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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광서제. 평생을 서태후의 꼭두각시 황제로 살아온 불행한 황제

by 사탐과탐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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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의 꼭두각시 황제로 살면서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아온 청나라 광서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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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청나라의 황제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청나라 황실에서는 그의 오랜 지병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지만 독살설이 나돌기 시작했죠

하지만 모든것은 밝혀지지 않은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100년후인 2008년, 중국에서는 이 사람의 능을 공식적으로 발굴해 그의 유골과 머리카락 일부를 X선 투과법으로 조사를 했죠

그 결과 오랜 지병으로 사망했다 황실의 발표와는 다르게 이 황제가 사실 독살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머리카락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던 것이죠

 

당시 청나라가 확실히 기울어져가는 상황이긴했지만 독살당한 사람은 황제였던 것인데요

이 독살당한 황제는 바로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였죠

오늘은 망해가는 청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결국 서태후에 의해 유폐된 채, 누군가에게 독살당한 비운의 황제 광서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광서제는 1871년 8월 14일, 도광제의 서자이던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태어났죠

그런데 동치제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채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청 조정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에 당시 황실 최고 어른이던 동태후와 서태후는 동치제의 사촌이자 3살밖에 되지 않았던 혁현의 아들 재첨을 다음 황제로 올리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그는 청나라 역사상 최초의 방계혈통 출신 황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광서제는 청나라의 종법상 황위 계승 자격이 없었는데요

당시 청나라는 1개 항렬에 1명의 황제가 되는것이 원칙이었죠

이에 따르면 광서제는 전 황제였던 동치제와 같은 항렬이었기 때문에 원칙대로 한다면 광서제가 황제에 올라선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종법상 다음 황위는 공친왕의 둘째아들 재형이 이었어야 했는데 공친왕은 서태후와 정치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권력을 빼앗길것을 염려한 서태후가 그를 배제 해버리고 원칙까지 깨 가면서 억지로 혁현의 아들 재첨을 양자로 삼아 황위에 올려버린것이었습니다

 

광서제는 방계 황족으로 태어났으니 황제에 오르지 않았다면 평생을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며 살수 있었지만 서태후의 권력욕으로 인해 황제로 옹립되면서 그의 비극적이고 불행한 삶이 열리게 된것이죠

사실 혁현의 아내는 서태후의 여동생이기도 했고 1861년 서태후가 함풍제의 고명대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 때 혁현은 서태후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서태후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것이 광서제가 황제가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것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점은 서태후가 혁현에게 이 일에 대해 의논은 커녕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그냥 광서제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킨후 황제로 즉위시킨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모르는사이에 아들 재첨이 서태후의 양자가 되어 황제로 옹립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혁현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통곡하다 실신까지 했다고 하죠

그리고 이후 그는 아들 광서제를 지키기 위해 서태후가 내리는 명령은 무조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광서제가 3살의 어린나이로 황제로 즉위하자 적모였던 동태후가 섭정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1881년 동태후가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독살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죠

이에 순친왕 혁현은 광서제가 나이가 차 친정을 할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광서제도 동태후처럼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염려해 서태후에게 제발 섭정을 해달라고 부탁하며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동태후의 뒤를 이어 서태후가 섭정을 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광서제는 서태후가 정해준 여인과 결혼을 했어야 했는데요

결국 광서제는 서태후의 조카이던 융유황후 예허나라씨와 혼인을 하게 되었죠

그녀는 굉장히 성격도 더럽고 고집도 굉장히 쌔기도 했으며 심지어 서태후의 조카라서 자신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광서제는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해버렸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아내 융유황후를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죠

한편, 1890년대 동아시아의 정세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일본제국이 메이지유신 이후 굉장한 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조선에 마수를 뻗고 있었기에 청나라도 조선의 통제력을 확고이 하기 위해 조선에서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죠

 

그러던 1894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일본이 청나라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청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대대적인 근대화를 성공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개박살 내버렸고 그렇게 이홍장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청나라의 완패로 끝이나게 되었죠

그렇게 청나라는 일본에게 1년 예산의 2.5배나 되는 막대한 배상금과 타이완섬, 펑우섬, 요동 등을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무곳에도 기댈곳 없던 광서제에게도 위로가 되줄만한 한 여인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그녀는 바로 1888년 후궁으로 선발된 진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사실 진비도 서태후가 정해준 후비였는데 성격도 밝고 총명했으며 굉장히 톡톡 튀는 매력을 가진 여인이었기에 처음엔 서태후의 이쁨을 받기도 했죠

그런데 광서제도 그녀의 발랄한 성격에 매료 되었는지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기까지 하자 점점 광서제는 그녀에게 의지하고 위로받으며 힘든 궁중생활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게다가 진비는 광서제가 외국어를 배우거나 개혁을 추진할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이에 광서제도 그런 그녀를 더욱 총애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서태후의 조카인 융유황후는 질투에 사로잡혀 수시로 서태후에게 찾아가 진비에 대한 욕을 했으며 진비 또한 광서제에게 강한 황제가 되어야 한다며 부추기기까지 하자 서태후의 눈밖에 나버리고 만것입니다

 

이에 서태후는 진비를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융유황후와 함께 그녀를 엄청나게 괴롭히기 시작했죠

한편 당시 청나라는 과거부터 부분적으로나마 중국의 근대화를 외치며 양무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심혈을 들여 키워오던 북양 함대가 전멸해버렸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느꼈으며 회의론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서구 열강들과의 전쟁에 패한것은 그렇다쳐도 과거부터 신경도 안쓰고있던 일본 따위에게 완벽하게 패했다는건 청나라에게도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죠

