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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도르곤. 만리장성을 넘어 마침내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지만 오히려 부관참시 당해버린 인물

by 사탐과탐 202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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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홍타이지가 이루지 못했던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청나라의 영웅이었지만 오히려 훗날 부관참시 당해버린 인물 도르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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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되어 있던 여진족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와 몽골과 조선을 복속시킨 뒤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직전까지 갔던 청나라를 세운 홍타이지 둘 다 뛰어난 인물이긴 했지만 넓은 중국땅을 완전히 굴복시키진 못하고 있었습니다

 

홍타이지 뒤를 이은 황제는 바로 그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풀린으로 5살의 어린나이에 황제에 즉위하다보니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숙부 예친왕 도르곤이 섭정왕이 되어 청나라를 다스렸죠

이 도르곤은 마침내 명나라의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청나라를 중원의 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젊은나이에 요절하고 말았고 죽은 후에도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어야 했는데요

오늘은 이 도르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1612년 11월 17일,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죠

그의 어머니는 누르하치의 세 번째 정실 울라나라씨였습니다

어린나이에 시집을 와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녀와 낳은 자식인 도르곤과 다른 형제들 역시 누르하치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하죠

그런데 그가 15살밖에 되지 않았던 1626년, 아버지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영원성 공격을 실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고 이복형이던 홍타이지가 다음 한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홍타이지와 다른 버일러들은 도르곤의 어머니였던 울라나라씨에게 누르하치의 뒤를 따를것을 강요해 결국 순장되고 말았고 그렇게 도르곤과 형 아지거, 동생 도도는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고 말았죠

그러나 홍타이지는 그들을 버리지는 않았고 모두 버일러에 봉해주었습니다

1628년이 되자 홍타이지는 군사를 일으켜 몽골의 차하르를 공격했는데 이때 17세가 된 도르곤도 출진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도르곤은 이때부터 굉장한 능력자 기질이 보였는지 첫 전쟁에 참가한것이었지만 선봉에 서서 차하르군을 괴멸시켜버렸고 수많은 포로를 생포하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습니다

심지어 24살때인 1635년에는 직접 군사를 지휘해 몽골로 출진해 내몽골을 평정했을 뿐만 아니라 차하르 몽골의 잔여세력들에게 까지 모두 항복을 받아 냈으며 몽골제국 칸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원나라 도장까지 받아냈죠

 

그 덕분에 홍타이지는 명목상이었지만 몽골의 대칸의 자리에 올랐고 몽골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도르곤의 공을 크게 치하해줬습니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이듬해인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황제에 올랐죠

또한 도르곤도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화석친왕에 책봉되었고 그때부터 예친왕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홍타이지의 즉위식에서 조선 사신들이 절을 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있자 분노한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는데요

 

이때 도르곤 역시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자신보다 세살 위의 조카인 호오거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함경도 지역을 공격했죠

그리고 도르곤은 강화도에 피신해있던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인평대군 그리고 세자빈 강씨, 그 외에 다른 왕족 비빈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치욕을 당했죠

 

그렇게 병자호란이 끝난 이듬해인 1638년에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봉명대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 북서쪽으로 우회해 명나라 공격을 명했는데 이때도 도르곤은 하북성과 산서성의 여러 곳을 공격해 성 36곳을 함락시켰으며 12만명이나 되는 포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1641년에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명을 받고 정친왕 지르갈랑과 함께 또다시 명나라를 침공했는데 산해관은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에 함락시키지는 못한 채 금주성을 포위했죠

 

그러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조대수는 명나라 조정에 원군을 요청했고 숭정제는 홍승주에게 금주성을 구원하라 명해 총 1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금주성을 구원하러 출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청군은 금주성 포위를 풀고 명의 원군을 요격하러 나섰죠

그렇게 벌어진 송산전투에서 도르곤은 부상을 입긴 했지만 홍승주가 이끄는 14만의 명군은 청군의 공격에 전멸되다시피 했고 이후 요서 지역의 요새와 거점들은 청군에 의해 우후죽순 함락되었으며 명나라는 산해관 이북의 땅을 모두 잃었고 그렇게 청나라는 요동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산해관은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명군이 힘을 거의 못쓰는 이때 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에도 홍타이지는 내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와 화의를 맺으려고 했죠

