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짓던 황족이 다시 한나라를 일으키고 심지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 된 인물 광무제 유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한나라는 유방이 세운 나라 이며 중국이라는 큰 땅덩어리를 두번째로 통일한 나라 인데요
이 한나라의 역사는 왕망이라는 인물에 의해 중간에 한번 쪼개지게 됩니다
바로 전한과 후한으로 나뉘어 지게 된것인데 가운데 시기에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들어가게 되죠
그런데 이 신나라는 건국된지 고작 15년만에 사라지게 되는데요
이 신나라는 전세계 전쟁 역사상 전무후무하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한사람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죠
이 한사람은 바로 '유수' 라는 인물입니다
유수는 사실 광무제라고 더 많이 불리고 있는데 이 인물이 바로 후한을 세운 사람이죠
유수는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 중 한명으로 당나라의 태종, 청나라의 강희제와 더불어 중국의 3대 명군으로 불리고 있는데 오늘은 이 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기원전 6년에 태어났는데 한나라 방계 황족 출신이었죠
유수의 아버지는 남돈현령을 지낸 유흠 이라는 사람이었고 그가 고작 9살 밖에 되지 않았을때 이미 부모님을 둘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삼촌인 유량의 손에 거두어져 자라게 되었죠
그의 형인 유연은 리더쉽 있고 굉장히 인싸기질이 다분했던 인물이었던 반면 유수는 행동이 신중하고 조용하며 차분한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릴적 삼촌을 도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유수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수도인 장안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청년시절에는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고 하죠
그렇게 20살이 된 유수는 수도 장안으로 가서 훗날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바로 훗날 황후가 되는 아내 음려화와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줄 등우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유수는 그때까지만해도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 라고 할정도로 큰 욕심 없이 적당한 벼슬자리를 얻어 예쁜 아내와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평범한 청년이었죠
그런데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당시 신나라는 백성들은 왕망의 폭정에 나날이 궁핍해져만 갔고 결국엔 반란을 일으키게 되죠
그렇게 눈썹을 빨갛게 칠한 적미군과 녹림군, 평림군 등 각지에서는 백성들 뿐만아니라 호족들, 귀족들까지 왕망의 폭정에 반해 봉기를 일으키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유수의 형인 유연도 용릉에서 거병했고 그들을 용릉군이라 불렀죠
그리고 곧바로 유수 역시 형을 돕게 되는데 생각보다 병사가 잘 모이지 않았던 용릉군에 유수가 합류하고나서 어릴적부터 유수의 인품을 잘 알던 사람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 용릉군은 녹림군, 평림군과 연합했고 큰 세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여러 현들을 차지 하는등 활약하기 시작했죠
이후로도 유씨 형제가 이끄는 군대는 계속해서 신나라 군을 격파하며 완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는데요
남양군 대부분을 손에 넣은 유연과 유수는 유현을 한나라(현한) 황제 경시제로 추대하여 본격적으로 왕망의 신나라에 맞서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때부터는 군사를 나누어 여러 도시들을 동시에 공략하기로 했는데 형 유연은 포위중이던 완을 계속 공략하기로 했고 유수는 따로 군사를 떼어내 영천군을 침공했습니다
그렇게 유수는 여러 장군들과 곤양, 정릉, 언 등 영천군의 여러 현들을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죠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왕망은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색되어 까만색으로 염색을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왕망은 왕읍과 왕심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정예병사 43만명을 주어 곤양을 공격해 한나라 유씨들을 섬멸하라 명했죠
그렇게 한나라와 신나라의 운명을 건 곤양대전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날이 43만명의 신나라 군사는 곤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곳을 지키던 군사는 고작 9천명에 불과했죠
