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책략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제갈공명으로 불렸던 구로다 칸베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유비의 책사, 참모하면 가장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제갈량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히데요시의 제갈량이라고 불리는 참모가 있었죠
그는 바로 '구로다 칸베에' 라는 인물로 현재 일본인들이 전국시대 인물중 가장 좋아하는 책략가 중 한명이라고 합니다
구로다 칸베에의 원래 이름은 구로다 요시타카 인데요
구로다 가문은 과거부터 코데라 마사모토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아버지 구로다 모토타카가 코데라 마사모토의 양녀와 결혼하면서 1546년 하리마 히메지에서 태어나게 되었죠
이때부터 구로다 가문은 마사모토로 부터 코데라 성을 하사 받으면서 칸베에는 어릴적 코데라 요시타카라 불리게 됩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총명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주 대리 역할도 했으며 아카마쓰 가문이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코데라 가문의 본성인 히메지 성을 공격했을 땐 고작 300여명의 병력으로 이를 격파해버리면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죠
한편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가 주고쿠 지역을 침공해 올때 코데라 가문에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에 빠지는데요
모리 가문과 오다 가문 중 어디로 붙어야 살아남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때 대부분의 신하들은 모리 가문에 붙는게 나을것 같다고 말했지만 오직 칸베에만 오다 노부나가의 진정한 힘을 알았기 때문에 주군이던 코데라 마사모토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결국 오다 가문에 붙게 됩니다
그러던 1578년 3월, 하리마의 최대 호족세력인 벳쇼 나가하루가 모리 가문쪽으로 붙자 주위 여러세력도 그와 동조해 모리 가문으로 붙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죠
이때 코데라 마사모토 역시 칸베에의 간곡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노부나가를 배신해 다른 세력들 처럼 모리가문에 붙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이던 아라키 무라시게가 갑자기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모반을 일으키기까지 했죠
이때 오직 칸베에만이 정세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무라시게의 친구사이 였던 칸베에는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 혼자서 그를 찾아 갔지만 무라시게는 이미 오다 쪽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칸베에 역시 죽임을 당했어야 했지만 무라시게와의 친구 사이였던 덕에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죠
토굴의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보니 그는 온갖 피부병에 시달렸고 매독에도 걸려버리면서 머리에 흉칙한 흉터가 생겨버렸으며 심지어 오른쪽 다리의 무릎부분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먹을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바퀴벌레를 잡아 먹으면서 버티고있었죠
이때의 끔찍한 감옥생활로 인해 칸베에는 훗날 항상 두건을 쓰고 다녔고 오른쪽 다리는 회복이 되지 않아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이후부터 전투를 지휘할때도 말을 타지 못하고 가마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쨌든 1년후 아리오카성이 함락되고 코데라 마사모토와 무라시게도 토벌당했는데 이때 칸베에의 능력을 높게산 히데요시는 그에게 모반자의 성씨를 쓰는건 좋지 않다라고 말해 코데라 성을 버리고 다시 구로다 성을 쓰기 시작했죠
그리고 칸베에는 노부나가에게 1만석의 영지를 하사 받았으며 히메지성은 하리마 지역을 통치하기엔 최고의 성이라며 자신의 거성을 히데요시에게 바치면서 자신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살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히데요시의 밑으로 들어가 그의 참모 중 한 사람이 되었죠
그리고 1581년, 히데요시가 이나바 돗토리성을 공격할때 정공법으로 공략할시 병력의 손실이 엄청날것이라 예상하고 전투를 치르기 전, 성안에 있던 곡물을 굉장히 비싼 가격으로 모조리 사들인뒤 성을 완전 봉쇄 한 채 말려죽이기 전술을 사용해 성안은 먹을 식량이 없어 사람들이 굶어죽어갔으며 그렇게 승리를 쟁취할수 있었는데 이 작전을 히데요시에게 알려준것이 칸베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그 유명한 빗추 다카마쓰 성 공격을 감행할때도 거대한 제방을 쌓아 성에 수공을 가했는데 이 기막힌 작전을 히데요시에게 알려준 사람도 칸베에 라고 하죠
그런데 이때 일본 전국을 들썩이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는데요
그것은 바로 혼노지의 변(1582년 6월)이 일어나 전국통일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 오다 노부나가가 죽임을 당하고 만것입니다
