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문종,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 남편 정종, 동생 단종까지 모두 죽고 혼자 외롭게 남아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경혜공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단종은 숙부이던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 유배를 가서 결국 죽음을 맞이했는데
경혜공주 또한 수양대군 때문에 너무나 힘들고 비참한 삶을 살다 간 인물이죠.
그녀의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 입니다.
아버지인 문종이 아직 세자 시절에 어머니인 양원 권씨는 세자의 승휘(세자의 후궁)였는데 그때 낳았던 아이가 바로 경혜공주였죠.
순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한 일로 인해 폐위되고 세자빈 자리가 공석이 되자 세종은
양원 권씨가 세자의 딸을 낳았으니 나중에 아들도 낳지 않겠는가?
그러니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해야겠다.
라고 해서 세자빈 자리를 권씨가 꿰차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든 딸인 셈이죠.
그렇게 어머니가 세자빈이 되고 나서 그녀는 평창군주(세자의 딸)가 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어머니 세자빈 권씨는 1441년 동생인 단종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경혜공주와 단종 남매에게 아버지인 문종은 더 애틋해 했고 더 많은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남부럽지 않게 자란 경혜공주는 16세가 되자 혼사가 결정되었고 정종과 결혼을 하게 되었죠.
이후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경혜공주로 봉작 되었습니다.
문종은 공주의 집을 마련해 준다고 궁 근처인 현재의 북촌에 민가 30여 채를 허물고 저택을 크게 지어 줬는데 가여운 딸을 위해서 이기도 했고 홀로 남겨진 단종과 가까운 곳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하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종은 즉위 후에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놀다 가거나 자고 가는 걸 좋아했는데 살벌한 궁내보다 엄마 같은 누나의 집이 어린 단종에게는 더 편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경혜공주는 별문제 없이 평범한 공주처럼 천수를 누리다 삶을 마감할 줄 알았지만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른지 불과 2년 만에 승하하고 어린 남동생 단종이 즉위하고 나서 이 남매의 삶은 폭풍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결국 숙부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고 단종은 계유정난 당시에도 경혜공주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은 경혜공주의 저택으로 군사를 보내 단종의 신변을 확보하게 되었죠.
그렇게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고 난 후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과 여러 대군들은 역모로 몰려 죽거나 귀양 보내졌고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 또한 처남이던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유배를 가게 되었죠.
그리고 얼마 안 가 대신들은 단종에게 양위를 하라며 협박했는데 이에 못이긴 단종은 1455년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수양대군은 세조로 보위에 올랐습니다.
숙부에게 동생이 왕위를 빼앗기고, 남편은 유배를 보내져 버리니 경혜공주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죠.
그녀는 세조에게 분노와 증오의 마음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리고 경혜공주는 '중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라는 말을 세조에게 전하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우리 남편 안 풀어주면 확 죽어버린다?'라는 반협박이었죠.
안 그래도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 민심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혹시나 경혜공주가 죽기라도 한다면 조카를 죽게 했다는 비난을 그대로 받게 될 것을 염려한 세조는 얼른 좋은 약과 어의를 그녀에게 보내주었고 남편 정종의 유배지도 강원도 영월에서 경기도 양평으로 옮겨주었죠.
세조에게 양위를 한 단종도 그 소식을 듣고 누나가 자결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 세조에게 정종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에 세조는 정종을 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경혜공주의 협박이 잘 통했던 것이죠.
정종이 유배지에서 돌아오자 더 이상 꾀병 부릴 필요가 없었던 경혜공주는 병석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이는 또 다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정종은 형 집행정지 상태였기 때문에 경혜공주가 다 나았으니 정종을 다시 유배 보내야 한다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는 밤낮으로 세조에게 상소문을 올렸고 이에 세조는 정종을 수원으로 유배를 보내는 동시에 경혜공주도 남편을 따라 유배지로 가는 것을 허락했죠.
정종도 처벌하는 동시에 또 경혜공주가 협박할까 두려웠던 세조는 그녀 또한 같이 보냄으로써 골치 아파질 수 있는 일 또한 같이 처리해버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종의 처벌이 약하다는 삼사의 상소가 또다시 빗발쳤고 다시 정종의 유배지를 수원에서 통진으로 바꾸게 되었죠.
