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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5.16 군사정변. 하루아침에 뒤바뀐 대한민국의 운명

by 사탐과탐 2023.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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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뒤바뀐 대한민국의 운명 5.16군사정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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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19일에 일어난 혁명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1960년 8월 12일 국회 선거를 통해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8월 18일 장면이 국무총리로 당선되어 제 2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기에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한 운동이 각계 각층에서 벌어졌는데 이때 군 내부에서도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산을 해야한다는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죠

 

당시 군대 내부에서는 각종 문제가 많았는데요

그때 군대 상황을 보면 1950년대 까지만 해도 10만 정도의 규모였던 국군은 10년후인 60년쯤 되자 미국의 집중 원조를 받아 거의 60만 규모까지 급성장 했습니다 

그리고 군의 청년 간부들은 미국 유학을 통해 선진문물과 근대적 사고방식 등을 배워 왔으며 이로 인해 군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고 엘리트 집단이 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한국전쟁을 거쳤던 초창기 군 간부들은 초고속 승진을 할수 있었지만 이후 육사 8기를 비롯한 후배 장교들은 극심한 인사 적체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사 적체 : 특정 직급이나 계급에 인원이 몰리면서 진급대상자 수에 비해 자리가 부족하여 승진이나 진급이 이뤄지지 않는 현상)

 

5.16 당시 육군참모 총장이던 장도영 중장과 김종필 중령의 나이차이가 고작 3살차이 밖에 나지 않았을 정도로 진급에 극심한 정체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진급하지 못하던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있었고 또한 당시 군 상층부 인사들이 정권과 결탁해 선거 조작을 한다던지 온갖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는걸 본 젊은 장교들은 이승만 정권과 밀착된 중장급 이상 장성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 퇴진 요구 운동을 '정군운동'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정군운동은 1960년 5월 20일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부정선거에 관여가 되었다고 비판하며 책임지고 퇴임하라는 편지를 보낸 박정희 소장으로 부터 촉발되어 시작되었는데요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사람에게도 해야할말은 하는 박정희 소장의 모습을 본 젊은 장교들은 그가 대단하다고 느꼈고 정군운동의 리더로써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렇게 시작된 정군운동으로 인해 1960년 5월 20일 송요찬 참모총장이 스스로 물러났고 5월 31일에는백선엽 대장이 자진 사퇴를 발표하는 등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둘수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사실 박정희 소장의 조카사위가 육사 8기의 중심인물인 김종필이기도 했고 그외에 수많은 청년장교들이 박정희를 잘 따랐다고 하는데요

또한 당시 박정희는 굉장히 술을 잘먹었는데 육사 8기 생들과 '대한 음주당' 이라는 술모임을 만들정도 였으며 이로써 육사 8기 들과 친분을 쌓을수 있었던 것이죠

한편 419혁명 이후 수립된 장면 정권이 맞딱뜨린 잔혹한 현실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극심한 사회 혼란이었죠

12년간 이어져온 이승만 정권때 쌓였던 사회 모순이나 불만, 부정부패 등이 혁명 이후 봇물터지듯 터져나왔고 이 모든 사회 혼란을 잠재워야만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부정축재를 한 자들이나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처리, 아니면 이승만 독재정권 밑에서 억압되어있던 수많은 문제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 반공법이니 데모규제법이니 하는 악법을 제정하려고 시도 하는 등 대중들을 억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욱 큰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장면 정권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 이유도 있는데요

신파이던 장면과 구파의 윤보선이 서로 사사건건 대립하다보니 장면 정권은 수시로 개각을 해야하는 정치불안에 시달리기도 했죠

 

한편 장면 총리가 국방장관을 임명하기 전에 정군파 젊은 장교들은 총리실에 '국방부장관 임명에 있어서 고려사항'이라는 건의서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정군파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장면 총리는 현석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정군파 장교들은 이번엔 국방장관실에 '육군참모총장의 임명 기준에 관한 의견서'를 보내버렸죠

 

