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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오삼계. 중국에서 희대의 매국노, 한간으로 불리는 인물

by 사탐과탐 202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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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희대의 매국노, 한간으로 불리는 인물 명나라와 청나라 양쪽 모두에서 배신자, 기회주의자로 까이는 오삼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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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매국노라고 불리는 경우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매국노하면 이완용이 바로 떠오르죠

이완용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고 평생을 잘먹고 잘살았으며 현재 그의 후손들까지 잘 산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매국노이긴 하지만 좀 억울할수도 있고 특이한 매국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는 바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장수 오삼계라는 인물이죠

 

이 오삼계는 명나라 입장에서도 나라를 오랑캐에게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불리지만 청나라 입장에서도 기회주의자에 배신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에겐 대체 무슨일이 있었을까요?

 

오삼계는 1612년 6월, 요동에서 태어났죠

그의 아버지 오양은 원래 강소성에 살았었는데 청나라를 막기위해 요동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고 거기서 오삼계도 태어나게 된것입니다

그가 태어난 명나라 말기엔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만주땅에서는 여진족이던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세우면서 명나라에 가장 위협이 되는 세력이 되었죠

 

그리고 지속적으로 명나라와의 국경에 있던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요새 산해관에서 막혀버려 명나라를 정복할수는 없었죠

또한 명나라의 명장인 원숭환이 더욱 방어를 굳건히 하기 위해 요서지역에 영원성을 건설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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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 제독으로 임명된 오삼계는 이곳 영원성에서 명나라 군을 지휘해 청나라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명나라의 멸망을 더이상 막을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바로 명나라 장수 홍승주를 총대장으로 하고 오삼계 등 장군 8명이 이끄는 13만명의 명나라 정예군이 금주성에 고립된 조대수를 구원하기위해 출진했지만 청나라군에 철저히 궤멸되다시피한 송산전투가 벌어지고 만것이죠

 

이때 오삼계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필사적으로 청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겨우 산해관으로 도망칠수 있었습니다 

송산전투의 처절한 패배의 여파로 산해관까지 청나라의 손아귀에 넘어가는건 간신히 막을수 있었지만 명나라엔 더이상 대규모의 병력을 운용할수 있는 여력이 남지 않았죠

또한 엎친데 덮친격으로 명나라가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는사이 이자성이라는 인물이 난을 일으켜 엄청난 세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미 1627년부터 발생한 이 대규모 농민 반란군이 나날이 세력을 불려나가자 이를 위협적으로 여긴 숭정제는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했는데 결국 반란을 진압하지는 못했고 송산전투의 패배로 이제는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을 막을수 있는 군사력도 없어져 버렸던 것이죠

그렇다고 산해관에 남아있던 병력을 빼낼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미 명나라의 국운은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 오삼계에게 청나라와 이자성의 반란군으로부터 투항권유가 날아오기 시작했죠

그렇게 1644년, 마침내 이자성의 반란군은 베이징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숭정제는 살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산해관이 이자성군에 의해 위험해 질수도 있고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남경으로 천도 하기에는 이자성군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안전하게 갈수있는지도 미지수였죠

 

오삼계와 함께 남경으로 도망칠수는 있었지만 그러면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올것이고 얼마안가 남경까지 들이닥칠게 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오삼계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1644년 4월 23일 태감 조화순이 이자성군에 투항하면서 25일, 자금성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명나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죠

 

그렇게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삼계는 이자성군과 청나라를 두고 어디로 투항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청나라가 오랑캐의 나라라서 좀 아쉽긴 하지만 투항했던 명나라 장수들의 대접은 꽤 괜찮았던 것이죠

그리고 이자성 반란군은 같은 한족이기도 하고 북경에 있던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고민이었던 것입니다

 

오삼계는 부하들과 논의를 한 끝에 '같은 한족인 이자성에게 투항해 그와 손잡고 한족끼리 똘똘 뭉쳐 오랑캐인 청나라를 막자' 라고 생각하고 이자성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죠

그런데 이 결정을 180도 뒤집는 일이 발생하는데요

바로 이자성의 반란군은 북경을 함락 시키자마자 그곳을 마구잡이로 약탈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던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관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목숨을 빼앗았으며 관리들의 재산을 약탈했죠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타깃중에는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과 그의 가족들도 있었던 것인데요

오양과 가족들 역시 반란군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고문을 당했던것이죠

 

오삼계는 아버지 오양이 반란군에게 감금되어 전 재산을 빼앗긴채 고문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며 이자성군에게 투항하는것을 포기했습니다

이자성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오양과 가족들에 대한 약탈을 멈추고 얼른 풀어줬지만 이미 오삼계의 마음은 돌아선 뒤였죠

그리고 오삼계가 이자성군에 투항을 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요

 

북경에는 진원원이라는 오삼계의 애첩이 있었는데 이자성의 부하 장수였던 유종민이 이 진원원을 강제로 취했던 것입니다

진원원은 원래 기녀 였지만 오삼계가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애첩으로 삼았는데 특히 아꼈던 그녀가 자신이 투항하려는 이자성의 부하에게 몹쓸짓을 당한것이 오삼계의 분노를 사기엔 충분했던 것이죠

 

오삼계가 등을 돌렸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성은 화를 내며 즉시 그의 아버지 오양을 죽인 뒤 무려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오삼계는 긴급 징병을 통해 10만의 병력을 모을수 있었지만 송산전투에서 오삼계가 수습한 1만의 병사와 전쟁에서 도망쳤다가 산해관으로 돌아왔던 2만명 정도만 병사라고 할수 있을 정도였을뿐 나머지 약 7만명은 긴급하게 막 긁어모은 병력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이자성군과 맞붙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자 오삼계는 결국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항복이 아닌 동맹으로 하려고 했지만 청나라에서는 끝까지 그의 투항을 요구했고 결국 그는 청나라에 투항할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청군은 오삼계군과 함께 이자성군을 격파해버렸습니다