이때 발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 히데요시도 놀라서 냉정함을 잃고 어버버 대고 있을때 칸베에는 "지금이야말로 히데요시님이 천하를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옵니다
빨리 군사를 돌려 교토로 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쳐야 합니다" 라고 조언했던 것이죠
그러자 번뜩 정신을 차린 히데요시는 곧장 칸베에를 대치하고 있던 모리군에 보내 화의를 맺은 뒤 전 병력을 이끌고 황급히 교토로 향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를 격파하고 결국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된것이죠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일등공신은 단연 구로다 칸베에 였지만 히데요시는 과거 여러 전투에서 그가 말해준 조언들과 혼란 그 자체였던 '혼노지의 변' 사건 직후 혼자만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한채 적군이던 모리 가문과의 화친 교섭을 굉장히 훌륭하게 성공해내고 군사를 돌려 교토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칸베에를 오히려 두려워 하고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부젠 나카츠 12만석의 영지만 하사해 지방의 작은 소규모 다이묘로 임명해 쫓아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불만없이 조용히 지방으로 내려갔고 이후에도 별 불만없이 여러 전투에도 참가했으며 시마즈 가문을 굴복시키는 등의 역할도 해냈죠
히데요시가 그를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요
어느날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가 측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훗날 히데요시가 죽으면 누가 천하인이 될것인가 라는 주제로 대화하게 되었죠
이때 측근들은 오대로 중 한사람이 아니겠느냐 라고 대답했지만 오직 히데요시만 머리를 가로 저으며 "구로다 칸베에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칸베에 그 자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내게서 천하를 빼앗아버릴 것이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기껏해야 부젠의 12만석 다이묘에 불과한 칸베에가 훗날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천하인이 된다는 말에 측근들 모두 의아한 반응을 보였는데요
이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급사한 이후 자신이 여러 전투를 이어 나갈때 뭔가 문제가 생기면 칸베에에게 상담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고심끝에 내린 결론과 칸베에가 내린 결론은 같았다
아니 오히려 칸베에의 작전이 더욱 세밀하고 적의 의표를 찌른 작전이 많았지"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이어 말하길 "세상에 두려운자가 둘있는데 하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로다 칸베에 이다
이에야스는 그래도 온화한 사람이지만 칸베에는 뭐라 말할수 없이 속을 알수없는자이기 때문에 더 두렵다
그에게 100만 석을 주었다면 단숨에 천하를 빼앗아버렸을 것이야" 라고 했다고 하죠
어쨌든 부젠을 영지로 하사받고 그곳에 지내던 칸베에는 부젠의 토착 무사였던 기이 시게후사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를 토벌군 대장으로 삼아 출진 시켰는데 아들이 적의 함정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칸베에는 혼자 빵 터져 겁나 웃으며 "알아서 살아 돌아 오겠지" 라고 했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구라도 가문의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에는 그가 가문을 발전시킨 인물임에도 "미친것 처럼 웃어대는 일이 많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결국 기이씨 토벌을 성공했으며 다카야마 우콘과 친하게 지내던 칸베에는 기독교 세례까지 받게 됩니다
하지만 1587년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발표하자 다카야마 우콘은 이 명령에 반발하다 추방되었지만 칸베에는 열심히 히데요시의 명령을 수행했고 이에 선교사들과 기독교 신앙을 믿는 제후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하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치사한것 같지만 다르게 보면 살아남기 위해 대단한 처세술을 보여주는것 같습니다
히데요시가 그를 얼마나 두려워 하고 경계를 했는지 또다른 일화도 전해지고 있는데요
어느날 오사카에 지진이 일어나자 히데요시가 걱정되어 수많은 장수들이 급히 오사카로 달려왔죠
이때 당연히 칸베에도 오사카에 도착했는데 히데요시는 일일이 자신을 걱정해서 와준 장수들을 치하 했던 반면 유독 칸베에 에게만 "내가 죽지않아서 굉장히 실망했겠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후 칸베에는 히데요시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걸 직감했고 언제 꼬투리가 잡혀 죽임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1589년이 되자 고작 44살의 나이에 가문을 장남 나가마사에게 물려주고 은거생활을 하기 시작했죠