그렇게 서구의 기술만 받아들이는것이 아닌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나라 전체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청나라는 심각하게 사회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광서제는 서태후의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과 함께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근대화 운동인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죠

잠깐 동안이었지만 서태후의 허락까지 받아 과거제를 개혁하고, 헌법 제정, 국회 개설, 서양식 학교제도의 도입, 신문, 잡지의 발행 농업,공업, 상업의 진흥, 육군과 해군의 근대화 등 100가지가 넘는 근대화 정책들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굉장히 급진적인 개혁은 당연히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올수 밖에 없었고 심지어 협력을 해주던 서태후도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죠

그런데 광서제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1898년 7월, 개혁에 방해가 되는 보수파 세력들을 서태후의 재가도 받지 않은채 숙청해버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토 히로부미를 초빙해 근대화의 고문으로 삼으려고 하는 등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이자 서태후를 중심으로 보수파 대신들의 반발과 결집을 가져오게 되죠

그렇게 서태후와 보수파 신하들은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는데 그들의 이런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챈 광서제는 당시 북양군을 틀어 쥐고있던 군벌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여 서태후와 보수파의 감시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광서제를 배신하고 곧장 서태후에게 달려가 광서제가 서태후와 보수파를 쳐내려 한다고 밀고해버렸죠

이에 극대노한 서태후는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고 광서제를 자금성에 유폐 시킨 뒤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 개혁파들을 체포하라 명했습니다

그렇게 담사동은 붙잡혀 그의 동료 5명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고 강유위와 양계초는 다른나라로 도망쳐버렸죠

 

변법자강운동은 고작 103일만에 대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청나라 조정내에서 이 난리가 나는사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했던 청나라가 자꾸 서구 열강들과 심지어 일본에게까지 참패를하자 청나라 백성들 사이에서 서구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고 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결국 이같은 반감이 쌓이고 쌓여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세우는 의화단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부청멸양 扶淸滅洋 : 청을 도와 서양을 멸하자) 그들에 의해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과 외교관, 상인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며 기독교를 믿는 청나라 사람들 45,000여명도 그들에게 죽임당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서구 열강들은 연합군을 결성해 청나라와 전쟁을 준비했는데 열강들과 강화를 해야한다는 광서제의 의견을 묵살한 서태후는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고 1900년 6월 21일 서구세력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죠

결국 일본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48,0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은 청나라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광서제는 다시 열강들과 협상을 시도 하려 했지만 서태후에 의해 강제로 서안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죠

서태후는 만약 광서제 혼자 남아 서구 열강들과 협상을 했을시 광서제가 실권을 잡을 것이 불안했기 때문에 광서제도 억지로 끌고 피난을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고 광서제가 자금성에 유폐될 때 진비 또한 유폐되었는데요

 

서안으로 피난을 떠날때 서태후는 진비를 죽일 생각으로 "너는 너무 예뻐서 함께 탈출하다가 적들에 의해 몹쓸짓을 당할수도 있다" 라고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것을 강요했죠

그러자 진비는 이를 거부했는데 이때 열받은 서태후가 "누가 저년을 죽여버려라"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에 환관 최옥귀가 진비를 강제로 우물에 밀어 넣어버렸고 그렇게 진비는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훗날 진비의 가족들이 우물에서 그녀의 시신을 건져 올릴때도 광서제는 유폐당한 상태라서 그곳으로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광서제의 시종 중 한명이 그곳에 찾아가 진비가 생전에 썼던 낡은 휘장 하나를 숨겨와 광서제에게 갖다줬는데 광서제는 아무말없이 이것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죠

광서제가 진비를 위해 할수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8국연합군에 처참하게 패배한 청군은 1901년 9월, 신축조약을 체결할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청나라는 이제 열강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에 놓였고 서구 열강들의 중국 침탈은 점점 더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서제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수 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서태후는 그의 유폐를 여전히 풀어 주지 않았고 그의 고통스러운 감금생활은 계속 되었는데요

또한 진비의 죽음에 크게 상심한 그는 점점 병에 걸려 앓아눕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08년 11월 14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광서제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서태후는 계속 섭정을 하며 권세를 누리기 위해 3살밖에 되지 않았던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재풍의 아들 부의(푸이)를 급하게 황제로 정했죠.

 

하지만 광서제가 죽고난 다음날인 11월 15일,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서태후도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서태후가 먼저 죽었으면 광서제가 더 오래 살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죠

아무튼 광서제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지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알려졌지만 사망 당시부터 그의 독살설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독살설은 당시에는 그냥 소문일뿐 사실이 밝혀지지는 않았는데 100년후인 20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확한 사실이 드러난것이죠

다만 독살의 배후로는 위안스카이와 서태후가 유력하다고 하는데 그는 워낙 몸이 약해서 그와 관련된 처방만 182가지에 달할 정도로 잔병이 잦았고 오랜 지병때문에 독살이 아니었어도 오래 살지는 못했을 거라고도 합니다

 

그는 당시의 평가를 보면 총명하고, 변법자강운동 등을 하는 등 무너져가던 청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지가 없진 않았던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독살 되었고 그렇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가 즉위할때까지만 해도 청나라가 다시 살아날 아주아주 약간의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가 죽을 무렵에는 사실상 청나라는 멸망 직전에 있었다고 하죠

 

그가 만약 성인이 되고나서 친정을 하면서 밝은 정세판단으로 변법자강운동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면 현재 중국은 어떻게 되어있을지 문득 궁금해지긴 하네요

황족으로써 평생 자유롭게 잘먹고 잘살수 있었지만 강제로 황제가 되었고 평생 서태후에게 휘둘려 불행한 삶을 살다가 결국 독살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청나라 황제 광서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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