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왕이 죽으면 정말로 어의가 사형당했을까?? 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동안 티비에서 방영된 몇몇 사극들 때문에
조선시대에 왕이 죽으면 그를 담당하던 어의들도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게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인터넷에 떠돌았던 적이 있었죠
하지만 기나긴 조선의 역사 속에서
왕이 승하했을 때 처벌을 받은 어의는 단 4명에 불과했으며
그중에서도 목숨을 잃은 사람은 효종을 담당했던 의원인 신가귀와
정조를 담당했던 어의 심인 뿐이라고 합니다
어의란 궁궐에서 임금과 왕족들을 전담하는 의원을 뜻하는데
한국사에서 기록된 어의들 중 가장 오래된 존재는
삼국시대 신라에 있었던 '공봉의사'라고 합니다
공봉은 왕의 곁에서 일하는 최측근 관직을 뜻하는 것이니
신라 국왕의 바로 곁에 배치된 어의라고 볼 수 있겠죠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은 크게 나누면
문과와 무과 잡과 이렇게 세 종류가 있었는데
그중 잡과 에서 의술과 관련된 의과에 합격하면
국가에 소속된 의원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의과에 합격하면
바로 내의원에서 일할수 있는 것처럼 나오는 경우도 많지만
실제로 내의원은 정원이 20명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의원들은 일반 백성들을 진료하는 혜민서나
빈민들의 진료를 맡았던 활인서에서 일하게 되었죠
지금으로 치면 국립보건소에 근무하는
의료직 공무원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의는 정 3품의 벼슬로 의관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위였는데
단 한 명의 어의만을 뒀던 것은 아니며
두세 명 이상의 어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수많은 의관들 중
겨우 3명만이 어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경력이 많은 의관들 중에서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죠
때문에 어의가 되려면 뛰어난 의술은 물론
왕을 비롯한 윗사람들을 상대하는 처세술과 정치력까지 갖춰야 했습니다
어의가 됐다는 것은 나라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원이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이들은 왕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외에 왕의 명령으로 중요한 신하들을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양녕대군이 학질을 앓고 있을 때 어의를 보내 그를 치료하게 했고
자신의 친척이었던 원주 목사 조박이 아플 때도
어의 어승진과 김지수를 보내 치료를 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죠
왕이 신하에게 어의를 보냈다는 것은
실력이 좋은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임금이 그 사람에게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을 총애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고 합니다
여러 사극에서 임금이 승하하거나 위독한 상황에 처하면
그 책임을 어의에게 뒤집어씌우며 처벌을 하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에
어의만큼 극한직업이 없다는 인식이 퍼져나가기도 했는데요
예를 들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책사였던 종간은
궁예가 독화살을 맞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어의의 멱살을 잡고 만약 궁예가 죽게 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며 협박을 했습니다
이후 정신을 차린 궁예가 계속해서 심한 고통을 느끼자
종간은 결국 부하장수를 시켜 어의를 죽여버렸죠
이런 식으로 사극에서 왕이 죽으면
분노한 신하들의 손에 어의가 죽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도 많은 어의들이 목숨을 잃은 걸로 아시는 분들도 있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왕이 죽었을 때 형식적으로 어의를 처벌하는 척
휴가나 다름없는 유배를 보냈다가 다시 복직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왕이 병에 걸려서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오진을 하거나 치료를 하지 않고 왕을 내버려 둔 게 아닌 이상
어의를 처벌하지는 않았다고 하죠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록을 모두 뒤져봐도
왕이 죽었을 때 어의가 처벌을 받은 경우는 겨우 4건에 불과하며
그중에서도 큰 처벌을 받은 의원은
잘못된 시술을 해서 효종을 죽게 만든 신가귀와
정조시절의 어의 심인 뿐이라고 합니다
명백한 의료사고를 일으켜 효종을 죽인 신가귀조차도
참형이 아닌 교수형을 받으면서
죽은 후 그의 시신을 보전할 수 있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신체를 손상당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선사회에서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신가귀는 그런 처벌을 받을 만도 했던 것이
다른 의관이 말리는 것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시술을 하다가
의료사고를 일으킨 끝에 39세의 젊은 효종을 죽게 만들었기 때문인데요
당시 효종은 머리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신가귀와 유후성이라는 어의들을 불러들였는데
신가귀는 효종에게 종기에 침을 놓아서 피를 빼내는 식으로
독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유후성이 머리에 침을 놓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효종이 신가귀에게 침을 놓으라고 말하면서 결국 치료가 시작되었죠
침을 놓은 후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효종은 이제 정신이 좀 드는 거 같다며 신가귀를 칭찬했지만
수전증이 있었던 신가귀가 놓은 침이
효종의 머리에 있던 동맥을 뚫어버리는 바람에
효종의 머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의관들은 어떻게든 지혈을 해보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효종은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게 되죠
수전증이 있는 의관이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의 머리에 침을 놓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이미 신가귀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이 있었음에도
침을 워낙 잘 놓기로 소문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과거에도 침을 놓아 성공적으로 효종을 치료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효종 또한 신가귀를 믿고 그에게 진료를 맡긴 것이었죠
하지만 결국 신가귀가 실수를 저지르면서 효종이 사망하게 되었고
명백한 의료사고였기 때문에 신가귀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는데요
원래 신가귀는 임금을 죽게 만든 죄로 참형에 처해질 신세였지만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효종이 신가귀에게
침을 놓으라는 명을 내렸던 것을 감안해서
참형에서 교수형으로 형을 낮춰주었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신가귀와 같이 있었던 유후성은
잠깐 유배를 갔다가 현종의 사면을 받아
다시 어의로 복귀를 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를 봐도 명백한 잘못을 했던 것만 아니라면
왕이 죽었다고 해서 어의들을 처벌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 외에 다른 어의들도 임금이 승하하게 되면
염치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다는 뜻에서
스스로 사직을 해버린 경우가 많았고
탄핵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난 경우는 허준을 포함해
여섯 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여섯 건마저도 대부분은 얼마 안 가서 다시 어의로 복직을 했다고 하니
사실상 왕이 죽은 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처벌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왕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건강한 것도 아닌데
모시던 왕이 죽었다는 이유로 무조건 어의를 죽여버렸으면
아무리 유능하고 욕심 많은 의원들이라고 해도
절대 어의 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왕이 죽는다고 해도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사람이나
수많은 왕족들이 아직 남아있는 상황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어의를 죽여버린다는 것은
왕실에 있어서도 큰 손해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어의들도 계속해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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