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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잔반. 돈많은 백성들에게 빌붙어 살고 개무시당하며 살았던 몰락한 양반들

by 사탐과탐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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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많은 백성들에게 빌붙어 살고 개무시당하며 살았던 몰락한 양반들
잔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한번 양반이라고 끝까지 양반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처벌을 받아 평민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노비가 되기도 했죠

 

그게 아닌 다른 이유로 양반이라는 직위를 빼앗길수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3대에 한번은 초시에라도 합격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벼슬에 뜻이 없더라도 양반직을 유지하기 위해선

초시나 향시, 생원시나 진사시 등에 합격했어야

군역과 부역을 면제 받을수 있었죠

 

또 공부가 지지리도 하기 싫은 양반들은

공부를 조금만하고 운동을 해서 무과에 응시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과는 합격할수 있는 가능성이 큰 만큼

천민 빼놓고는 중인이나 양민, 서얼이 모두 몰렸기 때문에

경쟁률은 굉장히 높았다고 하죠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양반이 되었다 하더라도

조선 후기에 가서는 도태되기 시작하는데요

 

바로 극심한 정치적 대립과 붕당 정치의 변질로 인해

권력을 장악한 극소수의 양반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양반들이 몰락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렇게 권력다툼에서 져버린 양반들은 대부분 몰락해버렸고

그외에 다른 양반들도 권력을 잡은 양반들과 어떤 라인이 있지 않은 이상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니면 돈이라도 많아서 뇌물을 바쳐야 관직에 오를수 있는 지경이었죠

 

이때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양반 가문을 권반(權班)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쨌든 정계에서 쫓겨난 양반들은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 중에 고향에 어느정도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어서

양반으로써의 체통을 지킬수 있을만한 양반들을 향반(鄕班)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아무런 경제적 기반도 없고

과거에 오랫동안 급제 하지 못했거나

재산을 탕진한 채 제대로 몰락해버리고

오직 양반이라는 신분만 남아있는 이들을 잔반(殘班)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권반 이외에 대부분의 양반들은 잔반이었죠

 

잔반들은 양반의 체통을 유지하기는 커녕

먹고사는 생계마저 위협받는 어려운 처지였기에

오히려 농민들 보다 더 배고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나마 백성들은 농사라도 짓고 살수 있었지만

잔반들은 농사지을 능력도 백성들보다는 떨어졌던 것이죠

 

하지만 이들도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기에

힘껏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과 별반 다를것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농사도 땅이 있어야 지을수 있었는데

농사지을 땅도 없는 잔반들은 부농(땅이 많은 부유한 농민)이나

부를 많이 축적한 외거 노비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으로 일을 하면서 신분상 역할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죠

 

말그대로 양반이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상민이나 노비에게 갖다바치게 되는것이었기에

이때 지주 농민들이 양반이라고 존댓말이나 해주면

다행인 상황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대동법을 추진해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낸

김육 역시 어릴적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살았을 만큼 궁핍하게 살았고

심지어 생계를 위해 화전민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하죠

 

그리고 농사외에도 자신이 오랜기간 해왔던 글공부를 바탕으로

서당을 차려 훈장을 하거나

백성들에게 어느정도 수수류를 받고 송사의 소송서를 써주기도 하면서

손에 흙 안묻히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할수 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의원이 되거나 약방을 차리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로 따지면 변호사나 약사, 의사, 회계사 등의 일을

잔반들이 했던거라고 볼 수 있죠

 

이런 경우엔 비록 양반으로써 권력은 없지만

사람들에게 개무시 당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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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반이 만약 장사를 한다고 나서면

욕을 먹기도 했는데요

 

조선시대엔 사농공상(士農工商) 이라고해서

학자가 제일이고 그 다음이 농민, 그리고 제일 아래로 상인을 쳤는데

양반 체면에 돈만 밝히는 장사치 짓을 한다는것은

쉽게 시작할 수 있는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몰락한 양반들에게 장사를 할수있는 밑천 조차 없었죠

 

또한 잔반들이 그나마 좀 눈치 안보고 할 수 있었던 일이

바로 돗자리를 짜는일이었습니다

 

왕골(라탄)이나 갈대 같은걸 이용해 바닥에 까는 돗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집안에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잔반들이 굉장히 선호했죠

 

단원 김홍도가 그린 <자리짜기>를 보면

잔반의 어려운 생활상을 그대로 엿볼수 있습니다

 

자리짜기 그림에는 물레질로 실을 뽑는 여자와 돗자리를 짜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 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남자아이가 보이죠

 

여기서 남자가 사방관이라는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 모자는 과거 양반들이 집에서 편하게 있을때

망건 위에 쓰는 관이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것을 보면 이 집안이 양반집이지만

돗자리를 짜면서 먹고 살수밖에 없는 몰락한 양반이라는걸 알수 있죠

 

심지어 글공부를 하는 남자아이는 바지를 입고 있지 않고 있는데요

 

갈아입을 바지가 없을정도로 너무 가난해서

바지를 입지 못한채로 가문을 일으켜보겠다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의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가장 골때리는 잔반은

여전히 생계에 필요한 돈은 벌어오지 않고

오직 양반으로써의 자존심만 남아서

하루종일 글만 읽고 지내는 무능하고 현실력 떨어지는 그런 잔반이었죠

 

이런 잔반들은 최악의 상황이 되면 결국 족보를 팔기도 했는데요

 

재력이 있는 상민들에게 돈을 받고

족보를 위조해 그위 이름을 끼워 넣어 주었던 것이죠

 

이런 모습을 보고 돈많던 양반들은 잔반들에게

양반으로써 체통을 지키지 못한다고 그들과 상종하기 조차 꺼려했고

농민들이나 노비들도 양반이라더니 꼬락서니 우습다면서

개무시를 하는등, 잔반들은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양쪽에서 욕만 엄청 먹었던 것입니다

 

부를 많이 축적한 농민들은 지위도 높이고 많은 노역에서도 빠지기 위해

돈으로 점점 족보를 사 양반 신분으로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렇게 날이 갈수록 양반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인구는 줄어들었죠

 

그러자 국가 재정에도 악영향을 끼쳤으며 국방에도 지장을 줬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상민의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 노비를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점점 신분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죠

 

또한 돈이 많은 지배층과 궁핍한 생활을 하는 농민층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으며

정치 기강의 문란으로 인해 돈으로 관직을 산 탐관오리들에 의해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거기다가 가난에 쪼들리고 빚 독촉에 내몰린 잔반들이나 농민들은

산속 깊은곳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도적떼에 들어가기도 했죠

 

그렇게 조선후기에 지방에 살던 실학자나 지식인들은

대체로 잔반들 이어서 양반 지주들과는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으며

자신은 양반의 신분이었지만 농민들 입장에 설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의식도 점점 높아져

곳곳에서는 지배층의 폭압에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죠

 

농민의 항거 중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인데요

 

몰락 양반인 홍경래가 농민, 상인, 노동자들과 함께

서북지방의 차별과 부패한 권력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일으킨 봉기가 바로 홍경래의 난이었죠

 

홍경래도 양반이었지만 몰락한 집안이었고

농민들과 피지배계층과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에

이런 농민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분제는 훗날 갑오개혁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철폐 되었는데

돈 많은 양반 입장에서는 신분제 철폐가 못마땅했을것 같고

몰락 양반인 잔반 입장에서는 굉장히 환영했을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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