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충신, 사육신을 대표하는 인물 하지만 애매한점도 많은 성삼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들은 나라에 큰 연회가 있거나 왕이 어디론가 이동할때
유능한 무장 중에서 믿을수 있는 사람을 뽑아
왕의 좌우에서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들이 바로 별운검이었죠
이 별운검은 운검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운검의 운자가 바로 '구름 운(雲)'자 였습니다
그 이유는 용(왕)이 나타날땐 항상 구름과 함께 했기 때문에
왕을 호위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름을 붙였던 것이죠
그리고 왕의 바로 옆에서 칼을 차고 있는 만큼
믿을수 있을 만한 사람을 뽑았어야 했는데
현직 무신 또는 퇴직한 무신들 중
명망이 높고 공적이 뛰어난 고위 장군들 위주로 선발했다고 합니다
이런 별운검에 대한 가장 유명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사육신의 배경이 된 병자사화 때의 일이죠
1456년, 성승과 유응부가 별운검으로 선정되어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연회 때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실패하고 말았죠
이 일을 꾸민 인물이 바로 성승의 아들이던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 사육신들 이었는데요
오늘은 사육신의 대표격인 인물 성삼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사육신이라하면 조선시대 최고의 충신들로
그들의 대표격으로 여겨진 성삼문에 대한 전설적인 일화는 굉장히 많죠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실려있지 않은 이야기도 많은데
이런 이야기도 해볼까 합니다
성삼문은 성승과 죽산박씨의 아들로 태어났죠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였던 만큼 학자의 이미지가 강한데요
그의 아버지 성승과 할아버지 성달생은 모두 무신이었다고 합니다
성삼문의 강직한 면은
무신이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죠
성삼문의 이름은 굉장히 특이한데
삼문(三問)의 뜻은 세 번 물어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일화가 있는데
어머니 죽산 박씨가 성삼문을 낳을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3번째 들렸을때 성삼문이 태어났는데
그 때문에 삼문이라고 지었다고 하죠
재미있는 점은 성삼문의 형제들의 이름도 굉장히 특이한데
세번 부른다는 뜻의 '삼빙(三聘)', 그리고 세번 돌아본다는 뜻의 '삼고(三顧)'
그리고 세번 살펴본다는 뜻의 '삼성(三省)' 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성삼문이 태어난 이후 점을 봤는데
훗날 충신이 될 인물이라고 하자
그의 할아버지 성달생이 집안을 말아먹을 녀석이라며 한탄했다고 하죠
사실 성달생은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멸망시킨 인물 중 한명인데
최영과 정몽주 같은 충신들이 모두 죽임당하고
고려가 멸망하는걸 다 지켜봤다보니
충신이라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후 굉장히 총명하게 자란 성삼문은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할만큼 수재였고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기도 했죠
성삼문하면 강직하고 우직한 충신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요
그는 사실 굉장히 밝은 성격에
실없는 농담도 잘하는 유머러스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나중에 고문을 당하면서도 절개를 지킨걸 보면
겉으로는 약해보여도 속은 굉장히 강한 스타일의 인물이었던 것 같죠
그러던 1453년 어느날, 수양대군이
황보인과 김종서 등 을 죽여버린 계유정난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성삼문은 정난공신 3등에 오르기도 했죠
그 외에도 박팽년과 유성원 이개 등
훗날 사육신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도
대부분 정난공신의 명단에 올랐다고 합니다.
사실 집현적 학사들도 고명대신을 비롯한
노신들의 권력이 비대해지던것에 반대하는 입장이기도 했던 것이죠
또한 적극적으로 계유정난에 가담했던 신숙주와는 달리
집현전 학사들은 암묵적으로 계유정난에 동의를 하고 있었기도 했고
그런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세조는 그들을 빠르게 승진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성삼문은 1454년 6월에 집현전 부제학이 되면서 정3품 당상관 직에 올랐고
이후 1455년 6월엔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했던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이후에 생기기 시작했는데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 한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이 비대해지던 대신들을 제거한것 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갈만 했지만
이후 왕위를 빼앗은건 선 넘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근데 이때 세조가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를 강요했는데
성삼문은 국새를 끌어안고 통곡했고
이 일 때문에 세조에게 찍혔다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사실 이 내용은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은 야사라고 하죠
어쨌든 성삼문은 다시 세조를 폐위시키고
상왕이 된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렇게 박팽년, 유응부, 허조, 이개, 유성원, 권자신, 김질
그리고 아버지 성승 등 많은 인물들이 성삼문의 뜻에 동조하게 되었죠
그리고 이들은 은밀히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데
1456년 6월, 세조가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를 열때
별운검으로 선정된 성승과 유응부,
그리고 박쟁, 윤영손 등 여러 무신들이
세조와 의경세자, 한명회, 권남, 신숙주 등을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들을 제거한 다음 명나라 사신에게
단종 복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경태제도
좀 비정상적으로 황위에 올랐던 인물이었던 것인데요
토목의 변으로 인해 정통제가 잡혀가자
정통제의 동생이던 경태제를 황제로 옹립했고
이후 경태제는 형 정통제의 자식이던 조카마저도 내쫓아버린 그런 황제였죠
어찌보면 경태제와 세조의 상황이 비슷하다고 볼수도 있는데
거사를 성공시켰다 하더라도
사신이 모든것을 경태제에게 보고 했을때
경태제가 그것을 인정해줬을것 같지는 않았을것 같다는 추측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정통성 마저도 애매해 질것이니까요
아무튼 거사 당일날 아침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한명회가
많이 덥기도 하고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빼자고 세조에게 제안했고
세조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때 성삼문이 급히 반대했지만 이미 결정은 내려졌죠
그렇게 결국 거사 당일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당시의 일은 생육신의 한명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에 자세하게 나와있는데요
그때 유응부는 그냥 한명회부터 베어버리고 연회장소로 쳐들어가
세조를 죽여버리자고 주장했지만
성삼문은 이것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며 그를 말렸고
결국 거사가 미뤄지게 된 것이라고 되어있죠
그래서 훗날 모두 붙잡혀 국문을 받을때
유응부는 성삼문을 향해 "너는 글을 읽었지만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바 없다!
