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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한무제.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명군이자 잔인한 폭군이었던 황제

by 사탐과탐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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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암군의 모습과 명군, 성군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양면적인 황제 한무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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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전한의 전성기를 연 인물로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동서남북으로 크게 영토를 넓혔던 인물이었죠

그런데 그는 명군의 모습과 암군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평가가 굉장히 엇갈리는 그런 이상한 인물인데요

 

오늘은 한나라의 무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한무제의 이름은 유철로 기원전 156년 7월 경제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요

경제는 박황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6명의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14명의 아들을 낳았죠

그중 11번째 아들이었으며 당시엔 황태자도 버젓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유철이 다음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왕씨의 야심은 굉장히 컸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기위해 물밑작업을 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때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박황후가 폐위가 되고 다음 황후로 누구를 삼아야 하는지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황태자의 어머니였던 율희는 당연히 자신이 다음 황후가 될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경제의 친누나였던 관도공주는 계속해서 권력을 잡기위해 다음 황후로 가장 유력하고 황태자의 어머니 이던 율희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낼려고 했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에 왕씨는 관도공주의 딸 진아교와 자신의 아들 유철을 결혼 시켰고 관도공주와 왕씨의 모략으로 인해 결국 율희가 아닌 왕씨가 황후가 되었으며 얼마안가 유영은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그렇게 유철이 새로운 태자가 되었죠

 

시간이 흘러 경제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기원전 141년, 유철은 16세 나이에 한무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16세 밖에 안되는 어린나이때부터 명군의 자질을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대책들을 물었는데 당시 대표적인 유학자이던 동중서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유학을 통치이념이자 학문으로 삼았죠

 

하지만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황로학을 신봉하던 무제의 할머니 두태후가 철없는 손자의 행동을 바로잡겠다 나섰고 이에 유교를 국교화 하는데 시간을 늦출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황로학을 믿는 사람들의 소요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러한 반발로 인해 한무제는 유교를 반드시 국교화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시간이 흘러 두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무제는 곧바로 오경박사를 설치하고 유교식 학교인 명당과 태학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황로학을 따르던 대신들과 두태후의 일족의 숙청을 감행했으며 유학자로 조정을 새로 채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나라를 장악해 나갔습니다

 

중국의 넓은 대륙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유학을 받아들인 시작이 바로 한무제 때부터 였던 것이죠

또한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복형제들과 외척들, 그리고 권신들을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인재채용에는 조건과 자격등을 가리지 않고 실력과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채용을 해 조정 관료들의 자질을 전체적으로 향상시켰죠

 

하지만 크게보면 그는 신하들에게 굉장히 가혹한 군주 였는데요

무능한 신하들을 죽이면 유능한 신하들만 남을 거라고 생각한 무제는 신하들을 가차없이 처벌하곤 했죠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이릉인데 이릉은 적은수의 병력으로 몰려오는 대규모 흉노군에 맞서 맹렬히 싸우다 결국 붙잡히게 되었고 결국에는 흉노에 투항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릉은 계속해서 그곳을 탈출해 다시 한나라로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죠

 

그런데 이릉이 패배한 이유가 사실 무제의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요

하지만 무제는 이릉이 흉노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소식을 전하러 왔던 신하를 죽여버렸고 “이릉은 힘을 다써서 항복할수 밖에 없었으니 선처해야한다” 라고 주장한 사마천을 처벌해버렸죠

 

이때 무제는 사마천에게 처벌로 벌금 50만전, 궁형, 사형 중에서 선택할수 있도록 배려 아닌 배려를 해줬는데 사마천은 사기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결국 궁형을 택했고 그렇게 사마천은 거세되어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후 이릉의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렸죠

그러자 이릉은 큰 충격을 받고 원래 탈출 하려했던 계획에서 아예 흉노로 전향해버렸으며 심지어 흉노의 장군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사마천이나 이릉의 경우를 보면 무제가 신하들에게 가혹했단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죠

또한 그는 전국을 13개 주로 나누고 주마다 자사를 두었으며 아들들을 제후왕으로 봉해 여러 지역을 통치하게 하면서 중앙집권화를 이루어낼수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한무제가 무제(武帝)라 불리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요

바로 정복전쟁을 굉장히 활발하게 했으며 동서남북 네 방향 모두 뻗어나가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한무제는 북쪽으로는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히던 흉노를 개박살 내버렸는데 위청을 대장군으로 삼아 곽거병, 이광 등과 함께 맹활약을 펼친 결과 흉노를 고비사막 위쪽까지 쫓아내버렸고 오르도스 지방(현재 내몽골자치구 지역)을 회복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장건이라는 인물을 서역으로 파견해 우여곡절이 있긴했지만 실크로드를 발견했고 이로써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할수 있었으며 남월국을 멸망시켜 쓰촨성에서 윈난, 구이저우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빼앗았죠

