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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공녀. 과거 중국 땅으로 억지로 끌려갔던 여인들

by 사탐과탐 2021.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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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명나라 때의 황제들은 우리 고려나 조선에게 공녀와 내시들을 차출해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에 가족들과 생이별하며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했던 너무나도 불쌍한 공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408년 태종은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명나라 사신으로부터 공녀를 데려오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조선 조정에서는 임시 기관인 진헌색을 설치하고 공녀로 보낼 나이 어린 처녀들을 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최종으로 선발된 5명의 공녀들은 명나라로 끌려가게 되었죠.

 

그 이후로도 명나라 영락제와 선덕제 때 7차례에 걸쳐 114명의 조선인 여자가 공녀가 되어 명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명나라에 더 예쁘고 더 많은 여자가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먼 조선에까지 와서 공녀를 바치라고 했던 것일까요?

 

공녀를 차출해간 제일 큰 목적은 궁녀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대부분의 공녀들은 명나라에 가서 궁녀가 되었죠.

또한 공녀와 같이 내시들도 굉장히 많이 끌려갔었습니다.

내시들 역시 궁에서 환관으로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실 조선이든 명나라든 대부분의 백성들의 여성들은 궁녀가 되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래서 궁녀를 뽑는 거 자체도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죠.

왜냐하면 궁녀가 되면 사실상 노예나 다름이 없이 주구장창 일만 했고 평생을 결혼도 못 하고 혼자 살아야 했으며 주어진 업무 또한 중노동의 일이었죠.

 

또한 궁녀가 된 후에도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잃기 일쑤였고 어쩌다 왕의 승은을 입는 궁녀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될 확률은 굉장히 낮았으며 대부분의 궁녀들은 평생토록 왕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궁에서 죽어라 일만 해야 했습니다.

다만 궁녀가 되면 의식주는 해결이 되었는데 진짜 찢어지게 가난해서 이러다 다 굶어죽게 생긴 집에서는 입이라도 하나 줄여볼 심산으로 딸을 궁으로 보내는게 대부분이었죠.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 저항을 받을 수도 있고 골치 아픈 궁녀 뽑는 일을 조선에 떠넘긴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조선에서는 조선에서 필요한 궁녀들도 뽑아야 했고 가끔 명나라의 궁녀도 뽑아야 했으니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었죠.

 

조선에서도 궁녀가 하기 싫은데 먼 명나라까지 가서 궁녀를 하라고 하니 당연히 그 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한 공녀로 차출되기라도 한다면 평생을 부모, 형제와 헤어져 머나먼 이국땅까지 끌려가 언어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과 살면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건 바보 아닌 이상 하기 싫었겠죠.

그래서 사신이 올 때면 사람들은 딸을 얼른 아무 남자랑 결혼시켜버리거나 몹쓸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고 딸을 어디론가로 숨기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고려시대에는 공녀를 징발해가는 경우가 잦다 보니 딸이 태어나면 딸을 낳았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기도 했으며 딸의 머리를 깎아버리기까지 했죠.

그만큼 공녀로 징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으며 공녀 선발을 피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공녀로 차출된 여성이 신세를 비관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허다했죠.

 

대다수의 공녀들은 백성들에게서 차출이 되었지만 양반들의 딸들을 포함시켜서 공녀를 보내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귀족 가문의 딸들도 공녀로 끌려가곤 했습니다.

어쩌다 공녀로 끌려간 여자가 높은 관직에 있는 관리의 첩이 될 때도 있고 황제의 후궁이 되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굉장히 드문 일이었죠.

 

그렇게 1408년 태종이 처음으로 명나라로 공녀를 보냈고 이후 3차례에 걸쳐 40명의 공녀가 더 명나라로 떠났습니다.

또한 세종 때는 4차례에 걸쳐 74명의 공녀를 더 보내기도 했죠.

하지만 더 어이없는 것은 공녀로 뽑힌 귀족 집 여성이 있으면 그 여성을 모실 여종들도 같이 보내졌습니다.

