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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궁녀의 대식. 조선시대 궁녀들의 은밀한 동성연애와 비밀리에 행해져온 성욕 해소법

by 사탐과탐 2021.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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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궁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제약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더욱이 왕에게 승은을 입지 못한 궁녀는 평생을 남자 없이 외롭게 지내야 했죠.
그래서 궁녀들은 흔히 '대식' 이라 불리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성욕을 해소합니다.
과연 보는 이가 많은 궁 내에서 어떻게 성욕을 해소한 것일까요?

 

 

조선시대 모든 궁녀들은 왕의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왕은 모든 궁녀들과 잠자리를 가질 수는 없었죠.

수많은 궁녀 중 선택된 여인만이 왕과 잠자리를 할 수 있었고 그렇게 승은을 입은 궁녀는 특별상궁이 되거나 아니면 직첩을 받아 신분이 수직 상승하기도 했습니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 또한 무수리로 궁에서 뼈 빠지게 일하다 숙종의 눈에 들어 정1품 빈으로 봉해진 것이죠.

그렇게 신분 상승을 노리고 궁으로 들어오는 궁녀들도 많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주로 10살 정도의 여자아이들이 궁녀가 되기 위해 궁에 들어와 앵무새 피를 팔뚝에 떨어트려 처녀를 감별하는 앵무새 처녀 감별법을 통해 생각시가 되었는데요.

팔뚝에 앵무새 피를 떨어트려 흐르지 않으면 처녀,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여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별된 여자아이들은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죠.

 

그렇게 입궁한 생각시들은 10년이 지난 후 별도의 시험을 거쳐 정식 궁녀인 나인이 되었습니다.

10세 전후의 어릴 때부터 궁녀가 되어 궁에서 산 여자들은 연애라고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고 왕의 여인이다 보니 궁녀를 탐내는 남자들 또한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하는데요.

그렇다 보니 평생을 남자와 뜨밤 한번 보내지 못하고 죽는 궁녀가 더 많았죠.

 

그리고 궁녀들은 어쩌다 남자와 눈만 맞아도 잘못 걸리면 극형을 피할 수는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상대 남자도 무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권력 다툼에서 반대파를 몰아내야 할 때는 궁녀를 엮어서 상대를 공격하기도 했었죠.

또한 궁녀는 물론이고 궁에서 일하는 무수리나 방자들 또한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젊고 혈기왕성한 궁녀들의 본능에 충실한 성욕은 극형이나 법도 막을 수는 없었죠.

그래서 일부 성욕이 강한 궁녀들은 몰래 궁을 나와 고관대작들과 뜨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현종 때는 궁녀 귀열이 자신의 형부인 서리 이흥윤과 몰래 간통하다 임신까지 해버렸고 이 사건이 발각되자 아기를 낳고 나서 곧바로 둘 다 극형에 처해져 죽는 사건도 있었죠.

 

그리고 궁녀들은 마음대로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요.

궁 밖을 나가려면 일단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고 그다음 자신의 담당 상궁에게 허락을 받아야 됐으며 그리고 담당 환관에게도 재차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궁 밖으로 외출이 가능할 정도로 굉장히 절차가 까다로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쉽게 만나지도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밖에서 애정 상대를 찾기보다는 궁 내에서 찾는 게 훨씬 더 수월했죠.

그래서 궁녀들은 쉽게 만날 수도 있고 심지어 일도 같이 하고, 잠도 같이 자던 궁녀와 동성애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런 궁녀들의 동성애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기록되었고 이러한 행위를 '대식(對食)' 이라고 불렸습니다.

 

대식의 뜻은 '서로 대면해서 식사를 같이한다' 정도인데요.

궁녀들 사이에서의 '같이 밥 먹다'의 뜻 이외에도 동성애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했죠.

나중에는 궁녀와 내시가 부부관계를 맺기도 했는데 그 또한 대식 관계라 불렸습니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는 궁녀들이 비구니나 과부들과도 궁 안팎에서 성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같이 성관계를 맺은 궁녀들은 둘의 관계에 대한 표식으로 서로의 몸 어딘가에 친구 또는 벗을 뜻하는 '붕(朋)'자를 문신으로 새겼다고도 하죠.

 

이 대식이라는 단어는 옛날 중국의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에도 기록되어 있는데요.

거기에는 대식을 '궁녀 둘이 서로 부부가 되는 것을 대식이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나중에는 궁녀와 내시의 성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발전했다고 적혀있죠.

그러나 성에 엄격한 유교 사회였던 조선의 조정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서로 다른 곳에서 일하는 궁녀 둘을 한방에서 살게 하기도 했죠.

 

예를 들면 수라간 나인과 침방 나인을 같은 숙소에서 살게 한 것인데 같은 곳에 일하는 궁녀들끼리는 일할 때나 잘 때나 늘 같이 붙어있으면 둘이서 동성연애를 할 가능성이 높으니 동성애를 하기 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식 행위를 하다 적발시엔 강한 처벌을 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조선의 법전인 <속대전>에 의하면

궁녀가 밖에서 사람과 간통하면 남녀는 모두 즉시 참수한다.
임신한 자는 출산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하는데 출산 이후 100일을 기다렸다가 집행하는 예를 따르지 않고 즉시 집행한다.

 

라고 적혀있고 연산군일기 기록에 의하면 동성애를 하다 걸린 궁녀 둘은 의금부에 보내져 법을 어겨 친구를 사귀었다 라는 뜻의 '위법교’(違法交朋) 이라는 글자를 가슴에 새겼다고 합니다.

 

세종 때에도 이러한 대식 관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궁녀 내은이와 내시 손생은 서로 동성애는 아니었지만 서로 부부관계 비스무리한 대식 관계였죠.

내은이가 임금이 쓰던 옥관자를 훔쳐 손생에게 부부의 증표로 주었는데 금세 둘 사이는 들통나게 되었고 둘 다 참형에 처해져 죽기도 했죠.

 

어릴 적부터 궁에 들어와 왕 이외에는 여자밖에 없는 곳에서 고립되어 살며 남자의 손길 한번 못 받아보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궁녀들은 어쩔 수 없이 같은 궁녀들이나 내시들과 찐한 연애를 하는 수밖에 없었던 거 같기도 하네요.

조선시대 궁녀의 대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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