뿐만아니라 남쪽으로는 민월과 동월을 점령했으며 동쪽으로는 고조선에 육군과 수군으로 공격을 감행해 전투에서는 모두 패하고 말았지만 고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한나라군에 투항하는 사람이 발생했고 기원전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넓은 영토를 차지 했던 한무제 였죠

그런데 문과 무 양쪽에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던 한무제 였지만 한나라 자체에서는 골때리는 문제가 많았는데요

그것은 바로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고 전쟁을 지속하는데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당하기가 너무나도 벅찼던 것이죠

 

그렇게 재정이 나날이 궁핍해지자 나라에서 독점으로 직접 소금과 철, 황, 술 등을 팔기도 했고 북방지역에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궁핍한 재정은 계속해서 악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무제가 해댔던 대규모 토목공사들 때문이었죠

 

그는 18살때 이미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규모가 진시황제의 여산릉에 버금갔다고 합니다

또한 말년에는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새로 지었으며 또 별궁도 여기저기에 많이 지었죠

거기다가 엄청난 돈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의식도 거행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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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수도없이 벌인데다가 대규모 토목공사들이 겹치면서 재정은 엄청나게 낭비 되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고통받는건 백성들 뿐이었죠

훗날 하후승이란 인물은 당시 백성들의 처참한 상황을 이렇게 말했는데 "수많은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중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굶주림을 면치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 먹었다" 라고 묘사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한무제가 이룬 업적도 대단했지만 그가 행한 악행도 만만치 않게 대단했던 것이죠

거기에 더해 그가 자신의 어머니의 음모와 모략으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인지 황족과 신하들에 대한 의심이 끊이질 않았고 수많음 음모아 역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회남왕과 형산왕 그리고 강도왕의 모반 음모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때 2만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처형되기도 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게다가 도적의 무고를 믿고 자신의 딸인 제읍공주와 양석공주를 처형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무제는 나이가 들어서 어린 아들 유불릉을 얻게 되었고 이때부터 태자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생겨버렸죠

그런데 평소 태자와 사이가 좋지 않던 강충이란 인물이 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며 무제에게 거짓 고변을 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무제는 요양을 위해 장안을 떠나 함양 감천궁에 있었는데요

자신을 무고한데 격분한 태자는 강충을 죽여버리고 말았죠

무제는 '아마 태자와 강충 사이가 좋지 않아서 벌어진 일' 일것이라며 장안으로 신하를 보내 상황을 파악하고, 태자를 다독이며 해결을 하려했지만 그 신하는 태자에게 죽임당할것이 두려워 장안성에 들어가지도 않은채 다시 무제에게 돌아와 태자가 역모를 일으킨게 사실이라는 거짓 보고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엄청나게 화가난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켰고 그를 체포하라 명하게 되죠

이에 체포되면 죽임을 당할것이라 확신한 태자는 진짜 모반을 일으킬수밖에 없었고 결국 관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여 태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태자의 아내와 후궁들, 아들들, 딸들, 그리고 태자의 장인과 장모까지, 태자의 가족이 모두 목숨을 잃었고 위황후를 폐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태자 위황후의 일족들까지 모두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렇게 결국 유불릉이 황태자가 되었지만 그가 훗날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다면 그의 어머니와 외척들이 조정에서 날뛸것을 생각한 한무제는 유불릉의 어머니인 구익부인을 역모로 몰아 처형시키기까지 했죠

 

이후 그는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내치에 집중해 세금을 감면해 주는등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사마천을 다시 불러들여, 궁형에 처한것에 대한 사과를 했다고 하죠

그리고 무제는 자신의 수명이 다했단걸 느꼈는지 여러 신하들을 불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줄것을 부탁하고 기원전 87년 3월 29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무제는 수많은 업적을 남겼을 만큼 전한에서 손에 꼽을 명군이라 칭송받기도 하지만 엄청난 전쟁비용을 들이고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나라의 경제가 기울고 재정이 궁핍해졌으며 백성들의 삶도 무지막지하게 피폐해졌다는 사실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받기도 하는 인물이죠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한무제는 명군에 속하는 인물인가요

아니면 폭군이나 암군에 속하는 인물인가요?

한족 역사상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고 있지만 그만큼 어마무시한 폭군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 한무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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