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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경안공주. 세종대왕보다 더 총명한 모습을 보여 태종이 무척이나 아꼈던 공주

by 사탐과탐 202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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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보다 더 총명한 모습을 보여 태종이 무척이나 아꼈던 공주, 경안공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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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국왕인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았는데

경안공주는 그중 셋째 딸로 세종의 바로 위 누이였다고 합니다

실록에 따르면 경안공주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예뻤던 데다

얌전하기까지 해서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하죠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자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과 서로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왕실에서는 태종의 자식들 중 뛰어난 이를 말할 때

충녕대군과 경안공주의 이름이 항상 나왔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충녕대군에게 경안공주는 단지 누이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꿈을 이해하고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충녕대군을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세종은 말년이 되어서도 자신은 아직

누이인 경안공주가 보여줬던 학문의 깊이를 따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죠

 

경안공주는 평소 충녕대군의 미담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주 전해주는 등

동생의 정치적인 후원자 노릇을 해줬으며

시집을 간 후에도 계속 충녕대군에게 서신을 보내

훗날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던 그에게 큰 힘이 되어줬다고 하네요

때문에 세종 또한 그런 누이를 진심으로 믿고 따랐다고 합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해에 경안궁주에 책봉된 그녀는

1403년 12월 18일 대학자 권근의 아들인 길창군 권규와 혼인을 하게 되었죠

권규가 부마로 선택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인 권근 덕분이었는데

이 권근이라는 인물은 이색과 정몽주에게서 학문을 배운 탓에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문장에 능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공민왕 18년인 1369년 1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권근은

이후 20여 년 동안 고려의 관료생활을 했는데

1389년 대간의 탄핵을 받고 있던 동료학자 이숭인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간들의 탄핵을 받게 되면서 황해도 우봉으로 유배를 가게 되죠

 

다음 해 유배에서 풀려난 권근은 더 이상의 관직생활을 거부한 채

충주의 양촌으로 내려가 학문을 닦는데만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되죠

 

이후 권근은 명나라 태조가 정도전이 작성한 표문을 문제 삼으면서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하라고 난리를 쳤을 때

직접 명나라로 건너가 명나라 태조에게 해명을 하는 데 성공하면서

두나라간의 외교분쟁을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일로 권근은 명나라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은 것은 물론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공신의 대우를 받게 되죠

이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태종의 편에 서기도 했기 때문에

권근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진 태종은

정도전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학자라 불린 권근을 붙잡아두기 위해

그의 아들인 권규와 경안공주를 혼인시킨 것으로 보이는데요

 

경안공주의 남편인 권규도 혼인을 한 후부터는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1407년 정 3품 호분위상호군의 직책을 맡은데 이어

다음 해에는 조선의 3군 중 하나인 우군을 지휘하는 우군도총제를 겸하게 되었죠

1413년에는 명나라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416년에는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길창군으로 봉해졌습니다

 

경안공주 또한 결혼 후 극진히 시부모를 섬겼을 뿐만 아니라

집안사람들을 잘 다스리면서 권 씨 가문의 인정을 받는 등

그녀와 가족들 모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1415년 경안공주가 갑작스런 발열 증세를 보이며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태종은 급히 내의원의 의관 양홍달을 불러 공주를 살펴보게 했지만

양홍달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증세라고 말하며 별다른 치료를 하지 못했고

결국 경안공주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끼던 딸의 죽음에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그녀를 애도하기 위해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한 것은 물론

한동안 고기반찬을 먹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하죠

 

1418년에는 막내아들인 성녕대군마저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서 분노가 폭발한 태종은

내의원에서 경안공주와 성녕대군의 병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며

의원 양홍달을 폐서인으로 만들고 박거 등의 다른 의원들은 장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안공주와 가깝게 지냈던 충녕대군은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형제들 중 가장 슬퍼했다고 하네요

 

경안공주는 권규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딸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1421년에 부마 권규도 2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면서

경안공주의 아들인 권담과 권총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게 됩니다

 

실록에 따르면 권규는 평소 성격이 온화하고 겸손했으며

부마의 신분임에도 사치를 부리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하죠

하루는 권규의 집에 드나들던 가난한 선비가 창고에서 쌀을 훔치다가

가문에서 부리던 청지기에게 들켜 붙잡히는 일이 있었는데

청지기의 보고를 받은 권규는 그의 사정이 딱하다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고 그가 훔친 쌀을 손에 쥐어주고는 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실록에는 한 사람이 죽은 후 그에 대한 평가를 적는 '졸기'라는 부분이 있는데

권규와 경안공주의 졸기에는 그들 부부가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죠

태종이 가장 아끼는 딸이 혼인을 할 때 아무런 혼수품을 지원해주지 않았을 리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경안공주의 친자매들에 관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경안공주도 혼인할 때 태종으로부터 큰 저택과 많은 재산을 하사 받은 것으로 짐작되며

혼인한 후로도 태종이 그녀에게 많은 지원을 해줬을 가능성이 높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권규 또한 태종의 신임을 받아 높은 관직을 거쳐왔기 때문에

많은 녹봉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도

경안공주 부부가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평소 그들 부부의 성품을 봤을 때는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태종은 경안공주의 둘째 아들인 권총을 무척 아꼈기 때문에

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 부마 권규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부모를 모두 잃은 권총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궁궐로 불러들였다고 하죠

 

이후 권총은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었지만

어느 날 태종의 신하중 수염이 긴 사람을 본 어린 권총이

호기심에 그의 수염을 뽑아버리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시점에서 보면 어린아이의

악의 없는 행동이니 큰 문제를 삼지는 않겠지만

당시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해서

연장자의 신체를 훼손한 것은 문제가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죠

얼마 후 조정에서는 권총에게 벌을 줘야 한다는 공론이 일어났고

이것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태종으로서도 막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태종은 "엄격한 예법을 생각하면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이겠지만

내 외손자가 아직 어리고 무지해서 벌인 일이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달라"며 신하들에게 부탁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권총은 큰 처벌을 받지 않고 숭례문 밖에 유폐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죠

 

얼마 후 큰 병에 걸린 태종이 외손자가 너무 보고 싶은데

지엄한 국법이 무서워 만나보지 못하겠다며 안타까워하자

신하들이 태종을 생각해 권총을 사면해 주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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