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축치인.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를 찾아가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황당한 풍습

by 사탐과탐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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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끊는 풍습이 있는 축치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축치 반도에는 약 16000명 정도 되는 축치인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를 찾아가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황당한 풍습이 있다고 하는데요 

 

대체 왜 이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엽기적인 전통이 생긴 것인지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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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해드릴 축치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시베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추콧카 자치구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구단주였던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2000년부터 8년 동안 이 추콧카 자치구의 주지사로 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축치인의 기원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시베리아 동북부 내륙에서 야생 순록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던 고대 종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죠 

이들은 적어도 6천 년 전부터 추콧카 반도 내부에 살면서 사냥 등의 수렵생활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축치인이 러시아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40년대이며 기록에 따르면 이들 축치인은 툰드라지대에서 순록을 기르는 유목그룹과 해안가에 정착해 에스키모인들과 더불어 해양동물을 사냥하며 살던 정주그룹으로 나뉘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7세기말 이후부터 콜리마 강 하류 지역에서 러시아인과 축치인의 접촉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면서 러시아에서는 그 지역의 축치인들을 군사적으로 정복하려 시도했지만 결국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축치인들에게 모피나 가축등을 세금으로 받는 야삭을 부과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고 합니다

 

축치족은 러시아가 1917년 혁명으로 몰락하기 전까지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은 유일한 원주민으로 그들은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침략해 올 때 창과 화살 같은 원시적 무기를 든 채 총포로 무장한 코사크에 대항해 싸웠다고 하죠

축치인들은 만약 싸우다 자신들이 죽게 된다 하더라도 자기 종족으로 다시 환생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1643년 축치족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코사크들은 축치반도 태평양 해안에 요새를 만들고 그곳에 600명의 병사와 1개 포대의 병력을 주둔시킨 후 축치족들에게 모피와 토산물을 야삭으로 바치라고 요구했지만 축치족은 매우 호전적인 성향의 전투민족인 데다 주변 민족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하죠

러시아도 처음 50년 동안에는 축치와 싸워서 이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해 싸움을 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캄차카 반도가 개척되고 아메리카 식민지가 열리면서 축치 거주지를 지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1700년대가 되면서 마침내 러시아가 축치족 제압을 시도하게 되죠

러시아가 첫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축치반도의 축치족과 캄차카 반도의 코랴크족이었는데 비교적 협조적으로 나온 코랴크족과 달리 축치족은 러시아인들에게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러시아는 1708, 1709, 1711년에 연이어 원정대를 보내 축치족을 공격했죠

하지만 축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탓에 러시아의 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축치인들은 총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소리가 나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적병에게 화살을 쏘아댔으며 용맹스러운 코사크마저도 그런 축치인들의 용기에 감탄했다고 하죠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축치 전사들의 이런 용맹한 태도는 바로 그들의 신앙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 사람이 나이가 들어 죽거나 질병에 의해 죽는 것은 '켈르'라는 악귀가 사람의 영혼 또는 장기를 빼앗아 가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켈르에게 영혼을 빼앗겨 죽은 사람은 켈르처럼 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이 돼버리는데 만약 켈르에게 영혼을 빼앗기기 전에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할 경우에는 켈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때문에 축치인들은 나이가 많아지거나 중병에 걸리게 되면 아들이나 가까운 친척 또는 친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그런 부탁을 받은 사람은 그 청을 들어줄 의무를 가지게 되는 관습이 생겨났죠

게다가 축치족은 조상의 영혼이 자기 집안에 아기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악귀 켈르에게 영혼을 빼앗겨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귀신이 되기보다는 자발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의 집안에 다시 환생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축치족은 자발적으로 죽은 자들이 천상세계로 가서 좋은 대접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어 죽음을 맞는 것일 뿐 전쟁터에 나가서 적들과 싸우다 죽는 것에는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죠

계속되는 축치의 저항에 실패를 거듭하던 러시아는 1725년 표트르 대제의 명을 받고 아파나시 쉐스타코프를 대장으로 하는 원정대를 극동에 파견합니다

 

하지만 그 원정대는 오히려 축치인들에게 역으로 박살이 났고 1730년 3월에는 파렌강 근처에서 지휘관까지 살해당하는 참사를 겪게 되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는 1731년 잔혹하기로 유명한 드미트리 파블루츠키 소령을 파견해 초토화전술을 지시했습니다

 

파블루츠키의 부대는 축치인들의 마을을 습격해 남자는 모두 죽여버리고 집은 모조리 불태웠으며 그들이 기르던 순록은 모두 내쫓아버리고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시장에 팔아버렸죠

이제 러시아에게 그들은 점령의 대상이 아니라 아예 씨를 말려버려야 하는 존재가 돼버린 것인데요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부족들까지 러시아의 편을 들면서 축치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주변 부족들 모두를 상대로 싸우게 됩니다

 

이후 1744년부터 3년 동안 처절한 전쟁이 펼쳐졌지만 1747년 3월 파블루츠키가 전투 중에 사망하면서 전쟁은 다시 한번 러시아 원정대의 패배로 끝나게 되죠

그 후 오랜 세월 대립을 계속하다가 1820년이 돼서야 마침내 러시아가 축치인들을 자신들의 세력에 편입시키는 것을 포기한 채 원하는 만큼의 야삭을 납부받는 정도로 만족하며 끝을 맺게 됩니다

 

18세기 후반 시베리아 전체가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정복되었지만 축치인들의 영역만큼은 1930년까지도 완벽하게 점령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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