그런데 1643년 9월, 갑자기 홍타이지가 후계자도 정하지 않았고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은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엄청난 혼돈에 사로잡히고 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홍타이지가 죽고나서 닷새가 지나자 황족 중 가장 서열이 높았던 예친왕 다이샨은 다음 황위에 누구를 올릴 것인지 논의를 하기 위해 의정 왕 대신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때 도르곤과 도르곤의 조카이지만 3살이 많았던 홍타이지의 장남 숙친왕 호오거가 황위를 두고 맞붙게 되었죠

도르곤의 친왕인 아지거와 동생 도도는 도르곤의 서열이 호오거보다 높고, 여태껏 쌓은 전공 역시 호오거보다 더 많으니 도르곤이 황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호오거는 누르하치의 뒤를 홍타이지가 아들로서 황위를 이은 것처럼 다음 황위도 홍타이지의 아들인 자신이 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두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던 어느날 다이샨의 아들인 쇼토와 손자인 아달리가 도르곤을 제위에 앉히려 일을 벌이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의 배후로 도르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도르곤은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다 주장하며 쇼토와 아달리를 참형에 처했으며 자신은 황위에 전혀 욕심이 없다는 뜻을 보였죠

 

그와 동시에 도르곤은 호오거가 주장하는대로 홍타이지의 아들을 다음 황위에 앉히는 대신 아홉 번째 아들인 풀린을 제위에 올리고 자신과 지르갈랑이 좌우섭정왕이 되어 국사를 돌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의 이런 제안에 다이샨과 지르갈랑, 그리고 호오거도 동의를 하면서 마침내 풀린이 5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청나라 순치제로 즉위하게 되죠

그렇게 도르곤은 좌섭정왕으로서 병권을 쥐고 있었고 지르갈랑은 우섭정왕이 되어 국사를 책임지게 되었는데 실질적으로 청나라의 모든 권력은 도르곤이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세에 눈치를 보던 지르갈랑도 조정의 의결권까지 도르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한발 뒤에 물러서자 도르곤은 섭정왕을 넘어 사실상 청나라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죠

그렇게 그가 최고 권력자가 되고 1년 후인 1644년 4월, 호오거의 부하였던 하락회라는 사람이 어느 날 도르곤을 찾아와 호오거가 도르곤을 죽인 뒤 자신이 섭정왕이 될 것이라고 모함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과거 황위 계승을 두고 티격태격한 사이인 호오거였기에 곧바로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숙친왕이라는 작위까지 박탈해 버린 뒤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를 따르던 부하들까지 모조리 처형시켜버렸죠

이후 호오거는 다시 숙친왕 작위를 돌려받지만 다시 죄를 받아 또다시 작위를 박탈당한채 연금당하고 말았고 훗날 연금이 풀리지 않은 채 결국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호오거가 세상을 떠나자 도르곤은 호오거의 아내를 자신의 첩으로 취하기까지 했죠

 

또한 자신에게 대항하고 반항하던 이들을 차례대로 숙청해 나갔고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명나라의 명운도 점점 기울고 있었는데요 이자성이라는 사람이 농민반란을 일으켜 여러성들을 함락시켰고 마침내 명나라 수도인 북경까지 들이닥친 것이죠

 

1644년 4월 21일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은 북경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명나라의 모든 군사들은 산해관에서 청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북경을 구원하러 병력을 이끌고 올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2일 후인 4월 23일이 되자 외성 수비를 맡고 있던 태감 조화순이 이자성에게 투항했고 결국 북경이 함락되고 말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숭정제는 결국 자금성 뒤 후원인 매산의 회화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써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에 의해 건국된 이후 27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숭정제가 목을 맨 회화나무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는 나무였지만 훗날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베어지고 말았죠

 