 

조선시대엔 양반 가문에서 공녀로 차출된 처녀는 16명 밖에 없었지만 그 처녀들을 모실 여종이 48명이나 되어 함께 명나라로 보내졌고 궁에서 술을 담그거나 젓갈, 두부 등을 만드는 집찬녀 42명, 황제를 위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가무녀 8명까지 가게 되었죠.

 

명나라 황제 중에서 특히 영락제는 상냥하고 예쁘다는 이유로 조선의 여자들을 좋아했는데요.

그래서인지 영락제 통치기 동안 사신을 여러 번 보내 공녀를 데려오도록 했었습니다.

 

1407년 영락제의 본처인 인효서황후가 사망했고 다음 해에 명나라에 공녀가 바쳐졌는데 그중 권씨라고 하는 공녀는 영락제가 매우 총애해 현인비에 봉해졌고 명나라 역사서 <명사 후비전>에 기록된 유일한 조선 여성이기도 하죠.

 

그러나 공녀를 요구하는 것이 더 심했던 건 고려시대 때 원나라 간섭기인데요.

 

(드라마 기황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초에 이르기까지 80여 년 동안 기록된 것만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문'에 따르면 공녀를 많이 데려갈 때는 한 번에 40∼50명이나 된다고 했으니 고려시대 억지로 끌려간 공녀들의 수는 2천 명이 넘었을 것으로 보고 있죠.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에 따른 것일 뿐이고 비공식적으로 원나라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공녀를 차출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그 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원나라의 사신이 한 번에 500여 명의 공녀를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죠.

공녀들 대부분은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평생 돌아오지 못한 채 궁녀나 노비가 되어 죽을 때까지 궂은일을 하며 보냈고 어쩔 때는 황제가 죽으면 같이 순장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공녀들은 평민들의 집안에서 차출되었으며 고려 귀족의 여성들 또한 차출되기도 했지만 귀족 여성들의 경우 그에 맞게 원나라 귀족 집안으로 시집을 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건 지극히 드문 일이었고 또한 기황후 같이 공녀로 원나라로 가서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에서 황후가 된 경우도 있긴 했었죠.

덕분에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은 동생의 권력을 등에 업고 고려에서 권세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출세를 하기 위해 일부러 딸이나 여동생을 공녀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죠.

 

(드라마 기황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녀들과 내시들은 원나라에 고려의 풍습을 전파시키기도 했습니다.

고려의 옷이나 신발, 모자 등의 복식과 만두와 약과, 떡 등의 음식, 고려청자와 나전칠기, 고려의 종이와 먹 등의 고려 고유의 문화는 급속도로 원나라에 전파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고려양이라 불렀죠.

 

고려 충렬왕 때부터 조선 세종 때까지 있었던 공녀를 요구한 일은 세종이 직접 명나라에 요청해서 결국에는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다 조선 중종 때 다시 나타나기도 했지만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죠.

 

공녀라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이곡이 원나라 인종에게 올린 공녀 폐지 상소문을 보면 그 폐해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사신이 오면 나라 전체가 소란스러워 닭이나 개까지도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처녀를 모아놓고 선별을 하고 먼저 사신에게 바쳐서 욕심을 채워주면 그 여자가 미인이더라도 놓아주고 다른 여자를 찾습니다.

한 여자를 데려갈 때마다 수백 집을 뒤지는데 오직 사신이 하자는 대로 할 뿐이요.
황제의 명이라 아무도 거역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1년에 한두 번이나 2년에 한번 있는데 그 수효가 많을 때 4, 50명에 이르렀습니다.

선발이 된 처녀의 부모나 일가친척은 서로 모여 통곡하여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으며 국문(國門)에서 송별하는 곳에 이르러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근심 걱정에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습니다.

 

라는 가슴 아픈 내용이 수없이 적혀있는 내용의 상소문이었습니다.

 

백성들과 그들의 재산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가가 그러지 못하고 백성들을 사지로 내몬 정말 가슴 아픈 역사네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 공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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