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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모리 모토나리. 용의주도한 책모를 거듭해 전략, 전술 양면의 승리를 이끌어낸 희대의 책략가이자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

by 사탐과탐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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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주도한 책모를 거듭해 전략, 전술 양면의 승리를 이끌어낸 희대의 책략가이자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 모리 모토나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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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다이묘를 꼽을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라 불리는 모리 모토나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497년, 아키의 호족인 모리 히로모토와 모리 가문의 방계 출신인 후쿠바라 부인의 2남으로 태어난 모토나리는 1500년 그의 아버지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면서 본성인 교시다고리야마 성을 떠나 다지히사루가케성에서 살게 됐는데 5살 때 그를 아껴주던 어머니를 잃고, 10살 때 아버지마저 잃으면서 친형인 모리 오키모토의 보호아래 성에서 살고 있었지만 부모 없이 영지와 성을 운영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가신인 이노우에 모토모리가 어린 주군을 얕보고 횡령까지 하는 바람에 쪼들리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의붓어머니인 스기노오카타가 재혼도 하지 않고 친어머니의 자리를 메워주면서 겨우 버틸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가 17세가 되던 해 명나라 사람들이 모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들 중 관상을 잘 보던 사람이 모토나리를 보고는 한 고조나 당 태종의 풍모가 있다고 평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1516년 형이자 영주인 오키모토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자리를 이어받은 조카 고마쓰마루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모토나리가 조카를 대신해서 영지를 다스리게 되죠

아직 기반이 미약했던 모토나리는 고마쓰마루의 외척인 다카하시 가문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장녀를 다카하시 가문으로 시집보내 그들에게 협력을 구했습니다

말이 며느리지 사실상 인질과 다름없는 신세였다고 하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빈고에서 미요시 가문과 전투 중 다카하시 일족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모토나리가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되죠

하지만 그때까지도 너무 어린 나이에 대리청정을 맡은 모토나리는 문중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고 하네요

 

그러던 중 모리 가문과 아키에서 1, 2위를 다투던 다케다 모토시게가 모리가문의 부하인 깃카와 가문의 아리타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에 모토나리는 어린 조카를 대신해 원군을 끌고 갔는데 그것이 그의 첫 출전이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다케다 가문의 맹장 구마가이 모토나오가 그를 상대하러 오자 모토나리는 매복 등을 적절히 구사해 그의 부대를 격파한 후 대장인 구마가이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격노한 다케다 모토시게는 아리타 성 포위를 풀고 모토나리를 상대하러 갔죠

병력상으로는 분명 다케다 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모토나리는 적군이 강을 건너는 순간을 노렸다가 궁병들을 시켜 화살을 퍼부어 버렸고 화살비를 맞은 다케다 모토시게가 전사하면서 다케다 군은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그렇게 다케다 가문을 재기 불능에 빠트린 모리 집안은 머지않아 아키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죠

이후 모토나리는 아키를 통일하기 위해 이즈모와 이와미의 태수인 대영주 아마고 가문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고 가문은 원래 다케다가문과 손을 잡고 있었는데 오우치 가문이라는 강대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모리가문을 선택한 것이죠

 

그렇게 모리는 아마고 가문의 묵인 아래 다케다가문의 남은 세력들을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모토나리는 다케다가문의 본성인 가나야마성 공략 때에도 큰 공을 세우며 가문 내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되는데요

그러던 1523년 조카 고마쓰마루가 9살의 어린 나이로 죽자 모리 가문의 중신들은 모토나리를 새로운 주군으로 내세웠죠

 

하지만 사카 가문과 와타나베 가문등 유력한 호족들은 모토나리가 어린 조카를 암살한 게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모토나리의 동생인 아이오 모토쓰나를 주군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모리 가문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경계한 주인 가문 아마고 쓰네히사의 책략이었다고 하죠

하지만 모토나리는 다른 가신들의 지지를 얻어 반대파를 신속하게 제거하고 안정적으로 자신의 지배권을 지켜냈습니다

 

1525년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아마고 가문이 있었음이 드러나면서 모토나리와 아마고 쓰네히사는 원수가 되었고 모리 가문은 아마고 가문의 경쟁 상대인 오우치 가문 밑으로 들어가게 되죠

1529년 모토나리는 조카 고마쓰마루의 외척이자 자신의 사돈인 다카하시 오키미쓰 일족을 토벌했기 때문에 그곳에 인질로 잡혀있던 그의 딸은 당연히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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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모토나리는 영토확장을 위해선 딸의 목숨 따윈 아랑곳 않는 냉혈한이라고 알려지며 주변 호족들 사이에서 신용이 많이 내려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평판 따윈 무시하고 아키 지방의 또 다른 숙적인 시시도 가문에 다른 딸을 정략 결혼시키며 거듭 혈연을 늘려갔죠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주인인 오우치 가문이 권력 투쟁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져 가는 걸 이용해 거침없이 자신의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했는데요