그들의 이런 행동은 군 장교들이 정치에도 개입하고 심지어 군 인사에도 개입하려고 하는 선넘은 행동이었습니다

어쨌든 이후 육군참모총장에는 최경록 중장을 그리고 합참의장에는 최영희가 임명되었는데 최경록은 정군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혔고 최영희는 미 국방부의 파머 대장과 함께 "젊은 장교들의 정군운동에 결단코 반대한다" 라는 내용을 담은 공동 성명을 발표했죠

그러자 최경록은 파머대장에게 내정간섭이라며 그에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미국을 성명전에 끌어들인 최영희를 비난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정군파였던 육사 7,8,9기 장교들 16명은 합참의장 최영희의 집무실에 들이닥쳤죠

그리고 합참의장직을 사퇴하라고 종용했는데 이에 최영희는 하극상이라 소리치며 헌병을 출동시켜 모조리 징계위원회와 군사재판에 회부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16인 하극상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죠

이때 김종필과 석정선 등이 강제 전역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6인 하극상 사건으로 말미암아 정군파 장교들의 불만은 더욱 강하게 터져나오기 시작하는데요

 

이후 1960년 9월, 그들은 서울 퇴계로의 충무장이라는 곳에서 다시 만나 예전처럼 건의문을 보낸다거나 말로 호소하는것으로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수 없다고 판단했고 현재 나라가 이렇게 혼란한 이유는 장면 정권의 무능이라고 여겨 이 사회 혼란을 바로 잡아야 한다며 혁명적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하기로 마음먹죠

훗날 이 일을 '충무장 결의'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두달후인 11월 6일, 그들은 신당동에 있던 박정희 소장의 집으로 찾아갔죠

그렇게 박정희를 정변의 지도자로 세웠으며 이후부터 장성급은 박정희가, 영관급은 8기 장교들이 나서서 은밀히 동지를 포섭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변을 일으키려고 동지들을 모으고 있다는 정보가 장면 총리 귀에도 들어가게 되는데요

 

하지만 김형욱은 국회의원들이 육군 장교들과 짜고 서울 인근 부대들을 장악하려 한다느니,

장성들을 중심으로 일선 부대가 거사에 나설거라느니, 박정희가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과 결탁해 거사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라느니 하는 온갖 거짓 정보를 함께 흘려보냈고

그렇게 자신들이 준비중인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다른 거짓정보들과 뒤섞어버려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 라고 생각되게끔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소문만으로 장군들을 체포할수 없는 노릇이었으며 심지어 만약 소문만으로 장군들을 잡아와 조사한다면 최경록 다음 육참총장이된 장도영은 자신 스스로를 체포해야 하는일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다행히 계획이 발각되지 않은 쿠데타 세력은 쿠데타 세력은 5월 16일로 시간을 다시 정했고 그렇게 16일 00시를 기점으로 소장 박정희와 장교 250여명, 그리고 부사관과 병 3500여명은 한강을 건너와 주요 기관을 점령하기 시작했죠

 

그들은 새벽 3시쯤 영등포의 6군관 사령부를 비롯해 육군본부와 국방부, 서울시청, KBS 방송국, 중앙전화국까지 서울의 핵심지역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대구, 광주, 부산 등에 주둔해 있던 군대를 동원해 그곳의 핵심시설 역시 장악해버렸죠

그리고 곧장 장면 총리가 머물고 있던 반도호텔을 급습했지만 이미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장면은 호텔을 빠져나갔습니다

 

호텔을 빠져나온 장면은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고자 했지만 신원 불상자라는 이유로 들어갈수 없었고 하는수없이 미 대사관의 숙소로 가고자 했지만 같은 이유로 실패했죠

이후 그는 어쩔수 없이 자신이 잘 알던 혜화동의 가르멜 수녀원으로 몸을 숨긴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새벽 5시경 KBS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명의로 군사혁명위원회 설치를 발표함과 동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6일 오전 9시를 기하여 효력을 갖는 포고령과 '혁명공약 6개 항'을 발표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아직까지 쿠데타를 막을수 있는 기회는 있었는데요