이 소식을 들은 청나라 조정은 지금이 중원을 차지할 기회라고 주장하며 얼른 중원으로 병력을 출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산해관에는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버티고 있었기에 함락시키기는 힘들것이라 생각한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투항을 여러번 권유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죠

그런데 북경을 함락시킨 이자성의 군사가 자신의 아버지와 애첩에게 해를 끼쳤다는 소식을 들은 오삼계는 분노에 사로잡혀 산해관의 문을 열면서 마침내 청나라에 투항했습니다

 

그렇게 두들겨도 열리지 않던 산해관의 문이 드디어 열리면서 청나라는 아무런 전투도 치르지 않고 그곳을 지나 중원땅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죠

도르곤은 오삼계와 함께 북경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고 산해관 근처의 일편석이라는 곳에서 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이자성군은 괴멸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자성은 북경을 포기하고 도망쳤고 도르곤은 1644년 6월 5일 드디어 북경에 진입해 명나라 황궁이던 자금성을 장악했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숭정제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었고 곧바로 청나라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는 작업을 서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0월이 되자 도르곤은 청황제인 순치제와 황족들을 북경에서 맞이하면서 북경이 청나라의 수도가 되었죠

그리고 다음 달엔 자금성에서 순치제의 즉위식을 다시 한번 치렀고 이때 순치제는 도르곤의 공적이 고대 중국의 주공 단과 같다며 크게 치하해주면서 도르곤의 칭호를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올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성에 안찼는지 도르곤은 이듬해인 1645년에 자신에게 올리는 모든 문서에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 이라고 적게 하면서 스스로를 치켜세우기 시작했죠

한편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차지하긴 했지만 여전히 대륙 남쪽에는 명나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건재했는데요

이들을 두고만 볼수 없었던 도르곤은 여러 장수들을 남쪽으로 파견해 명나라의 잔당들의 씨를 말리게 하는 한편 친동생인 도도에게는 남경의 공략을 명했죠

 

그렇게 결국 1645년 4월엔 남경까지 함락되었는데 문제는 총사령관 도도가 청나라에 항거했던 사람들은 백성들까지 모두 처형시키라는 도륙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양주 대학살이 벌어지게 되었고 10일에 걸쳐 학살된 명나라 사람은 무려 80만 명에 달했다고 하죠

어느 정도 명나라 잔당들이 소탕된 이후 도르곤은 모든 한족 사람들에게 변발을 할 것을 명했는데 이를 거부할시 극형에 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족들은 효경의 구절을 들어 극렬히 반대하고 나섰죠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 : 신체발부, 수지부모, 부감훼상, 효지시야” (몸과 머리,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것이니 이를 다치거나 훼손하지 않게 하는 것이 모든 효의 시작이다)

그러자 도르곤은 명나라에서 항복해온 장수들을 시켜 이 명령을 반대하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해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보니 청나라에 대한 한족의 적개심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곧 '반청복명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일부 한족 지식층은 산속 깊숙이 들어가 은거생활을 하기까지 했죠

그렇게 안팎으로 거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 도르곤은 1647년에는 지르갈랑 마저 보정숙왕 자리에서 끌어내려버렸고 자신의 동생 도도를 황숙보정왕(皇叔輔政王)에 앉히는 등 청나라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했습니다

 

이후 자신을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고 칭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신하들은 도르곤을 직접 마주하여 말 한마디 꺼내기도 두려워했고 그가 어디 갔다가 돌아올 땐 문무백관이 정렬하여 마중했는데 이 모습은 마치 황제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하죠

사실 도르곤은 마음만 먹으면 반란을 일으켜 얼마든지 황제에 오를수 있었는데요

심지어 당시에도 도르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가 황위를 찬탈하지 않은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25년간 정실부인을 비롯해 수많은 첩을 거느렸음에도 자식이 단 한명도 없었는데 그가 죽기 몇 달 전에 조선인 첩에게 겨우 딸 하나를 얻었다고 하죠

그래서 동생인 도도의 셋째아들 도르보를 양자로 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훗날 학자들은 도르곤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점을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굳이 황제가 되려 하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로 꼽고 있긴하죠