심지어 이들중 태반은 창칼을 잡아본적도 없는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런 농민군 9천이 신나라 정예 주력부대 43만명을 상대로 했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었으며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한 장수들도 영천군 공략을 포기하고 도망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만약 지금 도망을 치면 완성을 공격하던 형 유연의 부대가 적군에게 뒤통수를 맞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유수는 "지금 도망가면 하루사이에 여러 아군 부대들은 전멸해버릴것이다
또 당장 목숨은 건질수 있어도 고향이 토벌되면 그때 모두 죽고 말것이다" 라며 장수들과 병사들을 설득했죠
그리고 자신이 43만 적병의 포위를 뚫고 언현과 정릉으로 가서 지원군을 데려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결국 유수를 포함한 13명의 결사대는 지원군을 데려오기 위해 밤을 틈타 성을 빠져나와 43만명의 포위를 필사적으로 뚫어내고 겨우 언현과 정릉으로 탈출할수 있었죠
하지만 곤양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는데요
신나라의 장수 왕읍, 왕심은 곤양을 수십겹으로 포위하고 있었으며 열몇명 빠져나간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죠
또한 성벽보다 더 높게 운거를 놓아 곤양성 안을 내려다 보는 상황이었고 압도적인 병력차이로 인해 곤양성을 너무 얕보고 있었으며 어떻게하면 더 크게 이겨 더많은 전공을 세울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엄우가 왕읍에게 곤양성에 항복을 권유하자 하니 왕읍은 이를 거절했고 그러면 포위를 한쪽만 열어 도망치는 적병들을 공격해 적의 수를 줄이며 서서히 피말려 죽이는 계책을 쓰자고 건의를 했지만 이 마저도 거절했죠
그만큼 왕읍과 왕심은 더 많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곤양성을 향한 총 공세가 시작되었고 곤양성을 지키고 있던 왕봉 등도 힘에 부쳐 결국 왕읍에게 항복을 요청했지만 오직 힘으로 반란군을 눌러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왕읍이 이를 단칼에 거절해버렸죠
항복도 받아주지 않자 곤양성을 지키던 병사와 장수들은 배수진이라도 친듯, 미친듯이 분투하기 시작하면서 곤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한편 지원군을 모으러 갔던 유수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고작 3천명 밖에 모으지 못했고 어쩔수 없이 이 3천명의 병사만 가지고 곤양성을 지원하러 오게 되었죠
신나라군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곳에 진을 친 유수에게 왕읍, 왕심은 이들을 물리치라며 군사 수천명을 보냈지만 유수는 선두에서 말을 몰아 창을 휘두르며 적군을 무찔렀고 그의 이런 모습에 고무된 부하들도 용기를 내어 적과 싸워 천여명의 적군을 죽였으며 결국 적군도 퇴각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유수는 완성을 함락시켰으니 곧 있으면 형 유연의 지원군도 올것이라는 소문을 흘려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까지 했죠
그리고나서 유수는 3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43만명의 신나라 군대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죠
유수가 노린점은 바로 총대장인 왕읍과 왕심을 쓰러트리는것 이었는데요
이때 신나라군에는 정말 어처구니없고 바보같은 일이 그리고 유수의 군에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찾아옵니다
유수가 돌격해오자 왕읍과 왕심은 고작 3천밖에 안되는 병력이니 자신들도 쉽게 그들을 격파 해버릴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1만여명의 병력을 인솔해 그들과 맞서 싸우면서 다른 부대는 현재 위치를 지키면서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죠
그냥 다 몰려들어서 유수의 부대를 쓸어버리면 될일이었지만 왕읍, 왕심은 자기들이 유수를 비롯한 많은 적군을 죽이고 군공을 최대한 많이 쌓을려고 욕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양군이 크게 부딪히는데 유수의 신들린 용병술로 인해 결국 왕읍, 왕심의 부대가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지만 왕읍의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신나라군은 아무도 그들을 구원해 주지 않은채 멀뚱멀뚱 자리만 지키고 있는것이었죠
결국 유수는 사령관 중 한명인 왕심의 목을 따버렸고 이에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 신나라 병사들이 통제를 벗어나 와해 되면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신나라군은 처참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곤양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문을 열고 나와 혼란에 빠진 신나라군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신나라의 43만 병력은 무질서하게 도망치기 시작했죠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바람에 사람에게 밟혀 죽은 사람들도 수두룩 했으며 강을 건너 도망치던 신나라 군은 때마침 내리는 폭우로 불어난 물에 수장되기까지 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신나라 병사들은 대부분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으며 43만명 중 겨우 수천명 만이 왕읍을 따라 낙양으로 도망갔죠
