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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일제에 의한 조선의 국권 피탈 과정 시간 순서대로 빠르게 보기

by 사탐과탐 2024.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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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시간순으로 정리한 영상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날짜별로 보는 일본의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

 

<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1875년 9월 20일, 일본 해군의 군선 운요호가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방화 등의 공격을 행한 사건인

운요호 사건이 발생합니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이를 빌미 삼아 이듬해인 1876년 2월 27일,

일본은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 외교 대표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죠

 

이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일본이 숨겨놓은 독소 조항을 걸러내지 못했고

결국 개항과 동시에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일방적으로 허용하는 등

국익 침해의 소지가 있는 불평등조약 이었던 것입니다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그러던 1882년 6월 5일, 구식 군인들에게

13개월동안 밀려 있던 급료 중 일부를 지급 했는데,

지급 되었던 것은 양도 채 절반이 되지 않은 쌀이었고,

그마저도 쌀겨와 모래가 섞여있었으며

심지어는 썩은 쌀도 있었죠

 

이로 인해 1882년 7월 23일, 구식군인들은 임오군란을 일으켰고

이후 이 군란을 제압한 청나라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청나라군이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자

민씨정권이 권력을 잡게 되었지만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심한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죠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한편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인해

일본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는 억지를 썼고

양국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은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로인해 일본은 일본공사관에 경비 병력을 주둔시키게 됩니다

 

이때를 시작점으로 한반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점점 더 규모가 커져버리게 되죠

 

그리고 조선에는 일본군과 청나라군까지 주둔하며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그러던 1884년 청프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에 주둔중인 청군 일부가 철수하자

일본의 지원을 받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요

 

이때 명성황후는 청군에게 또다시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벌어진 청군과 정변군,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조선군과 청군 상당수가 사망 또는 부상당했고

일본군은 2명이 전사, 8명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죠

 

그러나 얼마안가 정변군은 청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그런데 문제는 갑신정변때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고 말았는데

일본은 반역을 뒤에서 도와주었으면서

적반하장으로 조선정부에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며

군함을 동원해 무력시위를 했고

그렇게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을 맺게 되었죠

 

한성조약으로 인해 그렇게 일본은 피해를 보상받았으며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을 조선에 계속 주둔시켰고

그동안 청에 밀려 실추되었던 일본의 세력을 회복할수 있었습니다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하지만 갑신정변 이후 정변을 진압해준 청군은

더욱 심하게 조선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까 두려웠는지

갑신정변 당시 청나라군에게 일본인들이 공격을 받은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면서

양국은 협상을 진행하게 되고

1885년 4월 18일 마침내 톈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조약 내용은 바로 조선으로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하고

향후 조선에 출병을 할땐 서로 통지하기로 약속한것이죠

 

이때 사실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894년 7월 23일, 갑오개혁>

한편 1894년 1월, 고부 봉기를 시작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진압을 위해 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죠

 

이때 제물포 조약과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도 조선에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자

조선 조정에서는 동학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은 다음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되었다며 청일 양국에 퇴군을 요구 했으나

청나라와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리고 이후 일본군은 6월 21일 새벽에 기습을 강행해

경복궁을 점령한뒤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1894년 7월 23일, 갑오개혁 추진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친일내각은 서양의 내정 간섭 및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일 양국 맹약을 맺었죠

 

그리고 일본은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했고

거기에 더해 고종의 이름을 빌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모두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청일 양국은 전쟁이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상황이 악화 되었습니다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그러던 중 일본군이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청군을 기습하면서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죠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는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준것 뿐만아니라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하던 입장을 포기하고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게 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 했습니다

 

그리고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땅이던 요동반도를 일본이 빼앗는데 성공했죠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그러자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걸 원하지 않았던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힘을 합쳐 1895년 4월 23일,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했는데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빼앗았던 요동반도를 어쩔수 없이 반환하게 되었죠

 

그러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보다 더 쌔보이는 러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조선 조정내의 친일내각은 서서히 붕괴되어 갔고

이후 친러파가 대두하게 되어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이에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침입한 뒤,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명성황후를

살해해버린 사건인 을미사변을 벌였죠

 

그리고 일본은 다시 친일내각을 구성 한 뒤

을미개혁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그러던 1896년 2월 11일

일본에 의해 감금돼 있던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을 하게 된 사건인 아관파천이 일어났죠

 

그렇게 친일 내각이 몰락하게 되고 친러 내각이 구성되었으며

고종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대한제국을 구상하게 되었죠

 

이후 러시아 제국이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러시아 제국과의 협상에 나서게 됩니다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은 1896년 5월 14일에 있었던