 

그중에서도 특히 오우치 가문의 난에 휘말린 아마노 가문과 구마가이 가문과도 맹약을 맺으면서 아키의 완전 제패를 이루어냈습니다

1540년 요시다 고리야마성 전투에서 아마고 쓰네히사의 후계자 아마고 하루히사가 이끄는 3만의 아마고 군에게 역전승을 이끌어낸 모토나리는 같은 해, 오우치 가문과 함께 아키의 가나야마 산성을 공격해 다케다 가문을 아예 멸망시켜 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542년부터 1543년에 참전한 이즈모 원정에서는 깃카와 오키쓰네의 배신으로 보급선이 끊겨 대패하기는 했지만 전투에 참여한 다른 두 대영주 집안이 엄청난 타격을 받은 반면에 모토나리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잘 보전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세력이 더 강해지게 되는 유리한 결과를 얻었죠

 

1544년 모토나리는 강력한 수군을 보유한 다케하라 고바야카와 가문에 3남인 도쿠주마루를 입양시켜 그곳의 당주로 앉혔고 1547년에는 처가인 깃카와 가문에 차남 모리 모토하루를 입양 보낸 후 당주인 깃카와 오키쓰네를 강제로 끌어내리면서 자신의 차남을 그곳의 후계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한편, 누타 고바야카와에도 자신의 3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데릴사위로 보내면서 자신의 아들이 누타 고바야카와 가문을 이어받도록 만들었죠

그렇게 모토나리는 깃카와 가문과 고바야카와 가문을 모리 가문의 분가로 만들면서 두 가문을 자신의 양 날개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모토나리는 남 주고쿠 지방 중 무려 절반 가까이를 손에 넣게 되는데요

1553년 아키를 침공한 아마고 하루히사를 격퇴한 모토나리는 1554년 아마고 가문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사태가 일어나면서 북부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주군인 오우치 가문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모토나리는 오시키바타 전투,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연달아 오우치 가문의 부대를 격파했고 이후 그는 오우치의 남은 영토를 하나하나 차지해 갔는데 그 와중에 가문 내의 혼란을 수습한 아마고 가문의 당주 아마고 하루히사가 모리가문의 영토인 야마부키성을 공격해 그곳에 있던 이와미 은광을 손에 넣는 일도 있었죠

1557년 오우치 가문은 결국 북규슈를 제외한 모든 영지를 모리 모토나리에게 넘겨주고 멸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1558년에는 오우치 가문에게 뺏겼던 은광을 되찾기 위해 모토나리는 차남인 모토하루와 함께 누쿠유성으로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누쿠유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 그들은 기세를 몰아 야마부키성까지 공격해 들어갔지만 긴 원정에 병사들이 지쳐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게 되면서 포위를 풀고 철수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마고 하루히사가 보낸 원군이 도착했고 이를 본 수비군의 대장 혼조 쓰네미쓰가 성문을 열고 아마고의 원군과 협공을 가하면서 모토나리 군은 큰 패배를 맛보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560년 아마고 하루히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마고 가문이 심한 내분에 휩싸이자 아마고 측은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세이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모리 집안과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모토나리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고 주고쿠 지방을 제패할 준비를 시작했는데요

 

1562년 마침내 이즈모 원정길에 오른 모토나리는 먼저 10개 지성 중 하나인 시라가성을 함락시킨 후 과거 오우치 가문 밑에서 본성인 갓산토다 성을 공략했다 실패했던 경험을 살려 병사들을 풀어 성을 포위하기만 한 후 아마고 군 내부에 이간책을 펼치면서 가문의 권력을 이어받은 지 얼마 안 된 적장 아마고 요시히사가 선대 때부터의 중신 우야마 히사카네를 자신의 손으로 제거하게 만들었죠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부하를 죽인 아마고 요시히사는 가문 내에서 인망을 잃게 됐고 성내 병사들의 사기는 시간이 갈수록 떨어져만 갔습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투항한 적군 병사들에게 자신이 직접 죽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이며 상대의 항복을 유도했죠

 

결국 1566년에 아마고 군은 싸울 의지를 잃고 성문을 열게 됩니다

이로써 모리 모토나리는 평생의 숙적을 모두 처단하고 주고쿠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되었죠

아마고 멸망 때 모토나리의 나이는 71세로 인생 오십 년이라고 일컬어지던 그 시대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고령임에도 매우 정정했다고 하네요

 

장남인 모리 타카모토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데루모토가 너무 유약한 인물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모든 정무를 도맡아 했다고 하죠

그렇게 말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모토나리는 1571년 요시다 고리야 산성에서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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