시간이 흘러 오전 11시 30분이 되자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이 사라진 장면 대신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간 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쿠데타군 진압 명령을 내리라고 압박했던 것이죠

그러나 윤보선은 "우리끼리 유혈충돌이 일어나는것을 용납할수 없다" 라고 말하며 쿠데타 진압을 반대하고 나선것이었습니다

 

당시 진압 작전 명령을 내릴수 있는 사람이 세명 있었는데 한명은 장면 총리, 한명은 윤보선 대통령, 그리고 마지막 한명은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주한미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을 움직일수 있는 사람인 미국 대통령 케네디였죠

하지만 장면은 사라졌고, 윤보선은 반대하고 마지막 케네디 대통령도 당시 미국이 다른나라의 문제에 개입하다 큰 코를 다친 직후라 일단 기다리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그루더 사령관은 직접 미군을 동원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전부터 수녀원에 몸을 숨긴 장면이 계속 미국측에 연락해 도와달라고 했었는데 매그루더도 쿠데타 진압은 하고 싶어 했지만 내정에 간섭할수 없다며 미군을 동원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내놓을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미국은 장면 총리와 그 내각을 무능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비롯한 그 지도자들의 혁명공약을 보니 굉장히 반공적이고 친미적이었기 때문에 장면보다는 박정희가 나은것 같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뿐만아니라 당시 윤보선과 장면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있었고 윤보선이 생각하기론 쿠데타 세력의 총구는 장면 총리를 겨냥하고 있을거라 여겼기 때문에 쿠데타의 성공은 곧 자신의 이득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쿠데타 진압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국이든 미국이든 아무도 쿠데타를 막지도 않았고 막을 생각도 없었던 것이죠

 

한편 1군 사령관 이한림은 진압 준비를 완료한채 진압명령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당시 국군 전력의 70%가 1군에 집중되어 있었다보니 이들이 진압 작전에 투입된다면 쿠데타 세력은 순식간에 쓸려버릴 정도였죠

하지만 결국 진압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쿠데타를 진압할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지자 쿠데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비로소 5.16 군사정변은 성공하게 된것입니다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은 대한민국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켰고 정부와 국회, 대법원도 무력화 시켜버렸죠

그리고 군사 혁명 위원회를 출범 시켜서 위원장으로 장도영 부위원장으로 박정희가 임명되었고 이곳에서는 입법과 사법, 행정까지 3권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5월 18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요구로 소집된 제69차 임시 국무회의에서 장면 내각은 총사퇴를 결의하며 해산되었고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체포되었죠

5월 19일에는 군사 혁명 위원회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꿔 헌법의 효력을 능가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해 입법·행정·사법의 삼권을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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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각을 비롯한 시장, 도지사, 군수 등은 모두 군인들의 차지가 되었고 입법부는 폐지되어 행정부에 속해졌으며 사법부와 검찰, 경찰은 군대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죠

그렇게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모든 신문과 언론은 군에 의해 사전 검열 되었으며 정당 활동이나 집회 등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죠

 

또한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국내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게 되면서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이후 '군 일부 반혁명 사건(일명 알래스카 토벌 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세력을 숙청한 뒤 7월 3일에는 장도영을 이 사건에 연루시켜 의장직에서 추방, 체포했고 자신이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의장에 취임 했으며 이듬해인 1962년 3월 22일엔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1963년 3월 16일, 박정희는 군정을 4년 연장할것이라 발표했지만 국민들은 군정 연장을 거세게 반대했고 미국 정부 역시 순조롭게 민정 이양을 촉구한다고 발표하자 군정 연장을 철회한다고 발표하게 되죠

그리고 박정희는 63년 8월 30일에 군대를 전역하고 그날 바로 공화당에 입당한 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으며 1963년 12월 17일, 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제3 공화국이 수립되자 국가재건 최고회의도 해체 되었습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5,6,7,8,9대 대통령까지 약 16년여의 기간동안 연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하다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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