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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누르하치. 넓은 중원대륙을 차지한 나라 중 가장 강한 나라인 청나라의 기반을 다진 인물

by 사탐과탐 202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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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중원대륙을 차지한 나라 중 가장 강한 나라인 청나라의 기반을 다진 인물 누르하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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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새로운 나라를 세울 정도의 인물들은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꿋꿋이 버티고 일어난

대단한 인물들이었던것 같은데요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도 참고 인내하면서 힘을 기른 뒤 마침내 드넓은 중국을 다스리고 있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본토를 통치했던 국가 중 가장 강력했다고도 할 수 있는 청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죠

 

그는 바로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 입니다

명나라 시절 여진족은 크게 건주, 해주, 야인 여진으로 구분되어 있었죠

그중 건주여진은 현재 길림성 지역에서 살았는데 명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문화수준도 높아져 있었으며 유목 생활을 버리고 농경에 종사하면서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서여진은 과거 금나라의 직계후손으로 현재의 흑룡강성쪽에 살고 있었고 야인여진은 송화강 북쪽에서 살고있었는데 명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수렵과 채집에 종사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여진 부족 중 가장 미개한 부족으로 취급 받기도 했죠

누르하치는 이중 건주여진 출신 이었습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여진족이었지만 명나라에 복속되어있었죠

 

당시 명나라는 과거에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같은 인물이 등장해 여진족을 통합한뒤, 명나라를 위협하는걸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여진족이 단결되지 못하도록 계속 분열시키고 서로 싸움을 붙이는 분열 정책을 썼습니다

또한 여진에 어느정도 힘을 보태주면서 과거 원나라를 세웠던 몽골족을 견제하려고도 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러한 명나라의 정책들로 인해 여진족은 오랜기간 동안 서로 분열되어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었지만 명나라에서 연달아 암군이 즉위하면서 여진도 조금씩 세력을 넓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요동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인물은 명나라의 장수인 이성량이라는 인물이었는데요

 

그는 '요동왕'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경제적, 정치적으로 여진족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죠

참고로 이 이성량의 아들이 바로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입니다

당시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와 아버지 탁시는 이성량의 부하가 되어 부족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죠

 

또한 이성량의 명령으로 같은 여진족을 토벌하기도 하면서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기도 했습니다

누르하치는 탁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어릴적부터 기골이 장대했다고 하죠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의미 인데요

누르하치가 멧돼지 가죽만큼 질기고, 그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라는 의미로 할아버지 기오창가가 지어준 이름이었죠

 

또한 누르하치는 어릴적부터 글을 배워 문맹도 아니었고 여진족으로써 필수였던 말타기와 무예도 열심히 익혔습니다

그가 어느정도 나이가 찼을때 아버지는 가축 몇 마리와 노비 몇명을 주면서 그를 분가 시켰죠

이때 누르하치는 약초와 산삼을 캐서 파는 심마니 노릇으로 생계를 이어나갔고 만주 뿐만아니라 명나라를 떠돌면서 중국어와 몽골어까지 익혔습니다

 

이후 이런 심마니 노릇에 싫증이난 그는 이성량의 부하로 입대하는데 여러 언어를 사용하고 글도 터득했으며 말도 잘타고 활도 잘쏘다보니 금방 이성량의 눈에 들어 빠른속도로 승진했으며 이후엔 이성량의 양아들이라는 소문도 퍼질만큼 그와 사이가 좋았죠

그러다 누르하치가 24세가 되던 1583년, 자신의 인생이 뒤바뀌는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당시 여진 부족중 추장 한명인 아타이 장긴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성량은 곧장 반란 진압에 나섰고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와 아버지 탁시도 이 전투에 투입된것이죠

그런데 아타이 장긴의 아내가 가오창가의 손녀였기에 기오창가와 탁시는 아타이 장긴에게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반란군이 점거한 성안으로 들어가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아타이 장긴은 그들을 포로로 붙잡아 버렸는데 동시에 이성량이 화공을 구사해 교창가는 불에타 죽었으며 탁시는 성으로 진입한 명나라 군사들이 반란군으로 오인해 그를 죽여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명나라 군사에 의해 개죽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보상으로 30통의 칙서와 30필의 말을 내주었고 누르하치를 좌위지휘사로 승진시켜주었죠

(칙서 : 명나라에서는 조선이나 몽골과 무역을 하려면 황제의 칙서가 필요했습니다.