고작 1만명 정도의 군사로 43만 대군을 섬멸시킨 이 기적 같은 전투를 곤양대전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이 곤양대전으로 인해 유수와 유연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고 백성들은 앞다투어 유수의 군대에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신나라의 주력부대가 궤멸되자 수많은 신하들이 유수와 유현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신나라는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죠
그리고 얼마안가 유현의 군대는 낙양과 무관성을 함락시켰고 훗날 장안까지 함락시키면서 왕망은 두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렇게 신나라는 고작 1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재건하겠다는 유연과 유수 형제의 목표는 이루어졌지만 그들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데요
유연과 유수 형제의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것을 우려한 경시제 유현이 유연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시키고 만것입니다
그러자 형의 복수를 할것인지 훗날을 도모할것인지 고민하던 유수는 아직은 경시제에게 대적할수 없다는것을 느끼고 얼른 경시제를 찾아가 죄를 청하면서 형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며 싹싹 빌게 되죠
그러자 유수를 죽일 명분이 없어진 경시제는 유수에게 실권이 없는 관직을 내리고 신하들에게 시켜 그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형이 죽었어도 유수는 상복도 입지 않았고 평소처럼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술도 먹으며 사람들과 수다도 떨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것이었죠
또한 사람들이 곤양대전의 상황을 물으며 자신을 영웅으로 추켜세울때는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열심히 싸운 결과일 뿐 자신이 한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 경시제의 감시가 느슨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이불속에 들어가 형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토사구팽 당한것에 눈물 흘리며 언젠가는 형의 복수를 할것이라 다짐했죠
결국 유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지못한 경시제는 그를 하북 지역에 있던 군벌 왕랑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에 유수는 23년 겨울 하북으로 향하게 되죠
하지만 경시제는 유수에게 병사 뿐만아니라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수는 거의 2년간 반란군에게 쫓겨 도망다녀할 처지에 놓였고 겨우겨우 추위와 굶주림을 피해 버티고 버티는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시제가 유수를 하북에 보낸 이유는 사실 싸우다 그냥 죽으라는 의미였죠
하지만 그런 개고생을 하면서도 유수의 훌륭한 인품과 영웅적인 면모에 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에게 모이게 되고 유수의 세력은 점점 커져갔으며 이때 유수와 함께 개고생을 하던 28명의 부하들은 훗날 '운대 28장'으로 불리는 유수의 충신으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유수는 왕랑군을 격파하고 한단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죠
거기다가 얼마안가 하북지방을 평정해버렸으며 그때까지 반란을 계속 일으키던 적미군까지 자신의 군대에 복속시켜 나날이 세력은 강대해져 갔습니다
심지어 그는 굉장히 여유있는 태도를 보이며 적의 사정도 적당히 생각을 해주기까지 했는데요
적미군이 황하 동쪽에 진을 치고 있을때 유림이라는 사람이 유수에게 달려와 "빨리 수공을 쓰면 적미군들을 전부 물속에 수장시켜버릴수 있을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죠
그말을 들은 유수는 너무 잔인한 방법이라며 수공은 쓰지 않겠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여유있고 느긋하게 적군들을 평정하고 있던 것이죠
어쨌든 하북을 평정한 유수가 두려워진 경시제는 유수에게 소왕의 작위를 내리며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때 유수는 부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를 거부하고 하북지역을 기반으로 독립해 버렸죠
그리고 25년 6월, 유수는 국호를 한(漢)이라 정하고 낙양을 수도로 삼은 뒤 황제(광무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광서제가 세운 이 한나라를 '후한'이라고 부르죠
이때 경시제 유현은 장안에 있었는데요
