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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형제복지원. 86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벌여진 인간 청소 사건

by 사탐과탐 2021.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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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는 지저분한 나라를 청소하기 위해 거리의 노숙자나 부랑자들을 일제 단속하여 한곳에 수용했고 낡은 판자촌을 철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권유린 사건이 되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는데 그 중심에 있었던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 올림픽 위원회 총회에서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시를 52 대 27로 꺾고 88년 올림픽 최종 개최지로 결정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우리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며 전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죠.

그만큼 한국 전체는 흥분의 도가니였고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1987년 올림픽을 1년 앞두고 정부는 한 가지 고민에 휩싸입니다.

이제 곧 올림픽이 열릴 것이고 올림픽이 열리면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나 기자들이 많이 올 텐데 거리에 부랑자나 노숙자도 많고 나라가 너무 지저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도시 환경 미화를 위해서 거리에 부랑인들을 단속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국가에서 지령이 내려오니 단 열흘 만에 전국에서 공무원 19,000여 명이 일제히 단속을 벌리게 되었고 순식간에 1,800여 명의 부랑자나 노숙자들을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몇 번 그렇게 공무원들이 단속을 벌이다 매번 단속을 나올 수 없으니 이제는 민간단체나 복지시설에 보조금을 주면서 그들에게 단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되었죠.

 

그중 국내에서 최대 규모의 민간 부랑인 시설이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는 데려간 사람 수당 보조금이 지급이 되자 부랑인, 노숙인도 당연히 잡아왔지만 가족도 있고 집도 있으며 직장도 있는 멀쩡한 일반인들과 통금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사람은 모두 무차별적으로 납치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산 형제복지원

 

형제복지원의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납치된 사람들 중에는 해운대에 놀러 왔다가 납치된 서울대 학생도 있었고 일본인 2명이 납치되어 이 형제복지원에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이 납치 사건에는 부산 시청과 경찰도 적극 협조했었기 때문에 혹시나 형제복지원에서 탈출한 사람이 있더라도 공권력에 의해 다시 잡혀 형제복지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경찰이나 공무원들은 부랑자나 노숙자를 잡아오면 점수를 받았는데 이 점수는 바로 진급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납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도 했고 스스로 잡아서 형제복지원으로 보내기도 했었죠.

 

형제복지원 관련 사진

 

형제복지원에 대한 너무나도 비극적인 사연이 많은데요.

한 아버지는 사라진 아들을 찾으러 전국을 헤매다 결국 찾지 못했고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사실 아들은 납치당해 형제복지원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였죠.

 

철옹성을 방불케하는 형제복지원 건물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잡혀온 사람들이 기거하던 방에는 창살이 촘촘하게 쳐져 있었죠.

 

탈출도 불가능한 형제복지원에서는 매일매일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순종적으로 만들기 위해 매일 갖가지 이유를 붙여 심한 구타를 가했고 10세 이하 어린아이들부터 80세 이상 노인들까지 계속해서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수용자들의 숙소나 식당 등 형제복지원의 거의 모든 건물은 수용자들이 만들었다고 하죠.

그리고 젊거나 나이 어린 여성, 그리고 일부 남자아이들은 여장을 해서 성폭행을 했고 성노예로 만들었습니다.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언니들이 밤에 어딘가 불려갔다가 한참 뒤에 돌아오면 사탕 같은 걸 얻어왔다고 합니다.

그 언니가 나가고 언제쯤 온다는 걸 아는 아이들이 언니가 올 때를 기다렸다가 언니가 사탕을 얻어오면 그걸 다시 얻어먹었는데 알고 보니 성폭행을 당하고 사탕을 받아 온 거였죠.

 

당연히 제대로 된 식사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려도 치료받을 수 없었죠.

 

그러나 형제복지원의 원장은 잡혀온 사람들의 적금통장을 만들어 줬다는 둥 잘 곳과 먹을 것 그리고 돈을 벌게 해줬다는 둥 자신은 부랑자들을 보호해 주는 착한 사람이라고 외부에 선전을 많이 했고 외부 사람들도 "부산 시내에 노숙자나 부랑자들이 없어지고 깔끔해졌다", "집도 없고 밥도 못 먹는 사람들을 보호해준다" 라며 원장을 칭찬했었습니다.

