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역사 탐구

함풍제.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전혀 몰랐던 최악의 암군

by 사탐과탐 2023. 4. 17.
반응형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전혀 대처하지 못한 최악의 암군 함풍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청나라를 세웠던 인물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그리고 섭정왕 도르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오늘은 청나라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했을때 청나라를 다스렸던 황제 함풍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가 황제가 된 이후 온갖 종류의 재앙이란 재앙은 다 일어나 버렸기 때문에 이후 청나라는 점점 망해가기 시작했고 함풍제 이후의 황제들은 죄다 허수아비 황제들이었던 이유로 그는 실질적으로 황제로써 황제의 권력을 행사한 마지막 황제라고 볼수도 있죠

 

함풍제는 도광제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혁저로, 형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도광제의 실질적 장남이 함풍제였었죠

1831년 7월, 도광제와 전귀비 사이에서 태어난 혁저는 10살이 되었을때 어머니 효전황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정귀비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혁저의 친모 효전황후의 죽음에는 독특한 야사가 전해지는데요

혁저가 황자시절 동생 혁흔이 굉장히 명석하고 총명함을 드러내자 아들의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한 효전황후가 혁흔이 먹을 생선요리에 독을 탔다고 하죠

 

그런데 그 생선요리를 고양이가 훔쳐먹었는데 고양이가 거품을 물고 죽어버리자 이후 모든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효전황후는 아들을 지키기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야사 입니다

어쨌든 혁저는 동생 혁흔의 친모 정귀비의 손에 자라게 되었는데 그는 정귀비를 친어머니 대하듯 효도를 다했으며 그녀의 아들인 혁흔을 친동생처럼 여겼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당시 청나라는 적자상속 보다는 능력으로 다음 승계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혁저와 혁흔은 다음 황제 지위를 두고 경쟁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광제는 효전황후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도 했고 적장자였기 때문에 혁저를 많이 총애했던 반면 혁흔은 굉장이 총명하고 문무 모두 능했으며 훌륭한 재능도 많았기 때문에 그 역시 굉장히 총애했죠

 

혁흔이 뛰어난 모습을 보일때마다 혁저의 무능함은 더 부각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엔 혁저가 다음 황제가 되는데요

그가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혁저의 스승이던 두수전에 대한걸 기록한 '청사고 두수전전'에 기록되어 있죠

 

도광제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남지 않았다는걸 느끼고 누구를 후계자로 세워야 할지 테스트를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두수전은 혁저에게 "황제께서 국사에 대해 물으면 그것에 대해 답하지 말고 눈물만 흘리십시오. 그러다 왜 울기만 하냐고 물으면 국사보다 아바마마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라고 대답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죠

 

바로 혁흔에 비해 능력치가 뒤떨어지는 혁저이니 감정에 호소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광제는 두 아들 혁저와 혁흔을 불러 국사에 관해 물었죠

그러자 평소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고 박학다식하던 혁흔은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말했지만 혁저는 펑펑 울면서 "아바마마의 병세가 이렇게 악화 되신건 다 자식인 저의 잘못입니다!" 라고 하는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혁저의 이 연기는 죽을때가 다 된 도광제의 마음을 흔들었고 혁저를 일컬어 '천하의 효자'라고 칭찬하며 모든 대소신료들을 불러 자신의 후계자는 혁저라고 발표했죠

그렇게 그는 함풍제가 되었고 혁흔은 공친왕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때 혁흔이 황제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죠

 

그런데 그가 황제가 된 이후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한 궁녀가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 버린것이었죠

뛰어난 미모와 꾀꼬리 같은 노랫소리에 이끌린 함풍제는 그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게 되고 이후 그 궁녀는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까지 낳아버리면서 후궁이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후궁이 훗날 청나라를 멸망까지 이끈 중국 3대 악녀 중 한명인 서태후가 되죠

왠지 이 선택이 훗날 함풍제의 평가에 미친 영향이 대단할것 같습니다

뿐만아니라 함풍제는 더욱 심한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1850년 12월 그가 즉위하자마자 중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란인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고 만것입니다

 

태평천국 운동은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며 일으킨 난인데요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스스로를 천왕이라 칭하며 태평천국 이라는 나라를 건국 했던 것입니다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홍수전의 밑으로 모여들게 되어 세력이 급격히 커졌고 이들은 결국 영안, 우한 등을 점령한 뒤 1853년에는 중국 남부의 핵심지인 남경까지 점령하여 그곳을 천경(天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죠

 

그들의 무서운 기세에 함풍제는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북경을 사수하라 명했고 청나라군이 이들과의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하면서 이들의 전성기가 도래한듯 보였습니다

이 태평천국은 13년이나 지속되는데 (1864년 8월까지 이어짐) 함풍제가 통치 하던 내내 그를 괴롭혀온 것이죠

 

이로인해 중국 남부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으며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강남지역이 초토화 되면서 청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굉장히 피폐해 지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과거 백련교도의 난으로 인해 이미 재정 낭비가 극심했던 청나라는 또 다시 막대한 전쟁비용을 소모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청나라의 국력도 엄청나게 소진되어 더이상 서구 열강들을 상대할 힘이 없어져버리게 되었죠

 

이 와중에 함풍제를 또 괴롭힌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2차 아편전쟁이었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이 한참 진행중이던 1856년, 청나라가 영국 소유의 애로우호를 단속하던 중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을 모욕했다며 영국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죠

거기다가 프랑스도 프랑스 선교사가 중국에서 처형당한걸 빌미로 전쟁을 선포했으며 당시 초강대국인 2개국과 거의 망해가는 청나라가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서구 열강을 상대할 힘이 없었던 청나라는 얼마 싸우지도 않고 1858년 6월 배상금 지급, 개항항구의 확대, 북경에 외국 외교관 상주 허용, 기독교 공인, 장강 통행 및 외국인의 중국 내륙여행 자유 등을 골자로 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할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듬해 또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마찰이 생기며 다시 전쟁이 재개 되었고 이에 함풍제와 조정대신들은 식겁해서 열하라는 지역으로 대피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북경을 점령한 영프 연합군은 원명원, 이화원 등을 있는대로 약탈하며 유린했죠

심지어 원명원은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고 1860년 결국 청나라는 다시 베이징 조약까지 맺게 되는데 개항장과 배상금을 늘렸으며 결국 구룡반도와 연해주 등 영토를 빼앗기기까지 했죠

 

이에 함풍제는 크게 상심한 나머지 외국 공사들과의 만남을 거부한채 계속 열하에 있었으며 비참한 자신의 처지에서 도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연회을 열고 공연 감상에만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1861년 8월, 그는 30살의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된지 11년만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피난처인 열하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그가 죽고 난 이후 하나뿐인 아들이던 동치제가 5살의 어린나이로 제위에 오르는데 그의 친모인 서태후가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덕에 함풍제가 죽고나서 불과 50년후 청나라가 멸망해버립니다

이후 그는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전혀 몰랐던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 받았으며 그가 제위에 오른것 자체가 재앙이라는 어마무시한 평가를 받고 있죠

 

서구열강들의 침략과 먹고 살기 힘들었던 백성들이 일으킨 난은 그렇다치고 서태후를 발굴해 낸것이 그의 가장 큰 불찰이 아니었나 싶네요

지금까지 청나라의 암흑기를 이끌었던 함풍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