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기생. 우리들이 몰랐던 기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

by 사탐과탐 2021. 8. 7.
반응형
현재는 기생의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 못하지만 조선시대의 기생은 나라에서 매우 체계적인 관리하에 키워졌었습니다.
우리들이 몰랐던 기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다루어보았습니다.

 

 

조선시대 기생을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흔히들 웃음과 노래를 팔고 가끔 몸까지 파는 그런 여자들을 기생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사극에서 자주 나온 간드러지는 말투로 남정네들의 심금을 울렸던 느낌의 기생은 사실 일부의 기생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기생은 일제에 의해 매춘부 취급을 받게 되었는데 현재 '기생 = 매춘부'라는 인식은 이 일제강점기와 현재 사극들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죠.

 

하지만 조선시대의 매춘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들병이는 들병에 술을 담아 떠돌다 다니며 술도 팔고 몸도 팔고 하는 여자들이었고 화랑유녀는 절 주변에서 매춘을 하는 여자였으며 작부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여자들을 말했죠.

 

이와 같이 기생이 몸을 파는 매춘부가 아니라 몸을 파는 여자들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생의 신분은 제일 낮은 신분인 천민이었죠.

하지만 운 좋게 부자인 양인이나 양반의 첩이 되면 돈을 사용해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우도 있긴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기생은 관아에 등록이 된 기생만이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기생들의 명단인 '기적 (妓籍)' 에 이름이 한번 오르면 신분은 천민이 되었죠.

그래서 혹시나 기생이 자식을 낳더라도 천민 신분은 대물림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생활수준은 중산층 이상으로 잘 먹고 잘 살았죠.

그들은 천민이었지만 교양과 기품이 있는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재능과 성격, 인품 등 엄격한 교육을 거쳐 프로 기생을 양성했고 기생을 일종의 제도와 같이 정착시켰으며 나라에서 직접 기생들을 관리, 감독했죠.

 

그들은 장악원에 들어가서 몇 년 동안 고도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기생들의 교육을 맡은 사람들은 은퇴한 퇴기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선배로부터 기본적인 춤과 노래, 악기나 서화, 시조 등을 배웠으며 높은 관리를 대할 때 필요한 예의나 고상한 말투와 행동도 배웠죠.

어린 기생은 춘화를 보며 성교육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교육을 거쳐 프로 기생이 되면 궁이나 관아 같은 곳에서 열리는 잔치에서 각종 춤과 노래를 하며 흥을 돋우었고 이 일 외에도 백성들이나 마을에서 벌이는 각종 잔치 등에도 참여했죠.

게다가 그들은 장악원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춤과 노래들을 민간으로 퍼트려 문화나 예술에도 기여를 많이 하기도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 현재까지 전승되는 전통예술의 상당수는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전통 예술을 가르치고 후대로 이어지게 만드는 역할도 겸했죠.

높은 수준의 기생들 때문에 양반들은 '기방오불'이라고 하는 '양반들이 기방에 가서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를 정해놓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기생은 돈이 필요한 처지이니 손님들 기분을 맞춰주고 돈을 뜯어내는 일은 흔했기 때문에 기생과의 약속을 믿지 말고 기생 앞에서 어설프게 시를 짓고 문자를 읊다가 개쪽을 당하거나 정말 문자를 잘 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 앞에서는 지 잘난 척만 하는 꼴이니 이러나저러나 본전도 못 뽑을 확률이 높으니까 문자를 읊고 자랑하지 말 것도 오불에 있었죠.

 

또한 기생들을 말하는 꽃이라는 뜻의 해어화 라고 부르는데 이 꽃으로 비유되는 기생들에게 꽃을 선물하는 건 이들을 우롱하는 것이라 여겨 꽃을 선물하는 것도 안되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아내를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의 가문의 열녀를 자랑하지 않는 것.

이 다섯 가지가 기방 오불이었죠.