 

하지만 수용자들은 죽기 전에는 그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적금통장이나 돈을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죠.

또한 원장은 전두환 씨가 대통령일 때 표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표창 받는 형제복지원 원장

그리고 원장은 수용자들에게 자신의 거짓 선행에 관한 영상을 자주 보여줬는데 수용자 중 영상을 보면서 졸거나 박수를 치지않는 사람이 있으면 나중에 단체로 집합을 당해 또 구타를 당했습니다.

 

게다가 나라에서 사람 수 당 보조금을 주다 보니 고된 일을 하다 죽거나 고문이나 구타를 당해 죽었어도 국가에서 확인 전화가 오면 그 사람이 살아있는 척 대역을 써서 보조금을 챙겼죠.

 

그런 식으로 형제복지원 원장은 계속해서 돈을 축적했습니다.

 

형제복지원에 12년간 수용된 인원은 약 38,437명이나 되었고 살해 또는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도 확인된 사망자만 513명이나 되었죠.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암매장을 하거나 의대에 해부용으로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죽었는지 정확히는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 검사가 형제복지원의 작업장 주변으로 꿩 사냥을 가게 되었는데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사람들을 두들겨 패며 강제로 일을 시키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고 이상함을 느낀 검사는 경찰을 잠복시켜 이 이상한 일들의 사진을 찍어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냈고 드디어 형제복지원의 참상과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 보도자료

형제복지원의 원장의 방을 압수수색했을 당시 원장실에 아주 큰 대형 금고가 있었는데 금고에서는 20억 원 상당의 현금(현재가치로 약 65억 원 정도)과 예금증서가 발견되었죠.

 

원장은 불법감금, 폭행, 횡령 등 6가지 죄목으로 기소됐지만 살인죄로는 기소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이후 2심과 3심을 7차례나 왔다 갔다 하며 기나긴 법정 공방을 거치게 되었고 결국 원장은 무죄 판결이 내려지게 되었죠.

 

형제복지원 원장이 함부로 납치 감금한 행위의 근거는 내무부 훈령 410호로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 처리) 훈령이란 공무원들이 지켜야 하는 업무 규칙일 뿐이고 법령이 아니지만 대법원에서는 내무부 훈령을 법령에 의한 행위라고 보고 형법 제20조 '법령에 따른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 를 법적 근거로 무죄 판결한 것이었죠.

 

원장이 행한 납치와 감금을 법령에 따른 정당행위로 판단한 것입니다.

심지어 살인, 시신 유기, 시신 암거래 등은 기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죠.

 

그리고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였던 만큼 이 일로 인해 시민단체들의 큰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빨리 이 사건을 덮으려 했고 검찰에 외압을 넣었죠.

검찰에서는 고작 징역 15년에 벌금 6억 8천만 원 정도를 구형하도록 했고 1987년 6월 23일 법원은 1심에서 원장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6억 8천만 원을 선고하는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이후 항소심을 거치며 형량이 줄어 원장은 횡령죄로만 2년 6개월의 징역을 받게 되었죠.

그러나 그것도 또 형량이 줄어 고작 2년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출소 후 형제복지원 부지를 팔아 큰돈을 벌었고 다른 사업으로 또한 크게 성공을 이뤄

1,000억 원대 재산을 가진 재벌로서 잘 살고 있다가 2016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사건 이후 풀려난 피해 생존자들은 제대로 된 피해보상은 커녕 재사회화 역시 엉망진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대표 한종선씨는 같이 갇혀있던 아버지와 누나는 이 형제복지원 사건의 후유증으로 아직 정신병원에 있다고 합니다.

 

그는 '살아남은 아이' 라는 책을 출간해서 잊혀졌던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시 세상에 알리며

2012년 1인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에 흩어진 피해 생존자들을 모아 증언을 남기고 증거를 수집하며 글과 그림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형제복지원에서 죽어나간 피해자들의 시신들을 집단 암매장한 곳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기 때문에 더 이상의 조사는 어렵다고 합니다.

 

이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처참한 인권유린 일들을 보면 일제강점기나 아주 옛날에 일어난 일인 것 같은 느낌이지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34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이곳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이 일 역시 현재진행형 사건이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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