30통의 칙령은 누르하치가 30번 외국과 교역할 수 있는 허가서였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문에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때 받은 것들은 훗날 누르하치가 군사를 일으킬때 군자금으로 사용되죠

또한 누르하치는 이때부터 명나라에 복수심을 불태우기 시작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명나라에 맞설힘이 없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고서 언젠가 힘을 키워 명나라에 복수 할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일족을 거느리고 무순 동쪽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는데 이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받은것으로 병력을 모아 모든 친족의 반발을 진압하고 이들에게 충성을 맹세받았죠

그 이후 누르하치는 자신을 견제하려 모인 여진의 여러 부족 연합군을 격파해 버렸고 자신의 세력을 더욱 넓혔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원수 니칸 와이란도 참수하면서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렇게 1587년에는 철진부, 이듬해에는 완안부까지 복속 시키면서 불과 100여명의 병력을 가졌을 뿐이었던 누르하치는 단 5년만에 1만 5천명의 병력을 가지게 되었고 1589년에는 건주여진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죠

누르하치의 엄청난 성장에 놀란 이성량은 그를 명나라에 순응하기 하기 위해서 용호장군이라는 높은관직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이미 급속도로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명나라에 복종하는척 하면서 이성량을 이용해 지원까지 받아가며 명나라 몰래 명나라에 대항할 힘을 비축해나가고 있었죠

 

당시 이성량은 만주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있으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에 마음대로 군비를 쓰고 있었기에 결국 1591년 병부상서 웅정필에 의해 탄핵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성량이 비록 만주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지만 몽골이나 여진족들을 통제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는데 그런 그를 파면시켜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그렇게 새로운 사람인 소백지가 이성량의 대타로 오게 되었는데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고 뇌물을 주면서 소백지를 이용하기 시작했는데요

소백지도 굳이 누르하치 세력과 싸우기를 꺼렸으며 그가 뇌물까지 주자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는 과정을 눈감아 준것이죠

그런데 1년후인 1592년 누르하치에게 세력을 넓힐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가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명나라가 만력 3대정에 휘말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1592년 몽골 지역에서 일어났던 보바이의 난과 1592년에 조선에서 발발한 임진왜란 그리고 1597년에 발생한 양응룡의 반란을 명나라 만력제 시절에 일어났었기 때문에 '만력 3대정'이라하죠

조선에 원군을 보내고 반란을 진압한다고 정신이 없어진 명나라 조정은 여진족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틈을 타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채 전력을 다해 여진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1599년에는 해서여진의 하다부족까지 복속시켰고 1606년에 누르하치는 수러 쿤둘언 한에 등극했죠

 

뒤이어 1607년에는 후이부족, 1613년에는 우라부족등을 병합하면서 야인여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여진족들을 통합하는데 성공했죠

이후 그는 1616년 허투알라에서 금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대금'을 국호로 해 나라를 세웠습니다 (과거에 세워진 금나라와 구별하기위해 후금이라 부른다)

또한 여진이라는 이름도 만주로 바꾸었고 만주문자도 만들었으며 팔기군 제도를 제정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팔기군 제도는 군사를 여덟 가지 색으로 구분했는데 모든 만주족은 8개의 기 중 하나에 소속되었으며 평상시에는 조세, 행정 등의 여러 업무를 하고 있다가 전쟁이 나면 군대로 편성되는 유목민 특유의 조직이었습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일곱가지의 한"을 하늘에 고하고 명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죠

 

(7대한

첫째 명나라는 이무 이유없이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였다.

둘째, 명나라는 해서여진을 우대하고 건주여진을 푸대접했다.

셋째, 명나라는 서로 합의한 국경선을 마음대로 바꾸고, 이를 넘어온 건주여진인을 죽였다.

넷째, 명나라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전쟁에서 해서여진을 도왔다.

다섯째, 명나라는 누르하치와 약혼한 예허부의 딸을 몽골의 하르하부에 주도록 권했다.

여섯째, 명나라는 건주위가 개간한 땅과 토지를 파괴했다.

