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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홍타이지.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할수 있는 기틀을 다진 인물

by 사탐과탐 202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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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와 더불어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할수 있는 기틀을 다진 인물 홍타이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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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되어있던 여진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에게는 수많은 자식들이 있었는데요

그중 적장자였던 추옌은 여러 중책도 맡고 많은 군공도 쌓았는데 아버지의 부하들,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후계자로까지 지정되었었지만 모든 권력을 잃었고 이후 자신이 누르하치의 뒤를 잇기 위해 아버지를 저주한것이 발각되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죠

 

그 이후 둘째 아들 다이샨이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지만 아버지 누르하치의 부인이던 여자와 간통을 했다는 의심을 받아 결국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 홍타이지가 다음 후금의 한(汗)으로 등극하게 되었죠

 

오늘은 청나라를 세우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킨 인물 홍타이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592년 11월 28일에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스물두살의 나이에 팔기군 중 정백기를 관할하는 버일러가 되었고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었죠

 

심지어 사르후 전투에서 홍타이지는 혁혁한 공을 세워 누르하치는 그를 두고 "내 아들 홍타이지는 사람들이 의지하기를 마치 눈과 같은 존재다" 라고 찬양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누르하치 바로 다음인 '4대 버일러' 자리를 얻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 다른 3명의 버일러는 누르하치의 조카이던 아민과 죄를 지은 어머니를 죽인 일로 누르하치에게 찍힌 망굴타이, 그리고 마지막은 처음 말한 누르하치의 부인과 간통 의심을 받았던 다이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혈통도 좋기도했고 운도 따랐으며 공적도 많이 세웠던 홍타이지가 자연스럽게 후계자가 된것이었고 그렇게 그는 1626년 10월 20일, 34살의 젊은 나이에 한으로 즉위할수 있었던 것이죠

 

홍타이지는 다른 4대 버일러인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를 형으로써 대우하며 한(汗)인 자신보다 아래에 앉도록 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양옆에 나란히 앉게했다고 합니다

한편 누르하치가 아직 죽지 않고 후금을 다스리고 있던 시절 조선의 왕은 광해군이었는데요

광해군은 겉으로는 명나라에 협력하는척 하고 실제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후금과는 평화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말았고 이후 즉위한 인조는 명과는 친밀한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죠

또한 당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평안도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선은 모문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금 입장에서 조선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다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이 난이 진압되면서 후금으로 도망친 한윤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조선으로의 침공을 부추기기까지 했죠

또한 후금의 식량난과 경제적 위기까지 더해지면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도 구하고 명과의 연합을 사전에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627년 1월, 홍타이지는 사촌형이던 아민에게 3만의 병력을 주어 한윤을 길잡이로 삼고 사르후 전투 이후 포로가 된 강홍립과 박난영을 대동해 조선을 공격하게 했는데 가장 중요한 목표는 모문룡이었지만 만약 여력이 있다면 자신들이 명나라를 칠때 조선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적당히 압박을 가하려고 했죠

 

그렇게 후금군은 1월 14일엔 의주성, 15일엔 정주성을 함락시켰고 21일에는 안주성을 점령했으며 23일에는 평양성에까지 도착했습니다

조선군도 후금군에 맞서 열심히 싸웠지만 후퇴를 거듭하자 결국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 분조활동을 했죠

당시 후금군은 조선을 완전히 정복할 마음까지는 없거니와 속전속결로 끝내려한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을 띄자 조선과 교섭을 시도하게 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후금은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를 쓰지말 것 그리고 왕자를 인질로 보낼것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죠

그러자 '나라가 망해도 명과의 국교단절은 안 된다'라는 신하들의 뜻에 따라 조선은 명과 국교를 단절하지 않은 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고 후금군은 즉시 철수할것과 다시 압록강을 넘어오지 말 것을 조건으로 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조선은 종실인 원창군을 인조의 동생으로 속여 후금에 인질로 보내고 그렇게 후금군도 철수하면서 정묘호란이 끝을 맺게 되었죠

 

이때 후금은 조선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하면서 명나라나 다른곳과 전쟁을 치를때 신경쓰이던 조선의 위협을 어느정도 떨쳐낼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르하치와 다르게 명나라 한족에 대한 탄압을 하지 않고 그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는데 유학을 장려했으며 과거제도를 도입해 더 많은 인재들을 영입했죠

또한 명나라의 제도인 육부(六部:이·호·예·병·형·공)를 만들었고 법률 등 명나라식 중앙집권화를 실시해 팔기의 버일러들이 수행하던 국가 통치 시스템을 잠식해 나가면서 자신의 황권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유목민의 풍습이던 형사취수제와 순장, 순사를 엄금했고 만약 이를 어길시 엄벌에 처하도록했죠

농업과 무역을 장려해 경제 성장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켰을 때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명나라로 침공을 했는데요

원숭환이 만들어 놓은 방어선 때문에 금주성과 영원성을 왔다갔다 하면서 패배를 거듭해 결국 큰 피해만 보고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영원성과 금주성에서 홍타이지를 물리친 이 전투를 훗날 '영금대첩'이라고 불렀죠