또한 이때쯤 이시다 미쓰나리와 가토 기요마사 등 젊은 인재들이 하나둘 두각을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에 자신은 몸을 사렸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히데요시의 최측근으로 일하며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가해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우지나오를 설득해 무혈 항복시키는 굉장한 공적을 세우기도 했죠
이때 호조 우지나오는 칸베에에게 일광일문자(日光一文字)라는 명도를 선물했는데 이것은 현재 국보가 되어 후쿠오카시 박물관에 소장중이라고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지휘 조언 및 감독인 군감으로 참전했지만 5봉행중 한명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다툼이 일어나 병을 핑계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출가 하여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했죠
1593년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자신과 친분이 있던 히데츠구에게 "이제 나리의 목숨이 위험해 졌으니 태합 전하(히데요시)의 눈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삼가십시오" 라는 조언을 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히데츠구는 할복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이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천하를 두고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간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칸베에는 이미 일본 전국에 난리가 날것을 예측하고 있었고 천하재패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죠
그는 곧바로 전재산을 털어 영지인 부젠국의 낭인과 농민들을 무장시키고 규슈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해버렸습니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많은 낭인과 농민들에게 돈을 지급할때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할거라 여기고 돈을 두번 받으려고 줄을서자 칸베에는 일일이 그들을 다 기억하면서 두번 받은줄 알고 있었지만 한번 씨익 웃은뒤 돈을 더 주었다고 하죠
이것만 보면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인것 같지만 다정다감한 모습도 보이는 인물 같습니다
칸베에가 급하게 전재산을 투입해 규슈를 정벌한 이유가 있는데요
그는 이에야스와 미츠나리가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틈을타 규슈를 정복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오랜 전쟁으로 양군이 지쳐있을때 갑자기 중앙으로 진출해 천하를 순식간에 손에 넣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너무 빨리 승리해버리는 바람에 그의 계획이 완벽하게 틀어져 버린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대세를 거스를수 없다고 생각한 칸베에는 그동안 보여준 대단한 지략에 못지 않은 처세술을 발휘해 애써 점령한 규슈지방을 미련없이 이에야스에게 헌납했다고 하죠
당시 그의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내가 이에야스의 양녀였기 때문에 나가마사는 동군측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해 대단한 무공을 세웠는데 그가 뛰어난 활약을 벌인것을 듣고는 "이 천하에 얼간이 같은놈" 이라며 투덜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는데요
세키가하라 전투 후 나가마사가 돌아와 "이에야스님이 제 손을 잡고 공을 치하하셨다" 라고 하자 칸베에는 "그때 너의 왼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라고 말했다고 하죠
이 말의 의미는 '왼손으로 이에야스를 베어버렸어야지' 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은거생활을 계속했는데 자신의 수명이 거의 다 되었다는걸 느낀 칸베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중신들을 욕하기 시작했다고 하죠
그러자 아들 나가마사가 도대체 왜그러냐고 한마디 하자 "중신들의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 너에게 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는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냥 좋은 동네 영감님 마냥 영지내의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1604년 4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는 굉장히 정세파악을 잘하는 인물로 오다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땐 오다의 편에 서고 이후 히데요시, 그리고 이에야스의 편에 섰기 때문에 처세술의 달인 이라고 할수 있을것 같네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삼남이자 에도막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칸베에를 두고 '이 시대의 장량과 같은 인물이다' 라고 평가했다고 하죠
지금까지 히데요시가 두려워했던 히데요시의 제갈량, 구로다 칸베에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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