 

굳이 따지면 오삼계는 명나라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요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 이미 멸망해버렸고 오삼계 역시 청나라보다는 한족인 이자성에 투항하려 했지만 자신의 가족들에게 해코지를 하고 애첩에게 몹쓸짓을 한 원수들에 차마 투항할수 없었던 것이니 그가 청나라에 투항한것은 어찌보면 상식적이었던 것이라 볼수 있죠

하지만 한족들은 여전히 그를 여자에 눈돌아가 나라를 팔아넘긴 희대의 매국노이자 한간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오삼계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면이 없잖아 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삼계가 억울한 건 딱 이때까지인데요 이후 오삼계가 보인 행보는 욕먹기엔 부족함이 없어집니다

어쨌든 청나라는 자력으로 절대 통과 할수 없었던 산해관을 오삼계가 열어준 덕분에 통과 할수 있었죠

청군은 투항한 오삼계군과 함께 파죽지세로 중원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자성군을 개박살 내버렸고 큰힘 들이지 않고 북경에 입성할수 있었죠

북경을 점령한 도르곤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뤄주면서 민심을 다잡았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명나라 잔여세력들과 반란군들을 때려잡기 시작해 중국 본토를 장악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산해관을 열어준 공로로 오삼계를 귀주성과 운남성의 왕인 평서왕으로 봉해 그곳을 다스리도록 했죠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오삼계는 왕이 되자마자 병력을 이끌고 이자성 토벌을 시작했으며 결국 이자성은 계속 도망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오삼계는 청나라 조정의 명령을 받아 사천 지역을 토벌했고 남은 명나라 잔존세력들이 운남과 버마(미얀마)로 도망가자 끝까지 쫓아가 영력제 주유랑을 죽이면서 결국 그는 자신의 손으로 명나라의 잔존세력까지 뿌리뽑게 되죠

 

이때 오삼계는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 싶어서 였는지 주유랑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목숨까지 직접 나서서 빼앗기도 했습니다

이후 청나라에서는 명나라를 완전히 끝내버린 오삼계에게 운남지역을 통치하도록 명했는데 운남은 중국의 최서남에 있는 변방지역이며 그곳에는 토착세력이 대대로 그곳을 통치하는 그런곳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만큼 통치하기가 힘든 그런곳에 오삼계를 보내버린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운남을 통치하러 온 오삼계는 토착세력에 군사를 동원한 무지막지한 무력통치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약탈을 해버렸죠

오삼계는 무지막지한 탐관오리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착취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무역업이나 상업 등을 독점하고 고리대금업까지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데 온 힘을 집중했죠

하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도 토끼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를 잡아 먹기 시작하는데요

청나라에서는 오삼계 뿐만아니라 청나라가 중원을 제패하는데 크게 일조했던 경중명은 정남왕, 상가희는 평남왕으로 임명 했었습니다

 

이 두명의 번왕들 역시 오삼계와 마찬가지로 자치권을 인정받아 자신들만의 세력을 형성할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들 역시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막강한 군사력과 자금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에서도 점점 이런 번국들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요

 

또한 이 번왕들이 자신들 세력 외에 주위 다른 성의 인사권에도 개입하면서 계속해서 청나라 조정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던 것이죠

청나라로써는 이 번왕들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나중에는 후환이 될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번왕들을 공격해 들어갈수도 없었는데 소수였던 만주족에 비해 한족인 이들은 병력도 훨씬 많았고 명나라 잔존세력을 토벌하며 얻은 실전 경험도 풍부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몇년의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젊은나이에 황제에 오른 강희제가 이런 번국들을 없애는데 초강경 모드로 돌입하자 오삼계는 애송이 황제 주제에 어딜넘봐 하면서 삼번의 난을 일으킵니다

그는 반란의 명분으로 명나라의 부흥, 복수를 내걸었고 자신이 끝까지 쫓아가 죽인 영력제의 묘를 참배하고 곡을 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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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들은 강희제는 "오삼계 네놈은 명 부흥을 대의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는건 네놈 아니었느냐, 네놈은 명에게도 반란군, 청에게도 반란군일 뿐 아무런 대의나 명분도 없다" 라고 하면서 북경에 살면서 인질로 있던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을 처형해버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 명장들은 숙청에 휘말리면서 모조리 죽어버린 상태였고 오삼계는 오랫동안 전장에서 살아온 노련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청나라군은 오삼계군에 의해 우후죽순 격파당했으며 그렇게 오삼계군은 파죽지세로 북경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죠

 

또한 정남왕 경정충도 반란에 가담했고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이 광동의 전권을 장악한 뒤 오삼계의 반란에 가담하기까지 하면서 청나라는 엄청난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678년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67세의 노인이었던 오삼계는 황제에 오른 그해 8월, 노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요

 

오삼계가 죽자 반란군의 기세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전열을 가다듬은 강희제가 반격에 나서자 결국 1681년, 주나라의 두번째 황제인 오세번이 곤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삼번의 난은 진압되고 말았죠

이후 오삼계는 부관참시 되어 그의 두개골이 곤명 저잣거리에 효수 되었고 오세번 역시 효수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이 속해있던 나라를 배신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매국노, 한간이라고 불리기엔 좀 억울한 측면이 있는것 같죠

명나라는 이미 멸망해있었고 이자성은 가족의 원수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투항했을 뿐이고 강희제가 자신의 위치를 위협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삼계는 매국노라 하기엔 참 애매한 인물이긴 한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명나라와 청나라 두나라에서 모두 까였던 오삼계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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