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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조선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특이한 직업들

by 사탐과탐 2024.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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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특이한 직업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무관리를 등용했던 과거시험은

개인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집안의 운명까지 뒤흔들 수 있는 중요한 시험이었기 때문에

몇십 년은 과거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물론

시험장에서 온갖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하죠

때문에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부정행위를 해주는 직업인 '거벽'까지 생겨났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이 거벽을 비롯해 조선시대에 있었던 특이한 직업들에 대해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제도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면서

나름대로 시험이라는 객관적 평가기준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려 했죠

하지만 '성종실록'과 이수광의 '지봉유설'의 기록에 따르면

모두가 공정하게 시험을 치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데요

 

미리 예상 답안지를 갖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험장안에서 시험지 바꿔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시험시간에 시험장 밖에서 작성한 답안지를 몰래 들여보내거나

시험 감독관을 매수하는 등 온갖 부정행위가 판을 쳤다고 합니다

 

'성호사설'을 썼던 이익은 조선후기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좋은 자리를 잡아주는 '선접군', 답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거벽'

작성된 답지를 깔끔한 글씨체로 바꿔 써주는 서수와 한 팀을 이뤄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과거시험의 답지를 스스로 쓰는 사람은 응시자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죠

그런 부정행위 전문가들 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는 존재가 바로 거벽이었다고 합니다

아예 과거시험의 답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대리시험 전문가였으니까요

 

'정조실록'에 따르면 서울의 '고봉환'과 송도의 '이환룡'

호남의 '이행휘', 호서의 '노긍' 등이 거벽으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영남의 대표적인 거벽인 유광억은

그를 모티브로 한 '유광억전이라는 소설이 나올 정도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유광억은 잘 사는 집안 아들들의 과거시험 답안지를 대신 써줘서

그들을 합격시킨 대가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요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양반가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져갔죠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영남지역의 과거시험장으로 파견된 시험관이

영남의 인재로 유명한 유광억이라는 사람이 시험을 본다는 소식을 듣고는

과거시험에서 그를 장원으로 뽑으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당시 과거시험에는 답안지에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관은 유광억이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답지를 1등으로 뽑은 후

다음으로 잘 쓴 답지를 2등과 3등으로 선정했죠

그런데 막상 확인을 해보니 놀랍게도 1, 2, 3등 모두 유광억의 답안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험관이 조사를 해봤더니 충격적인 결과가 밝혀졌죠

바로 1, 2, 3등 답안지 모두 유광억이 대신 작성을 해줬던 것입니다

이후 시험관은 유광억을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그를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죠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유광억은 서울로 압송될 경우

모진 고문을 받다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소개해드릴 직업은 은밀한 곳에서 위조화폐를 만들어낸 '도주자'입니다

숙종 시절인 1678년 1월 23일부터 상평통보가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일부의 사람들만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화폐를 쓰기 시작했죠

그렇게 화폐의 가치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자

놋그릇등의 물건을 훔쳐 얻은 구리로 동전을 위조하는 도주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초부터 화폐를 위조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는데

동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17세기말부터는

이 위조화폐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하죠

 

숙종은 화폐 위조를 막기 위해서 위조화폐를 만든 사람은 물론

그와 관련된 공범에게까지 큰 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정에서 강력하게 위조화폐를 단속하기 시작하자

도주자들은 한양을 떠나 깊은 산속이나 변방지역으로 숨어들었고

심지어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그 안에서 위조화폐를 만드는 사람까지 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승정원일기를 보면 1724년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선갑도에서

위조화폐를 만드는 현장을 급습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사전에 단속 정보가 새어 나가 버리면서 대부분의 도주자들을 놓쳐버리고

그들이 위조화폐를 만드는데 썼던 3000근의 구리와

2000근의 납 그리고 석탄 200 섬을 발견해서 압수했다고 하네요

 

조선 후기의 문인인 '이옥'이 남긴 '석굴도주'라는 글을 보면

당시 위조화폐를 어떻게 제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하죠

경남 진주에서 지금의 형사들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토포군' 허남은

 

돈을 물 쓰듯 써대는 세명의 여인들을 수상하게 여기고는

은밀히 그녀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는데

얼마 후 그녀들이 도착한 곳은 고성의 어느 동굴이었습니다

허남이 동굴 안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쇠를 녹이는 화로였는데요

그 동굴은 바로 가짜 상평통보를 만드는 도주자들의 아지트였던 것이죠

 

허남은 호통을 치며 감히 법을 어기고 위조화폐를 만드는 그들을 꾸짖었지만

도주자들은 오히려 허남에게 뇌물을 주며 그를 매수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허남이 급히 포교들을 이끌고 돌아왔지만

이미 도주자들은 모두 도망을 친 후였다고 하네요

 

당시의 위조화폐는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동전에 비해

무게도 더 가볍고 품질이 떨어지는 수준이었지만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백성들이 한눈에 그 차이를 알아보기는 어려웠다고 하죠

 

때문에 19세기가 될 때쯤에는 위조화폐가 너무 많아지면서

아예 시장이 마비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증건을 목적으로 만든 당백전이 실패한 것도

바로 위조화폐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다음으로 소개해드릴 직업은 조선시대의 변호사라고 볼 수 있는 '외지부'입니다

조선시대의 소송은 철저하게 문서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 문서의 양식에 맞춰서

한문으로 소송 내용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때문에 백성들이 소송을 하려면 법률과 관련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이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는데

이 과정에서 외지부라는 존재가 생겨나게 된 것인데요

 

외지부 덕분에 힘없는 백성들은 양반을 상대로도 소송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외지부를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외지부들 중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법률지식을 악용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외지부들은 자신들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는

부자들의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은 의뢰인들의 승리를 위해 증거문서를 위조하거나

관아의 실무를 맡았던 서리들을 매수하는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때문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외지부를 두고

백성들을 꼬드겨 소송을 벌이며 법을 악용해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들이라 판단했죠

연산군 시절에는 16명의 외지부를 함경도로 유배 보냈으며

 

성종 때부터는 아예 외지부라는 직업 자체를 불법이라 선언하고는

만약 외지부 노릇을 하다가 발각되면 온 가족을 변방지역으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외지부를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이 세워진 시기까지도 외지부를 하는 사람이 계속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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