 

이 기방오불 중 두 번째를 보면 웬만한 양반들도 기생들 앞에서 글 좀 쓰고 문장 좀 한다고 거들먹거릴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근데 정말 의아한 점은 기생이 머무는 곳인 기방에는 원래 양반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풍류를 즐기거나 잔치 때는 기생들을 양반이 노는 곳에 불러올 수는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일부 지체 높으신 양반들과 왕족들은 기방에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조선 후기에는 중인과 평민들도 돈만 있으면 기방에 갈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기생들은 매우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해지기도 했는데요.

명나라나 청나라의 사신이나 관리들이 조선으로 올 때면 밤에 그들의 침소로 기생을 들여보내 접대하게 하는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반계수록>에는 “오늘날 관아에서 창기를 길러 사객(使客)이 오면 그들을 접대하게 했는데, 이들을 방기(房妓)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관아에서 사신들 접대를 위한 창기를 양성했음을 알 수 있죠.

또한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난 후 청나라의 사신들은 과도하게 기생들과의 잠자리를 요구했는데 이에 열받은 기생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저항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기생을 일, 이, 삼패로 나누었는데요.

 

일패 기생은 궁에서 행하는 잔치에 불려가 왕의 앞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기생이었습니다.

그만큼 박학다식하며 교양과 기품이 있는 기생들이 일패 기생이 되었고 이들은 각자 집과 굉장한 재산도 가지고 있었으며 결혼을 하기도 했죠.

또한 양반들조차 웬만큼 높은 사람 아니고서는 일패 기생을 불러 놀 수조차 없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패 기생은 관기와 민기로 나뉘는데 관기는 높은 벼슬을 가진 양반들을 상대했고 민기는 일반 양반을 상대했다고 하죠.

원칙적으로는 매춘은 금지였지만 높은 벼슬의 양반 첩으로 들어가길 원하던 기생들은 암암리에 매춘이나 양반과의 잠자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삼패 기생은 일반 평민을 상대하는 기생인데요.

그들은 노래와 춤도 팔았지만 몸을 팔기도 했다고 하죠.

'기생 = 매춘부' 라는 이미지 또한 삼패 기생 때문에 생겼다고 보면 되는데요.

그렇다 보니 나중에는 몸을 파는 기생들을 "창기" 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고 하죠.

그들이 상대한 손님은 주로 양반 집안의 한량 자식이나 돈 많은 중인이나 양민들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관기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함께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생이라는 직업은 먹고살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갔죠.

1908년이 되자 일제는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공포하면서 춤과 노래를 하는 '기생'과 몸을 파는 '창기'로 구분 짓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기방을 열기 위해서는 경찰청에 신고 후 허가증을 받아야 영업이 가능했으며 경찰청의 지시에 따라 조합을 설립해야 한다고 규정했죠.

이때 탄생한 기생조합은 상업공간 같은 곳에서 기생을 부르면 그곳으로 기생들이 출장을 가서 춤과 노래를 하고 다하고 나서 수수료를 받거나 시간당 돈을 받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많은 일본인들이 유명한 기생들의 화보집이나 엽서 등을 팔아 많은 돈을 벌기도 했죠.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전통 춤과 노래를 하는 기생 제도와 기생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매춘을 하는 창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로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조선시대의 프로 예능인이던 '기생'은 거의 다 없어졌고 그나마 굉장히 유명했던 기생 몇몇만이 해방 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통 예술을 계승하고 있었죠.

그러나 고급 음식점이던 요정에서는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나 특권층을 상대로 기생과 비슷한 식의 춤과 노래도 하기도 했고 심지어 매춘 행위를 하기도 했으며 1970년대에는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매춘 관광인 기생 관광을 하러 온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이러한 일들은 조선시대 기생들이 하던 풍류를 제공하거나 춤과 노래 등 예술 활동을 하던 것과는 다르게 매춘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조선시대 '기생' 과는 거리가 멀죠.

비록 천민이라는 신분이었지만 춤과 노래는 따라올 자가 없었고 양반 뺨치는 굉장히 높은 학식까지 겸비했던 조선시대 '기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