겁쟁이 선비놈들과 거사를 치른것이 일생일대의 실수다!" 라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소설인 육신전의 내용일뿐
정사인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죠
이후 성삼문을 비롯한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던 사람들은
세조가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인 관가 때
다시 기회를 노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거사에 차질이 생기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걸 본 김질은
그전에 발각될 것이 두려워 장인이던 정창손을 찾아가
성삼문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이들은 곧장 세조에게 찾아가 성삼문을 고발했죠
그리고 곧장 성삼문이 잡혀 들어오게 되고
격분한 세조는 불에 달군 쇠로
성삼문의 온 몸을 지지고 팔을 잘라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성삼문이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전하'라는 호칭 대신 '나으리' 라고 불렀다고 하죠
그러자 세조는 "니가 지금 나를 나으리 라고 하는데
그러면 내가 준 봉록은 왜 받아 먹었느냐?" 라고 묻자
"나으리가 준 것들은 하나도 먹지 않고 우리집에 다 쌓아 놓았으니
그대로 다 들고 가시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조는 신하를 시켜 그의 집으로 가보았더니
그의 말대로 창고에 세조에게 녹봉으로 받았던 쌀이 쌓여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이야기 역시 실록이 아닌
육신전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 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죠
거기다가 성삼문이 신숙주에게 호통을 친 이야기 또한
육신전에만 나오는 이야기 인데요
성삼문이 고문을 당하고 있을때 세조 옆에 신숙주가 서 있자
세종의 고명을 받들지 않은 변절자 라며 소리 쳤다는 일화 입니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은밀히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울때
성삼문이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신숙주에게 호통을 쳤다는 기록은 없는데요
신숙주 말고도 정인지 등 많은 사람들도 세조의 편에 섰지만
성삼문과 비슷한 연배에 같은 집현전 출신이라 그런지
신숙주가 너무 부각되었던 탓에
현재까지도 배신자, 변절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고
빨리 변질하는 숙주나물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썰도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세종이 비록 성삼문과 박팽년, 신숙주 등을 총애하긴 했지만
조선 왕조 실록에는 세종에게 고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물은
황보인과 김종서 그리고 정분 정도 였고 성삼문 등의 이름은 없다고 하죠
게다가 세종이 뻔히 문종이 살아있는데 손자인 단종을 부탁했다는것은
문종이 금방 죽을것을 암시하는 불길한 행동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고명대신들은 거의 정1품이나 종1품 정도 되는 고위관리들이 선정되는데
당시 성삼문은 아직 당상관도 아닌 집현전 직전으로 정4품에 불과했기에
그런 인물에게 고명을 줬다는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죠
어쨌든 성삼문은 결국 뜻을 함께한 동지들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는데요
그는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 함께 공모한 인물들을 말해버렸고
그렇게 모두가 잡혀 들어오게 되죠
심지어 성삼문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마는데
바로 단종 마저 이 일에 연루시켜버린 것입니다
국문을 하던 구치관이 성삼문에게
'상왕(단종)도 너희가 역모를 일으킬것을 알고 있었냐'는 질문에
성삼문이 알고있다 라고 말했던 것이죠
단종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단종은 알지 못했다고 말했어야 하는데
너무 솔직히 다 말해버린것입니다
이 때문에 형식상이나마 상왕의 대접을 받고 있던 단종은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것이죠
어쨌든 성삼문은 이후 아버지 성승과 하위지, 이개 등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져 죽고 말았습니다
거열형에 처해진 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흩어져 조리돌림 당했으며
그의 시신 중 일부를 생육신 중 한명인 김시습이 몰래 수습해
서울 아차고개 남쪽에 묻고 장사 지내줬다고 하죠
그리고 성삼문의 집안도 풍비박산이 나버리는데
아버지 성승과 동생들, 아들들은 모조리 죽임 당했고
성삼문의 집안 여자들은 살아남긴 했지만
모두 공신들의 노비가 되어 버렸죠
그의 아내였던 차산과 딸 효옥은 노비가 되어 박종우에게 분배 되었다고 하는데
20년후인 성종 6년이 되어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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