이때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고 있는한 정면대결로 베이징을 공략하는것은 굉장히 힘들것이라 생각했고 만리장성을 우회해 동북쪽의 희봉구를 지나 베이징으로 치고 들어가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10만의 후금군은 어느날 갑자기 베이징 성앞에 들이닥쳤고 명나라 황제 숭정제와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이때 숭정제는 갑자기 10만이나 되는 후금군이 코앞에 나타난 이유는 원숭환이 길을 터줬기 때문이다 라고 의심하고 있었죠

이 소식을 들은 원숭환은 급히 병사들을 이끌고 베이징을 구원하러 달려와 후금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숭정제와 대신들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홍타이지는 포로로 잡았던 명나라 환관 양춘과 왕성덕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한 방에 넣어 놓은 뒤 옆방에서는 예전에 청군에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고홍중과 포승선에게 두명이 들리게끔 큰소리로 홍타이지와 원숭환이 내통을 하고 있다는 거짓 밀담을 나누도록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이 밀담을 들은 두 환관을 홍타이지는 풀어줬고 그들은 곧장 숭정제에게 달려가 모든 사실을 일러바친것 이었습니다

그러지않아도 원숭환을 의심하고 있던 숭정제는 바로 원숭환을 불러들였고 그렇게 홍타이지를 막을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던 원숭환이 반역혐의로 붙잡히게 되었죠

이미 베이징 성 밖에서는 수개월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원숭환의 구명운동도 벌어졌지만 숭정제는 결국 원숭환을 능지처참이라는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홍타이지는 반간계를 이용해 마침내 최강의 적수인 원숭환을 제거 할수 있었던 것이죠

1635년 9월엔 도르곤, 요토, 사하랸, 호오거 등에게 병사를 줘 내몽골을 평정하고 원나라 잔여세력이던 차하르 몽골까지 정복하여 몽골제국 칸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받으면서 명목상 칭기스칸의 후예인 몽골의 대칸에 오르게 됩니다

 

또한 홍타이지는 주션(여진)이라는 이름을 없애고 만주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선포했으며 1636년 4월에는 국호를 대금에서 대청으로 고쳤고 자신은 만주족의 한이자 한족의 황제이자 몽골족의 대칸이 되었죠

그리고 홍타이지는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했는데 청나라의 문무백관들과 각국의 사신들 등 거기있던 모든 사람들이 홍타이지에게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할 때 유일하게 조선 사신으로 간 나덕헌과 이확만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릴수 없고 명나라 황제 외에 다른 황제를 섬길수 없다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냥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들을 죽지 않을 정도로 구타한 후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내용의 국서를 사신들에게 준 뒤 조선으로 돌려보냈죠

하지만 이 국서를 인조에게 전달하기 두려웠던 사신들은 국서를 그냥 버려버렸습니다

그러자 결국 그해 11월 홍타이지는 12만 8천여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해 병자호란이 일어났죠

 

청군은 전쟁이 일어나고 5일만에 한양을 점령해버렸고 인조와 대신들은 남한산성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나서 홍타이지는 인조의 동생과 대신 중 한명을 인질로 요구했지만 여전히 분위기 파악이 안되던 인조와 조정대신들은 정묘호란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가짜 동생과 가짜 대신을 보냈죠

 

하지만 곧 들통나고 말았고 이에 분노한 홍타이지는 왕이 직접 나오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인조는 직접 남한산성 문을 열고나와 홍타이지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의 '삼배구고두례'를 해 신하의 예를 보일수 밖에 없었죠

홍타이지는 오래전부터 명나라를 멸망시키는것은 큰 나무를 베는 것과 같아서 먼저 양쪽을 도끼로 패고나면 큰 나무는 스스로 넘어갈것이라 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지금 나무의 양쪽은 몽골과 조선이었으니 명나라에 대한 공격만 남은셈이었죠

그리고 이듬해인 1638년에는 드디어 명나라 내부 깊숙이 쳐들어가 산동성 제남을 공략했고 1641년에는 명나라와의 결전인 송산전투(송금전투)에서 홍승주의 14만 대군을 전멸 시켜버렸으며 이후로도 요서 지역의 요새와 거점들은 청군에 의해 우후죽순으로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여러 관료들은 홍타이지에게 북경을 직접 공격할것을 주장했지만 홍타이지는 무리해서 산해관이나 북경을 공략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명나라와 화의를 맺고, 내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 했죠

그러던 1643년 9월, 중원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홍타이지는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는데요

 

사실 홍타이지는 송산전투에서 군을 지휘할 때 코피를 심하게 흘렸는데 이때부터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그렇게 급작스레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만것이죠

이후 홍타이지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풀린이 5살의 어린나이에 황제로 즉위했고 그러다보니 초기 7년 동안은 숙부인 예친왕 도르곤이 섭정왕이 되어 청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누르하치, 홍타이지가 청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켰지만 그들의 재위 기간 동안 청나라는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북방 민족 국가에 불과했죠

 

그랬던 청나라를 중원의 제국으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이 섭정왕 도르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끼치고 이후로도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을 수탈한 침략자 홍타이지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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