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하공진. 현종을 잡으려는 거란의 맹추격을 혼자 물리쳐버린 인물

by 사탐과탐 2023. 12. 8.
반응형
현종을 잡으려는 거란의 맹추격을 혼자 물리쳐버린 인물 하공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목숨을 바쳐 자신이 섬기는 왕을 살려낸 고려의 충신 하공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려 볼까 합니다

 

태조 왕건은 무려 29명이나 되는 후궁들과 결혼하는 혼인정책을 펼치면서 고려를 건국했지만 바로 그 혼인정책 때문에 왕건의 뒤를 누가 이을 것이냐로 수많은 호족들 간에 권력다툼이 벌어지면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죠

 

이후 4대 국왕인 광종이 이런 부작용들을 없애기 위해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노예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해 호족들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었고 6대 국왕인 성종은 호족들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가 계속 있었습니다

하지만 7대 국왕인 목종 시기에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고 이후 거란의 2차 침입까지 이어지면서 고려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하공진은 바로 이 거란의 2차 침입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하는데요

고려사에 따르면 하공진은 진주 출신으로 성종 시절인 994년 '압강도구당사'에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거란이 1차 침공을 해왔을 때 서희가 그들과 담판을 지어 거란군을 물러나게 한 후 성종은 압록강 동쪽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과 흥화진등에 훗날 강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았으며 고려에서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에 설치된 진도(고려와 조선 시대 중요한 강변 요충지에 설치한 나루터)를 관할하는 압강도구당사라는 관직을 만들었는데 하공진이 바로 그 일을 맡았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목종 때에는 정 5품 무관직인 중랑장이 된 그는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누웠을 때 친종장군 '유방', 중랑장 '탁사정' 등과 함께 목종이 있는 궁궐 주변을 호위하는 일을 맡기도 했으며 이후 정변을 일으킨 후 권력을 잡은 강조의 밑으로 들어가 상서성에 소속된 좌사낭중 자리에 올랐습니다

현종이 새롭게 국왕으로 즉위한 1010년에는 고려의 행정구역인 5도 양계 중 양계지역을 지키다가 마음대로 군사들을 동원해 동여진의 마을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 전투에서 패배한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유배를 가기도 했죠

 

그러던 와중에 요나라의 성종이 자신들과 친하게 지냈던 목종을 강조가 함부로 시해한 죄를 묻겠다며 고려를 침공해 오면서 하공진도 유배에서 풀려났다고 합니다

요 성종은 자신들의 숙적인 송과 교류하는 고려를 정벌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침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면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지금이 고려를 정벌할 기회라 생각했죠

그래서 괜히 폐위된 목종의 복수를 핑계로 대며 고려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의 국왕 현종은 계속해서 요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어떻게든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심지어 요나라 군대가 강동 6주 중 하나인 흥화진을 포위했을 때에도 사자를 보내며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거란의 40만 대군이 침공해 오면서 제2차 여요전쟁이 시작되었죠

 

당시 고려의 최고권력자였던 강조는 자신의 자리를 더욱 굳히기 위한 업적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요나라를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통주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면서 고려군의 주력은 박살이 나버렸고 강조 또한 목숨을 잃게 되죠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무찌르며 기세가 오른 요나라군은 서경에 이어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과정에서 양규와 강민첨 등의 장수들이 북방에서 거란군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강조가 이끌던 중앙군이 전멸해 버린 상황에서는 요의 성종이 이끄는 본대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전라남도 나주까지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거란군의 정예기병이 추격해 오면 언제 따라 잡힐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하공진은 호부원외랑 고영기와 함께 20여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의 뒤를 따른 끝에 지금의 경기도 지역에 해당하는 양주에서 현종을 만나 자신이 국왕의 사절로 가서 요 성종을 만나 협상을 해보겠다고 나섰죠

이후 현종의 허락을 받고 성종을 만난 하공진은 고려의 국왕이 이미 남쪽 수천리 밖으로 몸을 피했으니 지금 와서 추격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공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성종은 결국 추격을 포기하게 되는데 사실 그때 거란군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불과 10여 리(약 4km)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하공진이 성종을 속이지 못했다면 거란의 기병에게 현종이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하공진의 목숨을 건 도박이 성공하면서 현종은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었고 이후 하공진은 고영기와 함께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요나라로 돌아간 성종은 하공진을 곁에 두고 쓰려했지만 하공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오직 고려뿐이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고려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게 되죠

결국 성종에 의해 연경으로 옮겨지게 된 그는 양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하공진은 끝까지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공진은 연경에서도 자주 저잣거리로 가서 잘 달리는 준마를 많이 사두고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해 둔 다음 몰래 고려로 귀국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결국 그 계획이 들키면서 성종의 국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종은 하공진에게 온갖 고문을 하는 동시에 그를 달래기도 하면서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요청했지만 단호하게 성종의 제안을 거부하던 하공진은 계속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성종에게 심한 욕까지 퍼부어댔죠

 

결국 화가 난 성종은 하공진을 처형해 버렸다고 하네요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면서 나라에 충성을 다한 하공진 덕분에 고려는 가장 위험했던 제2차 여요전쟁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으며 이후 철저한 준비를 통해 3차 여요 전쟁 때는 귀주대첩에서 승리한 끝에 거란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강조. 고려에서 처음으로 정변을 일으키고 거란에게 침략할 빌미를 제공했던 인물

 

강조. 고려에서 처음으로 정변을 일으키고 거란에게 침략할 빌미를 제공했던 인물

고려에서 처음으로 강조의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추대했던 일로 결국 거란에게 침략할 빌미를 제공해버렸던 고려의 장군 강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이자겸의 난

satamguatam.tistory.com

양규. 거란에게 멸망할 뻔한 나라를 지켜냈었던 고려의 이순신 장군으로 재평가 받는 영웅

 

양규. 거란에게 멸망할 뻔한 나라를 지켜냈었던 고려의 이순신 장군으로 재평가 받는 영웅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기 이전인 거란 2차 침입 때 멸망할 뻔한 나라를 지켜냈었던 고려의 영웅 양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해 온 것은 크게 봤을 때 모두 3차례였는데 시기

satamguatam.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