일곱째, 명나라는 만주 사정을 잘 모르는 소백지를 파견하여 건주여진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 7대한(七大限)중 첫번째로 명나라 군사에 의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은 것을 가장 큰 원한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해 최대 강적이던 해서여진의 예허부족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르하치는 예허부족과 명나라와의 전면전은 불가피 했었죠

1618년 누르하치는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명나라의 변경지에 있던 무순이라는 지역을 급습하면서 그렇게 명나라에 대한 첫번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무순의 성주는 이영방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밑에 있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덕에 이영방은 별다른 저항없이 누르하치에게 투항했죠

그렇게 무순이 누르하치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여기서 한족 선비인 범문정이라는 인물을 얻게 되는데요

일설에 의하면 범문정의 집안은 역모에 휘말려 만주로 귀양을 온 처지였는데 이후 명나라를 증오하며 누르하치를 도와 출세를 하겠다고 결심한 인물이었죠

 

또한 범문정은 누르하치부터 강희제까지 네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여러 계책을 내놓았고 후금이 큰 제국이 되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습니다

심지어 중국에서 범문정은 제갈량, 강태공, 관중, 장량과 견줄 수 있는 책략가로 묘사 되기도 한다고 하죠

어쨌든 1619년 4월, 명나라는 누르하치 세력이 더 강대해지기 전에 토벌해버리기로 결심하고 임진왜란에도 출정한 적이 있던 양호를 총대장으로 삼아 명나라 전체에서 박박 긁어모은 10만 여명의 병력으로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후금의 병력은 고작 6만명 정도 였는데 심지어 주력이라 할수있는 기병은 1만명에 불과했죠

총사령관 양호는 군대를 4개로 나누어 적진으로 쳐들어 간 다음 허투알라 앞에서 합류해 허투알라를 포위 공격하려는 작전을 짜고 그렇게 자신은 심양에서 4개로 나눈 군사의 총지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작전이 되어버리는데 10만이나 되던 병사를 분산해버렸고 작전 지형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후금의 수도 앞에 모일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게다가 4개의 부대가 따로따로 집결지에 도착하게 되면 후금군에 의해 각개격파를 당하기도 딱 좋았기 때문에 집결지를 허투알라 앞으로 선택한 것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총지휘관이던 양호가 심양에 있다보니 현장에서 총지휘를 할 사람도 없거니와 양호가 임명해 주지도 않아서 각각의 부대 지휘체계도 개판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손발이 맞지도 않는 4개의 명나라군이 각자 알아서 진군하고 있는 틈을 타 누르하치는 강력한 기병을 이용한 기동력으로 4개의 부대를 각개격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4개의 부대는 따로 움직이다 차례대로 격파 당했고 이 전투에서 전사한 후금군은 약 2천명이었던데 반해 명나라군은 약 4만 7천여명의 전사자가 나왔으며 당시 전사한 장수들만 300명이 넘었다고 하죠

또한 당시 1만 7천여명의 병력을 파견한 조선군도 1만여명이나 전사했고 4천여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를 '사르후 전투'라 하는데 이 이후부터 명나라의 멸망은 가속화 되기 시작했죠

 

뒤이어 누르하치는 예허부족까지 정복했고 1621년에는 만주에 남아있던 명나라 최후의 거점인 심양까지 함락시키면서 비로소 요하 동쪽에서 명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요동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수도를 심양으로 옮긴 뒤 중국 본토를 차지할것을 마음먹고 명나라 공격을 이어나가려고 했죠

 

그런데 문제는 명나라의 장수 원숭환이 요서지역에 영원성을 쌓으면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고 이에 누르하치는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답답해 하던 누르하치에게 어느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는데요

바로 요서 지역을 방어하는 총지휘관으로 고제라는 인물이 임명된것이죠

고제는 원숭환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요서 방어선들을 모두 버려두고 원숭환만을 영원성에 남겨둔채 산해관까지 방어선을 후퇴시켰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기회는 이때뿐이다 생각해 1626년 2월에 1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명나라의 영원성을 침공했는데 후금군의 공격을 철저히 대비했던 명나라 장수 원숭환에 의해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죠

1618년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전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맛 본 패배이기도 하고 고작 영원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는것에 크게 한탄했습니다

 

거기다가 누르하치는 영원성에서의 패배에 충격이 컸던 탓인지 퇴각한 이후 마음의 병을 얻어 얼마 지나지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그런데 그의 죽음에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요

한가지는 충격을 먹고 마음의 병이 생겨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성 전투에서 홍이포를 맞아 부상 당했고 이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설이었습니다

 

하지만 홍이포 부상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굉장히 높고 청나라의 기록에도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죠

어쨌든 누르하치는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있게 시작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먹겠다는 대업은 결국 이루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업은 누르하치의 아들 가운데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이루어 내죠

 

오랬동안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명나라의 정책에 따라 분열되어 있던 여진족을 통합한 뒤 마침내 넓은 중국대륙을 차지할수 있는 기반을 닦았던 누르하치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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