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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강조. 고려에서 처음으로 정변을 일으키고 거란에게 침략할 빌미를 제공했던 인물

by 사탐과탐 2023.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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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처음으로 강조의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추대했던 일로 결국 거란에게 침략할 빌미를 제공해버렸던 고려의 장군 강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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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무신정변과 위화도 회군 등 신하들이 왕실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많았는데요 

오늘은 그런 기나긴 쿠데타 역사의 스타트를 끊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인 '강조의 정변'을 일으킨 주인공 강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사' 열전을 비롯한 그 어떤 기록에도 강조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어떤 가문인지 그리고 어떻게 자랐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고 하죠 

 

때문에 그가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도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역사가들이 조사를 해본 결과 그가 신천 강 씨 집안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 신천 강 씨들도 강조가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강조는 황해도 신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고구려계 패서 호족 출신의 인물이었을 거라고 짐작되죠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국왕으로 추대한 강조의 정변 때라고 합니다

7대 국왕인 목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목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대량원군 '왕순'(훗날의 현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천추태후의 애인인 김치양이 현종대신 자신의 아들을 다음 국왕으로 세울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래서 목종은 김치양을 견제하기 위해 서북면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런데 강조가 개경으로 들어온 이후 폭정을 휘두르던 김치양과 유행간을 처형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의 칼날이 국왕인 목종에게까지 향했다는 게 문제였죠

강조는 목종과 천추태후를 강제로 폐위시켜 버린 후 현종을 고려의 국왕으로 추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몰래 보내 개경을 떠나는 목종을 시해해 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천추태후와 그녀의 친족들을 모두 유배 보내버리면서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인물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 강조는 순식간에 고려의 최고실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태가 정리되어 가는 듯했지만 문제는 틈만 나면 고려를 침공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던 거란이 고려를 공격할 구실을 찾기 위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요나라의 성종은 평소 거란과 잘 지내던 목종을 함부로 시해해 버린 반역자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더니 무려 40만이 되는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당연히 요성종이 목종의 복수를 위해 고려를 침공한 것은 아니었고 진짜 이유는 거란이 본격적으로 송나라와 일전을 치르기 전에 고려를 자신들의 밑에 두면서 후방을 안전히 해두려는 속셈이었죠

 

만약 송나라와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고려가 요나라에 무력시위라도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들로서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기에 고려의 왕이 바뀌면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쳐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거란의 침공소식을 들은 강조는 직접 30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거란을 상대하러 출진했죠

 

이때 강조가 조정의 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출진을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강조는 이미 고려의 실권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명을 내렸던 것은 그저 보여주기에 불과할 뿐 강조 본인이 원해서 출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강조는 별다른 명분 없이 이전 국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면서 입지가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인데요

 

오죽하면 강조가 목종을 강제로 끌어내리는 모습을 보고 고려의 중신인 최항이 대체 어떤 신하가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고 강조의 앞에서 대놓고 호통을 칠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강조가 권력을 잡은 후였는데도 대놓고 그런 비판을 들을 정도로 그의 입지가 불안했던 것이죠

그리고 강조를 반대하는 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란이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침공해 온 상황 속에서 적극적으로 적들을 막으러 나서지 않으면 천하의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강조로서는 출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인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게다가 요나라가 무려 40만이나 되는 대군을 끌고 온 만큼 고려에서도 적들을 막기 위해 30만이라는 병력을 모았는데 강조 말고는 그들을 지휘할만한 능력을 가진 인재도 마땅히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죠

 

거란군이 처음 목표로 삼은 곳은 국경 지역인 흥화진이었는데 이곳에는 고려의 명장 양규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공격을 시도해도 흥화진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성종이 편지를 보내 흥화진을 지키던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하기도 했지만 고려의 장수들은 이를 거절했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성종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을 나눠 일부의 병사들을 귀주 쪽으로 보낸 뒤 자신은 본대를 끌고 강조가 있던 통주로 진군했습니다

 

거란군과 정면승부를 하기로 한 강조는 부대를 셋으로 나눠서 한 부대는 정면에 세우고 다른 부대 하나는 뒤에 있던 요새와 고려군의 퇴각로를 지키게 했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부대는 주변에 있는 고지를 지키게 하면서 거란군에게 기습을 당하는 것을 막도록 했죠

그리고 진지 주변에 있던 하천을 참호로 이용해서 적들이 옆쪽에서 기습을 해오는 것을 막은 뒤 적들이 오는 정면에는 '검차'라는 무기를 배치했습니다

검차란 수레 위에 적의 공격을 막을 방패를 먼저 싣고 그 방패에 검을 꽂아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게 만든 무기인데요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에 검차를 미리 세워두면서 거란 기병들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거란군은 하루에 10번이 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많은 병사들이 검차에 목숨을 잃게 되면서 첫 전투가 고려의 승리로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후로도 계속해서 거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자 강조는 갑자기 긴장이 풀려버렸는지 점점 방심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죠

 

그에 반해 거란군은 어차피 많은 수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공격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소수의 부대로 빠르게 치고 빠지는 작전을 쓰기로 합니다

이후 거란군은 '야율분노'와 '야율적로'라는 장수를 앞세워 고려의 진영에 치고 빠지는 식의 속도전을 걸었는데 강조는 자신의 진영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이들이 이끄는 부대는 바로 성종의 친위대인 '우피실군'이라는것이 문제였습니다

거란군의 최고정예인 우피실군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기 때문에 공격을 당한 강조의 본대는 다른 고려군 부대가 미처 도와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중앙까지 돌파를 당해버렸죠

적군이 이미 본진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는 보고를 받은 강조는 다른 두 진영의 도움을 받기도 전에 자신의 본대가 먼저 무너질 것이란 걸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려사'에서는 이때 강조의 앞에 목종의 혼령이 나타나 "네 놈은 천벌을 받는 것을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호통을 쳤고 강조가 그런 목종에게 죽을죄를 지었다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아마도 궁지에 몰린 강조가 자신의 지난날 행동을 후회하며 결국 목종을 폐위시킨 것 때문에 거란을 불러들였다는 후회를 한 거 같은데 이때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짐작됩니다

 

통주 전투의 패배로 이 날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고려의 병사들만 무려 3만 명이었으며 총사령관인 강조는 결국 포로로 붙잡히게 되죠

이후 성종은 사로잡힌 고려의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했고 강조의 부하였던 이현운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강조는 그런 이현운을 보고 어떻게 고려인으로서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할 수 있냐며 이현운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 그를 발로 차는 등 화를 내고는 거란에 항복하기를 거부한 채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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