그렇게 21살 밖에 안되었던 경혜공주는 남편의 유배지인 통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천만다행인 점은 경혜공주는 죄인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배지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여러 종을 거느리며 그나마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들의 평화로운 나날도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세조 2년인 1456년 6월 1일. 사육신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죠.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 사육신으로 불리던 인물들이 세조에게 발각되어 모조리 잡혀오게 되었고 심문을 하는 과정에서 성삼문이 단종도 이 모든 계획을 알고 있다고 말해버렸습니다.
이 말을 빌미로 세조와 그 측근들은 단종을 복위 시키려고 의심되는 사람들과 세력들 모두
싹을 밟아버리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중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과 동생 단종도 포함되어 있었죠.
이에 유배 중이던 정종의 종들은 모두 지방의 관노로 쫓겨나게 되었고 정종은 전 재산을 몰수 당했으며 그의 유배지 또한 경기도 통진에서 전라도 광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점점 동생 단종과의 거리가 멀어지며 생이별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그녀는 전라도 광주까지 남편을 따라가게 되었고 동생인 단종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내졌죠.
그렇게 헤어진 경혜공주와 단종은 살아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광주로 간 경혜공주와 정종은 심한 감시를 받게 되죠.
또한 시종도 겨우 여종 3명만 주어졌고 담장도 높게 쳐졌으며 감시를 하는 병사수도 통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다 1457년 10월이 되었고 동생 단종은 유배지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정종과 경혜공주에 대한 감시는 더 심해졌죠.
동생이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경혜공주는 가슴이 찢어질듯한 슬픔에 잠겼으며 정종은 분노에 사로잡혀 세조 욕을 해댔죠.
하지만 정종의 세조에 대한 욕지껄이는 결국 세조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또한 승려 성탄등과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정종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로 "어서 죽여주시오" 라고 했죠.
그리고 그 또한 반역죄로 거열형에 처해져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신도 수습되지 않아서 현재 그의 묘 또한 없다고 하죠.
아버지 문종이 죽고 나서 얼마 안 가 동생이 왕위를 빼앗기고, 남편은 유배를 가게 되어 자신도 이리저리 남편 유배지를 따라다니며 비참한 삶을 살다가 한순간에 동생과 남편 모두 잃게 된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들이 한 번에 경혜공주에게 들이닥친 것이죠.
더 슬픈 점은 남편이 거열형을 당할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고 난 후 전 재산을 몰수당한 경혜공주는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게 되었는데 이를 불쌍하게 여긴 세조는 훗날 그녀에게 집도 주고 재산과 노비를 보내주기도 했죠.
그리고 그녀의 아들 정미수는 세조의 아내이던 정희왕후가 궁으로 데려와 키웠는데 자신의 유모였던 백어리니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왕을 용서해야 한다"라고 조언을 했기에 자식을 궁으로 보내고 자신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차마 원수인 세조와 같이 궁에서 살 수는 없었던 것이겠죠.
그때 자신의 유모였던 백어리니는 훗날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의 유모였는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이 자을산군과 같이 자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세조가 죽고 예종도 세상을 떠난 뒤 성종이 왕위에 오르고 아들 정미수는 돈녕부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죄인 정종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미수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성종은 모든 상소를 물리치며 정미수를 파직하지 않았고 세조의 업보를 씻고 싶어 하던 정희왕후 역시 정미수를 보살펴 주었죠.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혜공주도 이제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는지 아들 정미수가 벼슬을 하고 수개월이 지나고 나서 39세의 나이로 그녀의 비극적인 삶도 끝을 맺었습니다.
현재 경혜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자리 잡고 있고 그녀의 묘 옆에 작은 봉분이 있는데 그것은 남편 정종의 가묘라고 하죠.
죽어서도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밖에 없던 남동생도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으며 자신 또한 공주의 신분에 굴곡지고 한 많은 삶을 살았던 경혜공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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