베베르-고무라 각서의 체결로 인해

어쩔수 없이 한반도에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인정할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킬수 있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또한 약 한달후인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는데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했으며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서로 약속하게 됩니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죠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한편 러시아와 일본은 협상이 계속되었는데

서로 간에 대한제국의 내정 간섭을 하지 않고

대한제국에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 할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그리고 한일 양국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하지 않을것을 약속하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시간이흘러 1904년 초

대한제국을 병합하려는 일본과

여순 대련항을 조차받고 만주에 주둔하던 러시아는

만주와 대한제국을 두고 협상을 벌이며

양국 사이는 긴장감이 감돌았죠

 

자칫 잘못하면 러일전쟁이 터질것같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여 양국 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원산과 거제에 해군을 주둔시켰죠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그리고 불과 약 20일후인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동시에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면서

러시아 공사는 서울을 떠났으며

이후 일본군은 경운궁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대한제국 침략의 발톱을 완전히 드러내게 되는데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이후 일본은 막대한 뇌물을 외부대신이던 이지용에게 건네고 그를 매수한 이후

1904년 2월 23일, 어떤 협약을 맺게 되는데,

이는 한일의정서라는 이름으로 발표 되었죠

 

그중 제 4조에는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 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일본은 대한제국의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했고

통신기관도 군용으로 강제 접수했으며

철도부설권도 넘겨 받게 됩니다

 

이는 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의 주권을 개무시하고 자행한

제국주의적 침탈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일본은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내정 간섭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1904년 5월 31일,

대한제국으로 와서 대한제국의 실정을 널리 검토한뒤

일제의 이권을 더욱 강화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하기 위해

6개항의 구체적인 방침을 적은 문서인 대한시설강령을

일본 정부에 건의하게 되었죠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이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인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을 맺게 되는데

이는 일본인 고문을 두어 재무에 관한 사항은 그에게 맡기고

일본이 추천한 외국인 외교 고문 1명을 고용해

외교에 관련한 사항은 그에게 모두 맡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그리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신사업이 부실하다면서

일본에 위탁할 것을 요구했고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에 의해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을 빼앗아 갔으며

이는 한국의 부당한 현실을 외국에 알리기위한 통로를

사전에 차단하는 방도였던 것이죠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그리고 4월 16일에는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를 해산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인원을 감축시켜버렸습니다.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또한 1905년 7월 29일 일본은 미국과 밀약을 맺었는데

밀약의 목적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식민 지배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 지배하는데에

토달지 않기로 합의를 봤던 것이죠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그리고 1905년 9월 5일, 미국의 중재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간의 회담이 진행되었고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은 사실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그렇게 러시아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죠

 

이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도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1905년 11월 17일, 마침내 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는데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하면서

이로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되고 말았죠

 

이때부터 거리낄게 없어진 일본의 국권 침탈 야욕은

가속화 되기 시작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907년 7월 19일, 고종 황제 퇴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각국에 친서를 보내는 한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무효를 호소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7월 19일

고종을 협박해 강제로 퇴위시켜버렸고

그렇게 순종이 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죠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그리고 불과 5일후인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이완용의 전권을 이용해

대한제국의 국권을 장악할수 있는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조약이 바로 제3차 한일협약인 정미7조약 입니다

 

이 조약의 주된 내용은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하고

거의 모든일은 통감의 승인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내정은 일본의 통감부가 전부 맡겠다는 의미였는데요

 

사실상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속령에 준하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린것이었죠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그리고 약 일주일후인 1907년 8월 1일

일본은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9월까지 진위대까지 해산시켜 버렸는데

이에 반발한 대한제국군은 정미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대항했지만

결국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고

그렇게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또한 1909년 7월 12일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 행정권까지 박탈해 버리는 협약을 맺게 되었죠

 

이 기유각서에 의해 대한제국의 사법부와 재판소는 폐지 되고

모든건 통감부에 이관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법권을 빼앗자 일본은 특별법을 만들어

철저하게 항일지사들의 투쟁을 억압하기 시작했죠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한편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이후 전국각지에서 활발히 활동중이던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는데요

 

이에 일본은 9월 1일부터 시작되어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있던 의병 세력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이를 남한 대토벌 작전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로 인해 수많은 의병들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 국내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은 사라졌으며

그렇게 독립군들이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게 된것이죠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그러던 1910년 6월 24일에는 한일약정각서를 체결하면서

국권을 제외하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경찰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헌병은 군사경찰 뿐만 아니라 사법경찰 일까지 겸하게 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그런 막강한 권한은 훗날 독립운동가와 의병 체포

그리고 탄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지면서

대한제국 멸망하게 됩니다

 

이를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 또는 수치'라는 의미로

경술국치라고 말하죠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은 약 35년간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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