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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오석산. 중국 대륙을 휩쓸었던 치명적이었던 악마의 약

by 사탐과탐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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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을 휩쓸었던 치명적이었던 악마의 약 오석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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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꼽으라면 후한이 멸망하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400년간 계속 됐던 위진 남북조시대를 들 수 있는데요 

이 시기는 유독 잔인하고 정신이 나간 인물들이 많기로도 유명한데 오늘은 대체 왜 이 시대에 그렇게 잔인하고 미친 X들이 많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은 진시황 시절부터 신선술이 유행했고 사람을 늙지 않게 만들어준다는 불로초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고 하죠 

그러다 한대부터는 불로초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접 몸에 좋은 약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무협지에서 볼 수 있는 대환단 같은 단약이라고 합니다 

 

다만 단약은 당시 사대부들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가격이 비쌌고 만드는 과정조차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그 대용품으로 생겨난 게 바로 한식산 또는 오석산이라 불렸던 마약인데요 

오석산은 마약인 동시에 명약으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약을 먹었다고 하죠 

오석산이 단약에 비해 가격이 싸기는 했지만 일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오석산 또한 다른 마약들처럼 부작용이 있었음에도 당시 사람들은 오석산을 먹고 나타나는 증상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방법 중 하나라 생각했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그 증상을 드러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오석산을 먹고 난 후에는 가만히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는 등 몸에서 땀을 내야 했는데 남북조시대에는 마약을 먹고 나서 하는 이런 행동들이 황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특히 이 약을 복용하지 못했던 백성들에게 과시하는 용도로 유행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게다가 황건적의 난에 활약했던 황보숭의 증손자이자 침구학의 대가인 황보밀이라는 사람이 이 약을 복용하면 오래된 중병에도 놀라운 속도로 효과를 보인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당대에 이 약은 이미 정력제이자 명약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다만 황보밀은 이 말을 함과 동시에 이 약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경고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의 경고를 무시한 채 그 약을 마구 먹어댔죠

 

참고로 동진 시대 대서예가로 유명한 왕희지도 도교에 미쳐 가족들과 함께 이 약물을 자주 즐겼는데 결국 왕희지의 아들들은 약물 중독으로 인해 비참하게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 약을 진나라의 사대부 치고 복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라고 하네요

 

이렇듯 오석산은 부작용이 매우 심한 약이었지만 마땅한 치료법은 없었고 그 증상을 완화시키는 방법정도만 있었다고 하는데 골 때리는 사실은 그 방법이 바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앞에서 말했던 명의 황보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의학서에도 오석산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하나 같이 일관되게 술을 마시라고 나와있다고 하죠

 

때문에 당시에 오석산이라는 마약은 술과 떼려면 뗄 수 없는 관계였으며 이로 인해 위진 남북조시대는 각종 미친 X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유명한 인물들 중 부패한 정치로부터 등을 돌리고 고고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진 죽림칠현이라는 선비들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 중에도 마약중독자들이 있었다고 하죠

 

완적이라는 사람은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상을 치르던 중 조문을 온 사마소라는 인물과 같이 술과 고기를 마구 먹어댔다고 하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이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완적을 꾸짖자 사마소가 오히려 그를 말리며 완적이 마약 중독증상이 심해 술을 마시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고 꾸짖는 사람을 말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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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청렴한 선비이자 효심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완적은 마약 때문에 모친상을 당하고도 술과 고기를 잔뜩 먹은 뒤 초췌한 얼굴로 지팡이를 짚은채 자리를 지켰다고 하네요

죽림칠현중 유영이라는 사람은 오석산의 부작용으로 집에서 노출증 환자처럼 알몸으로 스트립쇼를 하고 다녔으며 집에 방문한 손님들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따지자 나에게는 세상천지가 옷이고 내 집이 속옷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아내에게 술과 고기를 가져오게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남편이 하는 꼴을 보고 기가 막힌 아내가 울면서 유영을 말렸지만 그럼에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죽림칠현인 혜강은 마약의 부작용으로 한 달 중 보름은 세수를 안 해도 크게 답답하지 않기 때문에 머리를 감을 필요가 없다라는 헛소리를 하고 다녔다고 하죠

그러면서도 몸에 이가 워낙 많아서 항상 자신의 몸을 긁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석산과 술 때문에 개고생을 한 죽림칠현의 완적은 자신의 아들에게는 절대 마약과 술을 못 먹게 했으며 혜강은 아들에게 너는 절대 술과 마약을 하면 안 된다는 책까지 써서 말릴 정도였다고 하네요

사람들에게 오석산의 부작용에 대해 경고했던 황보밀조차 이 약에 중독돼서 서진의 황제가 된 사마염이 황보밀에게 자신의 밑에서 일해 달라는 청을 했을 때 오석산의 부작용을 이유로 그 청을 거절했다고 하죠

 

황보밀은 자신은 마약의 부작용으로 오른발을 절게 된 지가 19년째이며 한 겨울에도 옷을 벗은 채 얼음을 먹어야 하고 여름에는 답답하고 기침이 나며 학질과 열병을 앓고 온몸이 부어오른다 라며 자신의 증상을 호소하는 글을 썼고 결국 사마염도 그의 등용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보밀이 직접 쓴 한식산 체험담을 살펴보면 술을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고 목이 마르다 소화도 안되고 갑자기 추웠다가 더웠다가 하며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

 

또 우울해졌다가 분노했다가 혼자 놀라거나 무서워진다 부작용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칼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가족들이 말리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식산을 한번 먹기 시작하면 아무리 머리가 좋던 사람이라도 맛이 가서 내가 아무리 약을 끊으라고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이 약을 먹고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사람들은 이 약의 후유증에 고생을 하면서도 절대 약을 끊지는 않는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나에게 찾아와서 치료를 해달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나를 비롯해서 어떤 의원들도 결코 전설의 명의라 불리는 화타와 장중경이 아니다

그 어떤 의원도 화타만큼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장중경만큼 이 약을 세밀하게 다루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앞다퉈서 이 약을 먹고 스스로 심한 고통을 자초하여 젊은 나이에 죽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라는 기록을 남겼죠

 

뿐만 아니라 오석산은 중독 증세로 인해 사람들이 입는 옷의 트렌드까지 바꾸게 만들면서 더러운 문화를 유행시키기 시작했다고 하죠

이 약에 중독되면 몸에 열이 나고 온몸이 부어오르다가 결국 부어 오른 상처가 곪아 터져 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예 옷을 벗고 다니거나 품이 넉넉한 옷을 입거나 그게 아니면 피부가 쉽게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부드럽지 않은 새 옷이나 세탁한 옷을 피하게 됐고 결국 헌 옷만 입게 되느라 옷에 이가 들끓게 되면서 남 앞에서 이를 잡으며 이야기하는 문화가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위진은 이런 술과 마약에 찌들은 황실과 사대부들로 인해 위로부터 썩어 들어갔기 때문에 결코 오래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죠

그것은 위진뿐만 아니라 남북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시기에 수백 년 동안 싸움이 끊이지 않고 각종 미친 X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났던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마약과 술 또한 크게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보는 의견도 많죠

 

놀랍게도 오석산으로 인한 비극은 훗날 북송 시대에까지 이어지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라 그 유명한 문인 소동파가 이 약을 극찬하는 바람에 이 마약의 수명이 더 연장되고 말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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