 

자신이 황제가 되더라도 훗날 물려줄 아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도르곤은 조선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1650년에 도르곤은 효종의 딸과 혼인하기를 원했지만 과거 자신이 비참한 볼모생활을 했던 청나라로 딸을 보내기 싫었던 효종은 딸들이 전부 아직 어리다며 보내지 않았다고 하죠

사실 당시 효종의 딸 숙안공주는 15살, 숙명공주는 11살이었기 때문에 혼인을 해도 되었을 나이지만 도르곤에게 딸이 아직 2살이라며 뻥쳤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조카였던 소현세자의 딸들도 다들 어리거나 이미 혼인을 했다는 거짓말을 해 도르곤에게 보내지 않았다고 하죠

그렇게 자꾸 거절만 하다 보니 조선 조정은 점점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고 난처해지기 시작하던 차에 금림군 이개윤이 자신의 딸 이애숙을 도르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효종은 금림군의 딸을 양녀로 삼아 의순공주로 책봉해 청나라로 보내게 되었죠

 

그러자 당시 조선에서는 두 번에 걸친 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청나라에서 보내주는 돈을 노리고 딸을 팔아넘겼다며 금림군에게 엄청난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의순공주가 청나라에 도착했을 때 도르곤은 의순공주가 데려온 시녀 중 한 명도 첩으로 삼았고 이 시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었던 것이죠

 

하지만 당시 도르곤의 건강상태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는데요

과거 송산성과 금주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것이 사실상 황제로써 청나라 통치에 전념 하느라 건강을 회복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었으며 심지어는 자주 각혈을 하고 중풍까지 앓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1650년 12월 8일, 도르곤은 여러 친왕과 군왕, 버일러 등을 이끌고 카라호툰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사냥 도중 낙마를 하는 사고를 당했고 그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23일 뒤인 12월 31일에 카라호툰 성에서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이에 순치제는 도르곤의 죽음을 애도하며 황제의 격에 맞춰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또한 도르곤을 따르던 신하들은 그를 황제에 추숭해야한다고 주장했고 힘이 없던 순치제는 그를 황제로 추숭하기까지 했죠

하지만 도르곤이 사망하고 한달 반이 지난 어느 날 도르곤을 따르던 부하들이 그의 형인 영친왕 아지거를 새로운 섭정왕으로 모시고 자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려고 했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도르곤에 의해 실각되었던 지르갈랑은 도르곤에 반대하던 세력들을 규합해 이 사건에 관련된 도르곤 부하들을 모조리 처형시켜버렸고 그의 형 아지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또한 지르갈랑은 순치제에게 도르곤이 섭정왕일 때 전횡을 휘두르고 황제만 입을수 있었던 황포를 수시로 입었으며 순치제의 이복형 호오거를 모함해 죽음으로 몰았고 심지어 호오거의 아내를 첩으로 취했다는 등 도르곤의 부정에 대한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격노한 순치제는 도르곤의 묘호와 시호 등 모든 것을 박탈했고 족보에서도 그의 이름을 파내어버렸으며 그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신을 황야에다 버린 뒤 시체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형벌을 내렸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도르곤 시신의 머리를 잘라 각 지역에 돌려 효수하게 하는 등 과거 자신이 허수아비 황제 시절 때 당했던 수모를 갚아주는듯했습니다

 

이후로 제위에 오른 청나라 황제들은 섭정왕 이라는 직위를 암묵적으로 꺼리게 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청나라 사람들은 그를 역적의 대명사로 생각했다고 하죠

그 뒤에 도르곤은 1778년 건륭제 시절이 되어서야 다시 예충친왕으로 추증될 수 있었습니다

 

누르하치, 홍타이지는 청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켰다 하더라도 그때까지만 해도 변방의 민족 국가에 불과했지만 마침내 도르곤은 만리장성을 돌파해 비로소 청나라는 중국 넓은 대륙을 다스리게 되었죠

 

이것만 봐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결국 부관참시되는 수모를 겪었던 인물,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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