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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양규. 거란에게 멸망할 뻔한 나라를 지켜냈었던 고려의 이순신 장군으로 재평가 받는 영웅

by 사탐과탐 20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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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기 이전인 거란 2차 침입 때 멸망할 뻔한 나라를
지켜냈었던 고려의 영웅 양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해 온 것은 크게 봤을 때 모두 3차례였는데 시기별로 가장 큰 활약을 했던 인물을 뽑으라면 1차는 서희, 2차는 양규, 3차는 강감찬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거란의 제2차 침입 때는 요나라 성종이 무려 40만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오면서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로 도망가는 등 나라가 멸망할뻔한 위기에 처했었죠 

 

그렇게 바람 앞의 촛불신세가 된 고려를 구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양규입니다 

 

거란과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 양규가 언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디 출신인지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하죠 

다만 그의 열전에 목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형부낭중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997년에서 1009년 사이에 관직에 오른 것이라 짐작됩니다 

 

목종은 즉위 직후 8년 사이에 100명 이상의 인재를 등용했는데요

심지어 1006년 4월에는 6품 이상의 모든 관료들에게 유능한 인재가 있으면 추천하라는 명을 내렸을 정도로 인재등용에 진심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때쯤 양규도 관직에 나갔을 거라는 의견이 많죠

 

강조의 정변 이후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자 요나라의 성종은 이 사실을 명분 삼아 고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성종은 무려 40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로 쳐들어왔는데 고려와 요나라의 최전선 요충지인 흥화진을 먼저 포위해서 고려의 국경선부터 깨부수겠다는 의지를 보였죠

고려는 요나라의 침공 계획을 알자마자 양규를 서북면 도순검사로 임명한 후 흥화진으로 급히 보냈습니다

 

도순검사란 고려 시대에 특별한 임무를 주면서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슬아치를 말하는데 당시 양규는 임시로 흥화진에 파견돼서 요나라의 진격을 막으며 시간을 버는 임무를 맡게 되었죠

1010년 11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성종이 이끄는 40만의 대군은 양규가 지키는 흥화진을 맹렬히 공격했는데 양규는 3천 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거란의 공격을 잘 막아냈습니다 

병사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일당백의 활약을 한 셈인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요 성종은 양규가 지키는 흥화진을 정면으로 뚫기는 쉽지 않겠다 판단하고 고려로 오는 길에 사로잡은 고려 백성들을 흥화진으로 보내며 흥화진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함께 보냈죠

편지의 내용은 자신이 고려를 치는 이유는 강조가 목종을 죽였기 때문이니 만약 순순히 강조를 내놓으면 이대로 물러나겠지만 계속해서 저항하면 이대로 개경까지 밀고 가서 모두 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 써져 있었습니다

 

강조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그 뜻을 따른 사람이 있다면 우리에게 항복하라는 말도 써있었죠

하지만 양규를 비롯한 흥화진의 장수들은 정중하게 성종의 권유를 거절했고 이후 성종이 또다시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했을 때도 절대 항복할 수는 없다는 답장만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결국 성종은 20만의 병력을 무로대라는 곳에 대기시킨 후 자신은 나머지 20만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해 통주 전투에서 강조의 부대를 격파하고 포로로 붙잡은 강조를 처형해 버렸죠

강조의 패배로 고려는 주력부대를 잃어버린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이후 성종은 마치 강조가 쓴 것처럼 항복하라는 내용이 담긴 가짜 편지를 써서 흥화진의 장수들에게 보냈는데요

하지만 양규는 우리는 임금의 명을 받는 것이니 강조의 지시를 받을 수는 없다며 항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죠

 

이후 거란군은 흥화진을 내버려 둔 채 통주와 곽주를 공격했는데 통주성은 치열한 전투 끝에 거란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곽주성은 결국 거란군의 손에 넘어가버렸습니다

거란이 마음 놓고 서경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국경과 개경의 중간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는 통주와 곽주를 모두 자신들이 점령해야만 했는데 통주를 점령하는데 실패하면서 거란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죠

양규가 지키는 흥화진과 통주를 그대로 남겨놓고 남쪽으로 진격하려니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고 그렇다고 흥화진과 통주를 마저 점령하려니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인데요

결국 거란은 고민 끝에 무로대에 군을 남겨놓고 곽주에도 6천 명의 병력을 남긴 후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양규 또한 보고 받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양규의 진짜 맹활약이 시작되었죠

 

전쟁이 일어나면 대부분의 장수들은 침략해 온 병사들을 몰아내는데 집중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양규의 목표는 백성들을 얼마나 많이 구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흥화진에서 700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통주로 향한 양규는 그곳에서 1000명의 병력을 추가로 얻은 뒤 곽주로 향했죠