경시제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등 이미 황제로써의 능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장안 근처에서 약탈과 전횡을 일삼던 적미군이 장안에 쳐들어오자 그것도 막지 못해 결국 유현은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유현을 죽인 적미군은 유분자 라는 사람을 꼭두각시 황제로 세우고 온갖 횡포를 일삼았는데 이에 광무제는 27년 2월, 장안을 함락시키며 그들을 모조리 평정해 버렸죠
뒤이어 광무제는 30년에는 산둥, 33년에는 농서를 공략하였고 이제 남은곳은 촉땅에 있는 공손술의 세력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당시 낙양의 황궁에는 황실에서 사용할 집기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광무제는 신하들에게 집기들을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성도에 모두 만들어져 있으니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 라고 말했다고 하죠
성도는 촉 지역의 중심지 인데요
당시 공손술이 황궁을 짓고 있었는데 그를 토벌하고나서 모두 빼앗아 오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광무제가 한말이 있는데 그 말은 '득롱망촉(得隴望蜀)'으로 이는 '농서 땅을 이미 얻었는데 촉 땅을 바라고 있다'라는 말로 이후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표현한 고사성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6년, 촉땅의 공손술 세력까지 멸망시키면서 그는 중국을 다시 평정하기에 이르렀죠
통일후부터 광무제는 본격적으로 성군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오랜기간 계속된 전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다 못해 거의 막장으로 치닫던 상황이었기에 백성들의 세금을 이전보다 3분의 1 수준으로 경감해주었죠
또한 노비를 해방시켜 농사를 지을 일반 백성들의 수를 늘렸으며 백성들이 동원되던 부역도 대폭 축소 하면서 징병제를 폐지하고 둔전병 제도를 도입해 군량을 최대한 자급자족 하도록 만들면서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고 조정 내 조직들을 통폐합해 관리의 수도 줄였으며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리들은 가차없이 엄벌에 처했고 외척이 정치에 참여하는것을 금지했죠
거기다가 황실과 수도를 지키는 금위군과 군사적 요충지의 주둔군을 제외하고는 군대도 대폭 축소 시켰는데 비록 군사력이 약해졌다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군비를 대폭 축소 시키면서 백성들의 시름을 덜어주었습니다
이렇게 광무제는 밤낮으로 민생을 돌보는일에 몰두했는데 신하들이 휴식을 권할때도 그는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일이니 피곤하지 않다"고 했다고 하죠
다방면으로 진행된 광무제의 개혁정책으로 후한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으며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나라의 부흥을 이룩한 광무제는 57년 2월,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훗날 제갈량은 광무제를 들어 "한나라 고조의 개국 공신들은 흔히 광무제의 개국 공신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무제가 너무나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에 공신들의 능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능력이 부각될 만한 위기 상황이 적었던 것뿐이다" 라며 광무제를 극찬했다고 하죠
여담으로 조강지처라는 말이 광무제와 그의 누나인 호양공주의 일화에서 유래했는데요
광무제는 일찍 과부가 된 누나 호양공주를 다시 시집 보낼 생각으로 혹시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호양공주는 광무제의 신하인 송홍이 마음에 든다고 답했는데 문제는 송홍은 유부남이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황족인 호양공주가 신하의 첩이 될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에 광무제는 송흥을 불러 술을 한잔 하면서 "사람이 출세하면 아내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친구를 바꾼다는데 자네는 어떤가?" 라며 슬쩍 그의 마음을 떠봤죠
그러자 송홍은 "가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고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 쫓아 낼수 없는법입니다(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라고 대답 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광무제는 누나인 호양공주에게 "송홍은 안되겠습니다 누님" 이라고 말했다고 하죠
여기에서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를 가르키는 "조강지처(糟糠之妻)"라는 말이 생기게 된것입니다
지금까지 망해버린 한나라를 재건하고 중국의 3대 명군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광무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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