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 다카토라는 한국에선 이순신 장군에게 연전완패했던 무능한 장수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에서는 처세술의 달인으로 성공한 인생의 주인공으로 유명합니다
오늘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모시는 주군을 9번이나 바꾸면서 결국 출세하는 데 성공한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도도 다카토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나라가 여러 개로 분열되어 혼란한 시기에는 부하가 주군을 배신하는 하극상이 밥먹듯이 일어나기 마련이죠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 말기부터 시작된 전국시대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그런데 이런 대 배신의 시대에서 10명이나 되는 주군을 모시며 끝내 출세하는데 성공은 했지만 정작 주인을 배신한 적은 없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도도 다카토라입니다
이 도도 다카토라라는 인물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이뤄낸 무패신화의 제물이 된 것으로 유명하죠
때문에 국내에서는 항상 무능한 인물로만 여겨졌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반 사병부터 시작해 다이묘까지 성장한 성공신화를 이뤄낸 인물이라고 합니다
도도 다카토라는 요즘으로 치면 이직을 굉장히 많이 한 철새 정치인으로도 유명한데요
그는 평생 10명이나 되는 주군을 모셨으며 스스로의 입으로 "주군을 7번 바꾸지 않는다면 무사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말까지 남겼다고 하죠
그런데 신기한 점은 그가 주군을 바꾸는 과정에서 모시던 주인을 배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1556년 정월 6일 오우미국 이누카미 군에서 태어난 다카토라는 1569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세로 진공 할 때 참전했고 이후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자이 나가마사를 따르게 되죠
이후 그는 아네가와 전투 우사야마 성 전투등에서 공을 세운 끝에 나가마사의 인정을 받으며 순조롭게 커리어를 쌓아가는 듯했지만 큰 사고를 저질러버리면서 자기 팔자를 스스로 꼬아버립니다
1572년 같은 주군을 모시는 가신인 야마시타 가스케와 싸움이 붙었다가 그를 죽여버리게 된 것인데요
같은 가문을 위해 일하는 가신을 죽인 것은 주군에게 문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다카토라는 그 길로 도망을 쳐서 아츠지 사다유키가 있는 야마모토야마 성으로 피신을 가게 되죠
다카토라를 맞이한 사다유키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빈객으로서 잘 대우해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다카토라는 다른 가신들과 불화를 일으켰고 특히 그중에서도 아츠지 나타스케와 히로베 도쿠히라는 무장들은 그의 명령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분노한 다카토라는 이들을 찔러 죽여버리고 아츠지 가문을 떠나 그때부터 떠돌이 무사인 낭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백수생활을 1년 정도 한 다카토라는 한때 아자이 가문의 가신이었다가 이제는 오다를 섬기는 이소노 단바노카미 카즈마사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죠
그렇게 오다가 문과의 인연이 시작되면서 드디어 정착하는 데 성공하나 싶었던 다카토라였지만 1574년에 카즈마사의 후임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인 오다 노부즈미가 오자 또다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요
다카도라는 자신이 가문의 중요한 가신이라고 생각한 만큼 그에 맞는 대우를 받기를 원했지만 노부즈미는 그가 원하는 대우를 해줄 생각이 없었고 몇 번의 교섭 끝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자 다카토라는 결국 오다 가문에서 벗어나 다시 낭인생활을 한다는 상남자스러운 초강수를 두게 됩니다
당시 오다가문이 일본 전체에 미치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미친 짓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선택이었죠
그렇게 2년간의 백수생활을 하던 다카토라는 그의 경력을 보고 반해버린 하시바 히데나가의 러브콜을 받아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됩니다
당시 히데나가의 형인 하시바 히데요시는 새롭게 하사 받은 오우미의 영지에 나가하마 성을 새롭게 쌓는 중이었는데 다카토라는 여기에 참여해 여러 가지 업무를 맡았다고 하죠
비슷한 시기에 오다 노부나가 또한 아즈치 성을 새롭게 쌓는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도 불려 가면서 토목 관련 업무만 줄기차게 했다고 하네요
이후 주고쿠 정벌에 참여해서 공을 세운 다카토라는 1582년에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가 야마자키 전투를 일으키자 여기에도 참전해 선봉으로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서도 활약하면서 히데요시로부터 5000석을 더 받아 1만 석의 다이묘로 승진하게 되죠
1591년 히데나가가 죽자 그의 조카인 하시바 히데쓰구를 주군으로 모시게 된 다카토라는 임진왜란 때 수군 9000여 명을 이끌고 참전했지만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게 여러 차례 패전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 수군의 첫 패배였던 옥포 해전 당시 지휘관이기도 했죠
1595년 히데쓰구가 반역을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자 다카토라는 고야산으로 출가를 했는데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카토라를 소환하면서 그는 무려 7만 석의 다이묘로 승진하게 됩니다
정유재란 때 수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정벌에 참가한 그는 원균이 이끄는 수군을 칠천량 해전에서 섬멸시켰지만 명량 해전에서 또다시 이순신에게 대패를 하게 되죠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다카토라는 다음 패권을 잡을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라 판단하고 뜻을 같이하는 도요토미의 가신단과 함께 잽싸게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으로 붙어버렸다고 하네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전투의 달인 오타니 요시쓰구의 부대와 겨뤄 큰 피해를 입으며 별다른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등을 설득해 서군을 배신하게 만들면서 전쟁이 끝난 후에 이에야스의 인정을 받아 2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면서 에도 막부의 중신이 된 다카토라는 오사카 전투에도 참여해 조소카베 모리치카 부대와 대결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게 됐지만 결과적으로 전투에는 승리하게 되면서 그 공을 인정받아 32만 석의 대영주가 되었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다카토라의 손을 빌리겠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임종 직전에도 그가 침상 곁에 있도록 허락하는 등 다카토라에게 많은 신뢰를 보냈다고 하는데요
이에야스가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쇼군 히데타다를 섬기다가 1630년 에도에 있는 저택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는 대세를 따라 주군을 수없이 바꾸어 섬긴 인물로 주군을 바꾸는 것이 일상적인 전국시대의 분위기에서 조차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몸담고 있는 곳을 옮긴다고 해도 상황이 불리해져서 주군의 뒤통수를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모시는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한눈팔지 않고 성실히 일했다고 하죠
때문에 오히려 이전에 모시던 주인으로부터 감사장이나 추천장을 받고 나올 정도였으며 새 주군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단순히 처세술이 좋기만 했다면 그토록 성공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그는 성을 쌓는 축성술을 비롯해 지상전에서도 유능했으며 임진왜란에서 수군을 지휘할 정도로 수전에도 능했다고 하네요
비록 이순신에게 많은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해전이라면 세계역사상 최고라 할 수 있는 이순신에게 패했다는것때문에 그를 무능한 수군장수라 평가하는 건 다카토라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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