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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하늘 아래 함께 살수 없었던 라이벌이자 숙적

by 사탐과탐 2023.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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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최악의 침략자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로 굉장히 사이가 안좋았는데요
왜 사이가 안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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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선봉장을 서서 조선 백성과 한반도를 유린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난 원수관계였습니다.

오죽하면 유키나가가 기요마사를 죽이기 위해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향할 때 미리 사람을 보내 정보를 조선에 흘려줬을 정도였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던 두 인물은 어쩌다가 서로 죽이고 싶어하던 견원지간이 되었을까요?

사실 그들이 처음부터 서로 으르렁 대던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신으로써 서로 위치상에서도 차이가 거의 없었죠

 

그런데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 하고나서 그 곳을 기요마사와 유키나가에게 동등하게 나눠 줬던 것입니다

그렇게 유키나가는 우토를, 기요마사는 구마모토를 하사 받았는데 바로 옆동네에서 살다보니 서로 영토 문제로 티격태격대기 시작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때까지만해도 히데요시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서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큰 사단이 날것이 뻔했었습니다

그래서 티격태격 대긴했지만 서로 적당히 도와가며 지냈죠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에 일본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추방하라는 '바테렌 추방령'을 공표 했던것입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종교는 불교였는데 하필이면 굉장히 극단적인 성향의 일련정종이었죠

이 일련정종은 다른 종교들은 마찬가지고 불교 내에서도 법화경외에 다른 경전들은 전부 이단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강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요마사의 눈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유키나가가 너무 꼴도보기 싫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 바테렌 추방령이 공표되자 기요마사는 자신의 영지 내에 있던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그를 피해 신자들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의 영지에 있었던 그들이 도망갔으니 자신이 직접 처리 해야 한다고 생각해 계속 잡아 오려고 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같은 가톨릭 신자이니 그들을 숨겨주고 보호해줬던 것이죠

 

그러자 그 둘의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약재상을 하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상인으로써 약재 장사를 했다가 그의 특별한 총명함이 히데요시의 눈에 띄어 가신이 되었던 것인데요

이 때문에 기요마사는 허구헌날 유키나가를 약장수라고 놀려댔다고 하죠

 

기요마사의 깐죽이 얼마나 심했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기요마사와 유키나가가 만나 작전회의를 하고 있던날이었습니다

이때 기요마사가 조선의 지도에서 한 부분을 손으로 집더니 유키나가에게 "공은 이곳을 공격하는게 어떻소?" 라고 묻는것이었죠

이에 유키나가는 그가 가리킨곳이 어딘지보니 한양 내에 있던 약재상 거리였던 것입니다

 

자신을 놀리는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유키나가는 한번 참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하죠

그러자 기요마사가 "과연 약장수다운 말이다" 라고 하며 크게 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열받은 유키나가는 자신을 모욕하는건 용서 할수 없다며 칼을 뽑아 기요마사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주위 다른 장수들이 말려 결국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고 하죠

 

이에 질세라 유키나가는 기요마사를 '무식한 칼잡이놈'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도 둘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는데요

탄금대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와 신립의 부대가 전투를 벌일때 근처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도 공을 세우기 위해 유키나가에게 참전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누가 먼저 점령할지를 다투었는데 하루차이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먼저 도착했던 것이죠

이때 유키나가는 한양에 있던 흥인지문을 통해서 한양에 들어섰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재수 없다며 숭례문을 통해 한양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식을 고니시 유키나가 보다 먼저 잽싸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를 했는데 누가 먼저 한양에 입성했는지는 쏙 뺀채 자신이 먼저 한양을 점령했다는 듯이 애매하게 적어 보냈고 그의 이런 얍삽한 짓거리를 알게된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토 기요마사를 탄핵하자 이때부터 둘 사이도 멀어져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하죠

이후로도 경쟁은 계속되어 유키나가는 평안도 방향으로 기요마사는 함경도 방면으로 북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명나라가 지원군을 보내고 이순신의 맹활약으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키나가는 강화 교섭을 하기 시작했지만 기요마사는 전쟁에 강경한 모습만을 보여줬으며 둘은 계속해서 대립할수밖에 없었죠

이후 정유재란이 벌어지고 선봉장이 된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려고 할때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일순 없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얼른 조선에 부하를 보내 가토의 상륙정보를 흘렸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은 호들갑 떨며 얼른 기요마사가 조선에 상륙하기 전에 공격하 라고 이순신에게 말했지만 이순신은 적이 알려준 정보는 믿을수 없다고 출진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덕분에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을 궤멸시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적에게 진짜 정보를 넘겨줄 정도로 둘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죠

거기다가 울산성 전투 중 조명 연합군에 포위되어 식량과 식수가 다 떨어진 가토 기요마사의 지원요청을 당시 화친을 맺기 위해 교섭을 벌이던 고니시가 묵살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로 둘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난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린것이죠

 

심지어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둘 사이를 중재하느라 진땀을 뺐는데 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둘이서 허구헌날 싸우자 열받은 히데이에가 "둘이 영지를 걸고 싸우든지 아니면 조용이 하던지 하나만 선택하라" 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후 결국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군은 모두 퇴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둘 중 누가 최후의 1인이 될지 판결이나는 전쟁이 벌어지게 되죠

바로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립하게 되고 그렇게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져 전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때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편인 서군편에 서서 참전하게 되었고 가토 기요마사는 원수였던 둘이 서군편에 서자 자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인 동군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수되었으며 유키나가의 영지는 가토 기요마사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가토 기요마사가 되긴 했지만 가토 기요마사도 그가 죽고나서 그의 집안이 거의 멸망하다시피 해버리긴 했죠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그 둘 사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일본군이 퇴각을 할때 위험에 빠졌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가토 기요마사가 도와줬는데 이때 기요마사는 "우리 사이가 나빠도 우리 장수를 버리고 가는건 국가의 수치다" 라는 이유로 그를 지원했다고 하죠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후로 공과 사이좋게 지내고싶다" 라고 말했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공과 나는 가는 길이 달라 친해질수 없다" 라고 대답하면서 씁쓸해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자신의 라이벌이 함께 태어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요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도 서로 떼어낼수 없는 라이벌이자 숙적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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