양규가 그렇게 적은 수의 병사들만을 끌고 다닌 것은 거란의 대규모 부대가 있는 무로대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을 데리고 다니면 적들에게 들킬 위험이 높아서였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010년 12월 16일 양규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밤중에 곽주를 공격해 그곳을 지키던 거란병사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곽주성 안에 있던 7천 명의 백성을 구출해 통주로 옮기면서 통주성의 수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곽주는 거란군의 식량을 책임지는 보급로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양규는 곽주를 공격하면서 백성들도 구출하고 요나라의 보급로까지 끊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한 것이죠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곽주 전투야말로 거란과 고려의 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승리였다고 합니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의 손에 남아있었다면 보급로를 확보한 거란군의 공격에 서경이 버텨내지 못했을 테고 서경마저 거란의 손에 떨어졌다면 이후 수도인 개경이 거란에게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에 그대로 고려가 멸망할 수도 있는 큰 위기에 처했을 수도 있었죠

 

하지만 양규가 곽주를 점령하면서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인데요

당시 거란군은 생각보다 강한 저항에 막혀 서경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곽주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경을 포기한 채 과감히 수도인 개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국왕인 현종을 사로잡아 단숨에 끝을 내겠다는 것이었죠

 

1011년 1월 1일 성종은 개경에 입성해 성을 불태우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고려의 국왕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떠난 후였습니다

게다가 고려의 충신 하공진이 성종에게 고려왕은 이미 수만리나 떨어진 강남으로 피했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거기에 속아 넘어간 성종은 추격을 포기한 채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죠

 

거란군은 후퇴하는 도중에도 수만 명의 고려인들을 포로로 납치해 가며 청천강까지 올라갔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있던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들 부대를 습격해 만 명이나 되는 거란군을 죽이는 공을 세웠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양규도 20만 명의 거란군이 있던 무로대를 습격해서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고려의 백성들을 3천여 명이나 구출해 내는 데 성공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고려사 양규열전에 따르면 이후 양규는 이수에서 전투를 벌여 2500명이나 되는 적군을 베고 천여 명의 고려인 포로들을 구출해 냈으며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에서 싸워 거란군 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천여 명을 구해냈습니다

양규의 목적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거란군에게 계속 공격을 하면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동시에 최대한 많은 고려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는 것이었죠

 

그렇게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며 거란군을 괴롭히던 양규는 김숙흥의 부대와 합류하게 됩니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오늘날 평안북도 선천군 근처로 짐작되는 애전으로 거란군의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공격해 천명이나 되는 적군을 죽이는 승리를 거뒀는데 하필 이때 애전에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나버렸죠

 

황제를 지키는 최정예 부대인만큼 그 수와 전투력에 있어서도 다른 거란군 부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병사들이었습니다

양규와 김숙흥은 그런 성종의 친위군과 맞서 싸우며 화살이 다 떨어지고 병사들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그야말로 처절한 싸움을 계속해 나갔지만 결국 압도적인 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죠

 

양규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이유는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는 것도 있었고 전투가 벌어지기 전 자신이 구출한 천여 명의 고려 백성들이 무사히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한 명의 백성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양규가 얼마나 큰 공을 세운 것인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요

 

짧은 기간 동안 양규가 구해낸 수많은 고려의 백성들은 나중에 거란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병사가 되어 싸우거나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낼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그가 고려에 거란의 3차 침입을 대비할 수 있는 저력을 만들어준 셈이라고 볼 수도 있죠

양규는 그를 도와줄 지원군도 없이 1개월 사이에 모두 7번을 싸워 셀 수 없이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그가 구출한 고려인 포로만 무려 30,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전투를 벌이면서 그가 얻은 군마와 낙타 무기들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엄청난 공을 세운 셈인데요

그리고 양규가 끊임없이 북방에서 거란군을 상대로 활약한 덕분에 거란이 다 이긴 전쟁을 포기한 채 어정쩡한 조건으로 전쟁을 대충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도 있다고 합니다

 

만약 2차 침공 때 고려가 일방적으로 거란에 당하기만 했다면 거란은 자신들이 그토록 탐냈던 강동 6주를 절대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며 고려는 더 많은 백성들을 희생당하고 거란에 막대한 배상금까지 내면서 큰 손실을 입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죠

하지만 양규와 여러 장수들의 희생 덕분에 고려가 비록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비교적 많은 인구수를 유지하고 배상의 책임에서도 피해 가는 등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이후에 벌어진 제3차 여요 전쟁에서 완벽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네요

 

현종도 그런 양규의 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과의 전쟁이 완전히 끝난 1019년에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양규가 고려의 건국공신인 '삼한벽상공신'만큼 큰 공을 세웠다고 인정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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