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오늘은 최고권력자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살게 될 줄 알았지만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늦둥이 장남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했고 너무나도 어렵게 얻은 자식을 잃은 만큼 이제 다시는 자식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피를 이은 후계자를 거의 포기한 분위기였다고 하죠
때문에 57세라는 매우 늦은 나이에 간신히 얻은 히데요리는 그에게 정말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늘그막에 겨우 얻은 큰아들인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 후 히데요시는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누나 닛슈의 아들인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이후 작은아들인 히데요리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이미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의 관백 자리를 이어받고 있었으므로 논란이 생겼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막상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이 태어나자 마음이 바뀐 히데요시는 1595년 7월 히데츠구로부터 관백 직책을 박탈하고 그를 할복시킨 뒤 그의 일가족 또한 모조리 숙청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다이묘들에게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혈판 서약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고 하죠
1596년 9월 히데요리가 성인식을 치르자 히데요시는 그때까지 독재에 가까웠던 자신의 정권 체제를 수정한 고다이로, 고부교제도를 도입해서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등 늦둥이 아들의 후계자 자리를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히데요리가 겨우 5살이었던 1598년 9월에 히데요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매독설, 위암설, 독살설 등이 있습니다
또 다른 설로는 호랑이 기생충설이 있는데요
1592년 일본군이 조선에서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 히데요시에게 진상했는데 히데요시가 매우 기뻐하며 덴노에게 가져가 자랑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일본군 장수들이 경쟁을 하듯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아 히데요시에게 진상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는 몸보신을 위해 호랑이의 고기나 장기를 생으로도 먹었는데 이로 인해 기생충 감염을 겪었을 것이라는 설이죠
그렇게 히데요리가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고다이로의 일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신 합의제의 원칙을 자주 어기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점점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또 다른 고다이로인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고 고부교이자 친 도요토미파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린 히데요리를 제치고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죠
결국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를 필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군사를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게 됩니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의 신하들이 끝까지 히데요리를 보호하려고는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버린 뒤였죠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의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세이이다이쇼군의 지위를 얻어내면서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천하인의 자리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히데요리는 높은 관직을 부여받고 매해 신년마다 조정의 중신들에게 오사카 성에서 참배를 받는 등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는 높은 예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611년 교토의 니조 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나는데 이때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고 위협을 느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킬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하죠
결국 1614년에 도요토미 가문이 호코지를 재건할 때 종명의 내용에 이에야스를 무시하는 문구를 넣었다는 호코지 종명 사건을 구실로 삼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결별을 하게 되고 머지않아 오사카 겨울 전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히데요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라 등 도요토미 가문의 아래에서 싸우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던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격문을 날렸지만 도요토미 측에 가담하는 다이묘는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나마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다이묘의 지위를 상실한 다이묘들과 그들의 가신들이나 친족이었던 사나다 노부시게 쵸소카베 모리치카, 모리 카츠나가, 아카시 타케노리 등과 그 외에도 이름을 날리고자 했던 고토 모토츠구등의 낭인들이 도요토미의 격문에 호응해서 오사카 성으로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 낭인들은 의욕은 매우 앞섰지만 오합지졸로 통제가 어려웠고 자기들끼리 서로 대립하며 갈등을 일으키기까지 했죠
전쟁 초반, 기쓰가와구치 전투, 바쿠로부치 전투등에서 도쿠가와 군에게 연패한 도요토미 군은 노다 후쿠시마 수상전투, 이마후쿠 전투, 시기노 전투등에서도 패배하며 결국 남은 주변 성채를 모두 버리고 오사카 본성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사카 본성에서의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군이 도요토미 측 낭인들의 활약으로 인해 성내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당하는 등 곤란을 겪었고 특히 사나다마루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측이 큰 손해를 입게 되죠
그러자 도쿠가와 군은 아예 전술을 바꿔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줄 의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사카 성에 포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결국 도요토미 측과 도쿠가와 측 양쪽의 식량과 탄약이 떨어지면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측에 화친을 제의하게 되는데요
히데요리는 화친에 반대했지만 어머니인 요도도노 등의 설득으로 결국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운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받아들이게 되죠
그런데 화의가 맺어진 후 도쿠가와 측은 도요토미 측이 스스로 조건을 이행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해자를 메워버린 후 성곽의 일부까지 파괴해 버렸습니다
이에 도요토미 측이 크게 항의했지만 도쿠가와 측은 이를 무시한 채 오히려 낭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영지의 일부를 교환할 것을 도요토미 측에 요구했죠
결국 1615년 도요토미 측이 도쿠가와 측의 요구를 모두 거부하고 해자를 도로 파내버리면서 이에야스는 전쟁의 재개를 선포했고 그렇게 오사카 여름 전투가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도요토미 측은 오사카 쪽으로 북상하고 있던 도쿠가와의 대군을 적은 수의 군대로 맞상대하기 위해 좁은 지역인 야오로 진군을 하게 되죠
이후 야오와 와카에, 도묘지에서의 전투에서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이끄는 도요토미 군이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도쿠가와 군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주요 장수인 키무라 시게나리, 고토 모토츠구 등이 이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면서 도요토미 군 또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또한 기슈에서의 가시이 전투에서 도요토미 군이 도쿠가와 군에게 패퇴하고 반 나오유키 등이 전사하면서 도요토미 군은 후퇴하여 오사카 성으로 물러나게 되죠
잇따른 패전으로 전력을 잃고 쇠약해진 도요토미 측은 도쿠가와의 수장인 이에야스, 히데타다가 오사카에 포진한 때를 노려 최종 결전을 다짐하게 됩니다
이때 사나다 노부시게가 도요토미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총대장인 히데요리가 직접 전선에 나와 군사들을 독려할 것을 히데요리에게 호소했지만 히데요리의 어머니인 요도도노가 전장이 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해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결국 무산되었다고 하죠
그러면서 정작 요도도노 본인은 자주 전선을 들락날락했다고 하네요
같은 해 5월 7일 도요토미 측의 모리 가츠나가 부대가 도쿠가와 측의 혼다 타다노부 부대를 사격한 것을 시작으로 오사카 전투의 마지막 전투인 덴노지, 오카야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덴노지 방면에 있었던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가쓰나가의 군은 차례차례 도쿠가와 측의 진형을 무너뜨리면서 한 때 이에야스가 자결을 각오해야 할 만큼 도쿠가와 군을 궁지에 몰아넣은 적도 있었죠
특히 사나다 노부시게는 적과 아군 양 쪽에서 '일본 제일의 용사'로 칭송받았을 만큼 여러 차례 위협적인 돌진을 감행하며 뛰어난 전투능력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에야스를 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 못한 노부시게는 퇴각하던 도중 힘이 다해서 전사했고 다른 도요토미 군도 모두 무너지게 되죠
결국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진 히데요리는 어머니인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하면서 2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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