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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서희. 고려거란 전쟁에서 고려가 승리할수 있었던 토대를 만든 인물

by 사탐과탐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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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지었던 서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고려거란 전쟁 직전의 상황 이야기, 1차 고려거란전쟁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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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2차 침입때는 양규, 3차 침입때는 강감찬에 의해 거란은 혼쭐이 나서 도망치고 말았는데요

사실 이렇게 거란의 침입을 막을수 있었던 것도 1차 침입때 서희가 있어서 였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몇번이고 개경이 위험했을수도 있는데 서희의 화려한 말빨로 강동6주를 얻어냈고 이곳을 요새화 했기 때문에 그곳을 중심으로 양규와 강감찬이 활약 할수 있었고 고려가 거란을 막아낼수 있었던 것이죠

 

서희야말로 여요전쟁 승리의 포석을 마련했던 설계자이자 이미 큰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1,2,3,차를 통틀어 고려거란전쟁 최고의 1등공신입니다

오늘은 거란에 항복하자던 고려를 다시 정신차리게 했던 서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서희를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으로 생각 하는 사람이 많았을텐데요

사실 그는 최고의 외교관 뿐만아니라 훌륭한 전략가이자 명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서희의 아버지 역시 광종앞에서 바른말을 하던 강직한 재상인 서필이었고 서희 아들인 서눌도 재상 자리에 올랐으며 3대가 고려의 재상을 지낸 엄청난 집안이었죠

아무튼 서희는 942년에 태어나 18세의 문과에 급제한 굉장히 총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960년 송나라가 건국된 이후 송나라는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기위해 사신이 배를 타고 고려로 오던중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는 일이 벌어졌죠

이후 서희는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송나라로 파견되었고 무사히 송나라와 국교를 회복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송태조 조광윤은 서희의 훌륭한 인품을 보고 감탄해 검교병부상서라는 정3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다고 하죠

 

이후 무난한 삶을 이어오던 중 서희의 이름이 역사에 새겨질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993년 10월,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온것이죠

이에 서희는 중군사가 되어 박양유, 최량과 함께 거란을 막으러 출진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거란군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해버렸고 '80만 대군에 짓밟히고 싶지 않다면 빨리 땅을 떼어주고 항복하라'며 고려 조정을 협박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80만 대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놀란 고려 조정은 그냥 항복하자는 '화친론'과 그냥 항복하면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며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준 뒤 항복해야 한다는 '할지론'으로 의견이 갈려 서로 격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80만 대군이라는 것은 소손녕의 뻥이었는데요

지금 수많은 학자들은 당시 소손녕의 군대는 많아봤자 6만명이고 이것도 최대치 이니 아마 실제로는 더 적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죠

 

그럴만한 이유도 많은데요

사실 거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은 도통(都統)이라고 불렀는데 도통이 지휘했을때의 거란군은 약 15만명 이상 되었고 도통이 아닐경우엔 최대 6만명 정도였다고 하죠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소손녕의 직책은 동경유수로 도통이 아니었으니 거란군은 6만명 이하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쨌든 고려는 봉산전투에서 패배후 이몽전을 사신으로 거란군에 파견했는데 소손녕이 무작정 '뒤지기 싫으면 땅을 떼어주고 항복하라'는 말만 해대는 통에 그대로 돌아가 고려 성종에게 아뢰었고 오히려 고려는 혼란만 가중되었던 것이죠

워낙 소손녕이 강하게 나오다보니 이미 고려 조정에서는 할지론으로 의견이 거의 굳어져 가는 상황이었으며 어차피 거란에 빼앗길것 백성들에게 나눠주자 하면서 서경에 쌓여있던 곡식들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남은건 태워버리자고 하는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신하들 중 서희만 거란군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이죠

원래 80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먹일려면 막대한 양의 군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왠만해선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하기 마련인데 소손녕은 고작 봉산전투에서 한번 이기고 난 뒤 계속 항복하라고만 하지 군대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것입니다

소손녕의 의도를 파악한 서희는 성종에게 그들과 화의를 할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하며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해 곡식을 태워버리는 일을 못하게 막았죠

 

그리고 서희는 자신이 직접 거란 진영에 찾아가 화의를 요청하고 오겠다고 하니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성종은 먼곳까지 그를 전송해 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희가 협상을 하기 위해 거란의 진영으로 가려 할때쯤 고려의 대답을 기다리던 소손녕은 고려의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군대를 출진 시켰죠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가는 최단 루트는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향하는 것이었는데 80만 대군이라고 떠벌리는 소손녕의 군대는 안주성은 내버려두고 우회해 돌아가 작은 토성이던 안융진을 공격했던 것이죠

그런데 심지어 안융진에서 대도수와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패배해 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대군인 만큼 소손녕은 굉장히 시간이 아까울텐데 안융진에서 패배하고 난 이후 더이상 군사행동을 하지 않고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했던 것이죠

 

이 소식을 들은 서희는 거란군이 80만 대군도 아니고 고려와 죽자살자 싸울 생각도 없으며 개경까지 진격할 생각이 없고 적당히 무력시위만 하다가 화친을 맺고싶어한다는걸 눈치채게 됩니다

