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여요전쟁(고려거란전쟁) 당시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야했던 고려의 국왕 현종의 목숨을 한두번도 아닌 수차례 살렸던 숨은 영웅 지채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의 피난행렬은 임진왜란 때 선조보다 더 암울했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비참하고 처절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고 하죠
그런데 이때 현종을 따르던 신하들 중 원맨쇼나 다름없는 활약을 펼치며 끝내 현종을 지키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채문'입니다
지채문은 봉산 지 씨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고 하죠
현종 시기에 중랑장으로 임명된 그는 거란의 2차 침공이 시작되자 화주에서 고려의 동북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부대가 통주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제2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서경'이 위험해졌고 현종은 지채문에게 서경을 지원하라는 명을 내렸죠
하지만 이때 서경에서는 거란에 항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미 고려를 버리고 거란에 투항하기로 결정을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지원군으로 온 지채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채문은 서경 내부에 있던 지인의 도움을 받은 후에야 겨우 서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네요
지채문은 어떻게든 서경의 사람들을 설득시켜 거란과 맞서보려 했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죠
말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지채문은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행동에 나섰습니다
당시 서경에는 거란의 사절들이 와있었는데 지채문이 거란의 사절들이 돌아가는 길목에 숨어있다가 몰래 그들을 암살해 버리면서 서경이 거란에 항복할 길을 아예 막아버린 것인데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서경사람들도 결국 항복을 포기한 채 거란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후 지채문은 '탁사정'과 함께 기병들을 이끌고 요나라의 '성종'이 보낸 거란의 부대를 몰살시켜 버렸죠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도 3천의 적군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지만 무리하게 추격을 하다가 역습을 당하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지채문은 수도인 개경으로 복귀해서 현종과 고려 조정에 위급한 상황을 전달했죠
지채문의 보고를 받고 공포에 빠진 고려의 조정에서는 차라리 거란에 항복을 하자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때 강감찬이 거란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국왕인 현종에게는 잠시 위험을 피해 몽진을 떠날 것을 권했죠
그런데 현종은 지난날 이원과 최창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호위하겠다고 나섰다가 도망가버린 일 때문에 과연 누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지채문이 당당하게 현종의 호위를 하겠다며 나섰고 그런 지채문을 본 현종이 크게 기뻐했다고 하네요
이후 지채문의 호위를 받으며 개경을 출발한 현종 일행은 다음 날 '단조역'(지금의 경기도 연천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피난을 도와줘야 할 단조역의 역졸들이 단체로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갑자기 현종을 향해 활을 쏘며 덤벼들었다고 하죠
이때 지채문이 신들린 활솜씨를 보여준 덕분에 겨우 역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겨우 위기를 넘기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창화현'이라는 마을에 도착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창화현의 고을 향리라고 주장하는 사람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나 겁도 없이 현종을 조롱한 것도 모자라 한밤중에 병사들을 데리고 습격까지 해오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죠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현종의 신하들과 궁에서 데려온 일꾼들은 모두 왕을 버려둔 채 도망을 쳐버렸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현종의 곁에 남아서 필사적으로 그를 지킨 덕분에 현종은 겨우 창화현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겨우 한숨을 돌린 현종 앞에 이번에는 과거 함부로 병사들을 움직여 동여진의 사람들을 죽인 죄로 유배를 갔던 '하공진'이라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현종은 혹시라도 하공진이 과거의 일로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러 오기라도 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하공진은 오히려 그런 현종을 안심시키며 자신이 직접 요나라의 성종을 만나 그들이 돌아가도록 설득할 테니 허락을 해달라는 청을 올렸죠
잠시 후 현종의 허락을 받은 하공진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현종을 추격하던 거란군의 기병을 만나게 됩니다
깜짝 놀란 하공진은 그들에게 자신이 고려의 사신이라고 주장한 후 추격을 멈추고 같이 개경으로 되돌아가도록 설득을 했는데 만약 이때 하공진이 아니었다면 현종은 거란군에게 잡혀 포로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죠
그 시절 왕이 붙잡혀버린 나라들의 운명이 어찌 됐는지를 생각해 보면 하공진이 고려를 구해낸 순간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이후 하공진은 성종을 만나 이미 고려의 국왕이 남쪽 수 천리 밖으로 달아났다는 거짓말을 했고 그 말에 속은 성종은 개경을 약탈해 버린 후 병사들을 물려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현종으로서는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남쪽으로 향했죠
이후로도 현종의 피난길은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안성에 도착했을 때는 그를 따르던 '유종'이라는 신하가 안성이 자신의 고향이라며 자기 마음대로 현종의 말안장을 뜯어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천안에 도착했을 때는 그동안 현종의 곁에 붙어서 충신인척하던 '김응인'과 유종이 더 이상은 가망이 없다고 느꼈는지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가버렸죠
광주에서는 길이 어긋나면서 왕후와 헤어지는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지채문이 요탄역에서 왕후를 찾아 무사히 모셔왔다고 합니다
'여양현'(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에 이르렀을 때는 그때까지 현종을 따르던 병사들이 더 이상은 힘들어서 못해먹겠다며 파업을 선언해 버리는 사건까지 있었다고 하죠
이때도 지채문이 현종에게 그동안 고생한 병사들에게 상을 내리도록 권하면서 겨우 병사들을 달래는 데 성공했다고 하네요
'삼례'라는 지역에서는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옆에 끼고 자신도 강조처럼 고려의 권력자가 되어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때 지채문은 조용겸이 현종을 만나지 못하도록 현종이 머무는 전각의 문을 굳게 지키다가 조용겸의 부하들 중 한 명을 설득해 그들이 더 이상 조용겸을 따르지 않도록 만들었죠
그렇게 현종은 이번에도 지채문 덕분에 위기를 넘기며 전주를 빠져나왔습니다
이후 나주에서도 순찰대가 거란의 사절을 보고 거란의 병사들이 쳐들어 온 것으로 오해한 뒤 헛소문을 퍼뜨리는 일이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놀란 현종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달아나려고 했죠
하지만 이때 지채문이 현종을 진정시킨 후에 직접 정찰을 나가 그들이 거란의 군대가 아니라 사신임을 확인했다고 하네요
마침내 거란이 물러났다는 소식이 현종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에 들러서 지채문에게 상을 내렸는데 이때 현종이 지채문에게 내린 글의 내용을 보면
"짐이 도적을 피하려고 급히 먼 길을 떠났는데 나를 따르던 신하들 중 도중에 도망가지 않은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직 채문만이 추운 바람과 눈을 맞아가며 때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내 말고삐를 직접 잡아가며 나를 호위한 끝에 끝내 지켜내는 데 성공했으니 어찌 내가 그에게 보답하는 것을 아까워하겠는가?" 라고 써져 있었다고 하니 피난길에 그가 현종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 짐작할 수 있죠
1016년 우상시로 임명된 지채문은 1026년에는 상서우복야로 승진했고 죽은 후에는 현종을 호위한 공을 인정받아 1등 공신으로 추증되었다고 합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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