그렇게 서희는 소손녕의 진영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이후 서희와 소손녕의 치열한 기싸움이 시작되는데요

소손녕은 "나는 큰나라에서 온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큰절을 해야한다" 라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에 서희는 "신하가 왕을 대할때는 절을 해야한다지만 양국의 신하들끼리 대면하는 자리에서 절한다는 소리는 들은적 없다" 라며 맞받아 쳤죠

그러자 소손녕은 또 다시 절을 하라고 했고 서희는 못한다고 하면서 몇번 주고 받다가 결국 서희는 '계속 이러면 협상은 없다' 라고 하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서희는 사실 거란에서 싸움을 원하지 않고 회담을 하는것을 더 원하고 있다는걸 잘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게 행동할수 있었던 것이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거란은 사신인 서희를 죽여버리고 곧장 개경으로 공격해 들어가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거란은 연운16주를 두고 송나라와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으며 본격적으로 송나라와 맞붙기 위해서는 후방인 고려와의 사이를 안정시켰어야 했기 때문에 고려에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척 하면서 회담을 원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 소손녕은 알겠다며 서희를 달랜 후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소손녕은 서희에게 "너희는 신라 땅에서 시작한 신라의 후예이면서 현재 우리 소유인 고구려 땅을 침범했다

그리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리말고 바다 건너편에 있는 송나라를 섬기고 있으니 우리가 손수 토벌하러 온것이다

그러니 땅과 조공을 바치면 용서해주겠다" 라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므로 압록강 부근도 우리 땅이라 할수 있는데 지금 여진족이 그곳에 들어와 살고 있어서 길이 막혔고 이곳을 지나다니는 일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려워서 여태껏 거란과 교류를 못했던 것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돌려주면 우리가 성을 쌓아서 길을 통하게 할것이고 그러면 서로 교류도하고 조공도 바치겠다" 라고 말했죠

 

그러자 소손녕도 더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고 요성종에게 보고하자 요성종은 기다렸다는듯이 "고려가 강화를 요청했으니 군사들을 철수시켜라" 라고 명령했고 그렇게 거란군은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려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인정받았고 압록강 이남지역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곳을 통치하는데 거란의 동의를 얻어낸것이죠

 

이렇게만 보면 거란이 아무 이득도 없이 돌아간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거란도 얻는 이익이 많았습니다

바로 고려로부터 자신들의 나라가 정통성을 가진 왕조라고 인정을 받은것, 그리고 송나라와의 대치 상태에서 군사적 충돌을 최소화하고 후방을 안정시킨것, 또한 표면적으로나마 고려와 송나라의 동맹을 와해시킬수 있었던 것, 그리고 형식적이지만 고려로부터 사대의 예를 받을수 있었던 것 등이 있죠

 

그렇게 거란은 이후 송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결국 송나라와 '전연의 맹'을 체결했으며 송나라로부터 막대한 재물을 세폐로 받게 됩니다

아무튼 서희는 거란의 진영에서 7일간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는데 고려 성종은 굉장히 기뻐하면서 강나루까지 마중을 나와 그를 맞이했고 훗날 그는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죠

 

그는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최고의 외교관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사실 외교에만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공빈령이라는 벼슬에 있던 정우현이라는 사람이 정치 문제에 대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하급 관리의 지적질에 열받은 성종은 대신들에게 "이 건방진놈을 혼내야 되겠지?" 라고 물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대신들 대부분이 성종의 말에 동조해 그를 벌주라 했지만 서희는 "신하가 왕에게 바른말을 올리는데 벼슬의 높낮이가 무슨 소용있겠습니까 정우현에게는 벌을 줄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줘야 합니다" 라고 말했고 이말을 들은 성종은 이후 정우현의 벼슬을 올려주고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쨌든 서희는 새로 확보한곳을 요새화 하는 작업을 진두지휘 했는데 이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하면서 그곳에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안의진, 흥화진 등 여러곳에 성을 쌓았고 이 일대를 통치하기 위해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를 설치하니 이것이 '강동 6주'이죠

그러나 이 일대를 개발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며 너무 무리했던 탓인지 서희는 결국 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성종이 직접 문병을 오기도 하면서 그의 쾌유를 빌었지만 997년에 성종이 먼저 죽고 말았고 일년후인 998년에 57세의 나이로 서희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아들 서눌도 재상자리에 오르면서 3대가 재상을 지낸 엄청난 가문이 되었으며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죠

 

그리고 이후 서희가 얻어내고 손수 군사적 요충지로 만든 이곳에서 이후 2차 3차 여요전쟁때 거란군을 쳐부수게 됩니다

그만큼 중요한곳을 빼앗아 왔기 때문에 서희는 고려 거란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1등 공신이라고 할만 한것이죠

 

서희는 확실히 훌륭한 외교관이라는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먼 훗날을 예측해 행동하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성종을 도와 고려를 살려낸 명재상이기도 했던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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