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억 원 상당의 집안 전 재산을 도박으로 날려먹은 희대의 파락호 김용환.
도박판에서 돈을 잃든 돈을 따든 그 돈은 항상 어디론가로 사라지게 되는데 김용환의 비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말기 경상북도 안동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문 양반 가문이 있었습니다.
그 가문은 바로 퇴계 이황의 대제자 학봉 김성일의 후손으로 의성 김씨 학봉 종가였죠.
이 가문에서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최초로 을미의병을 만드신 '김흥락'이라는 분도 계신 경상북도 안동에서 제일 가는 명문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명문가에서 1887년 2월 김용환이라는 파락호가 태어났습니다.
파락호란 재산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이긴 하지만 집안의 재산을 이상한 짓을 하며 몽땅 다 날려먹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파락호 김용환은 도박을 하며 가산을 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안 낀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집안을 말아먹을 종손이 나왔다'라며 욕을 하면서도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망한다며 김용환이 팔아먹은 문중 땅을 십시일반 모아 다시 되사주곤 했죠.
그리고 김용환이 더 개 망나니짓을 한 일이 있는데요.
그가 워낙 난봉꾼이라 집안 재산을 거덜 내자 외동딸을 시집보낼 혼수비용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딸의 시댁에서 장농을 하나 사라고 준 돈마저도 딸 몰래 훔쳐 가서 도박으로 탕진했으며 결국 딸은 친정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펑펑 울면서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딸이 시집가던 날조 차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훗날 딸이 결혼한 지 3년이 되어가도 임신 소식이 없자 시댁에서는 헌 장롱을 귀신들린 장롱이라며 부수어 태워버리기도 했습니다.
명문가인 학봉 종가의 여식이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도박에만 빠져있던 김용환을 문중 사람들이 엄청 욕했지만 김용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집안에 '학봉'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니 그만하면 충분한 거 아니냐"라며 욕하는 문중 사람들에게 오히려 큰소리쳤다고 하죠.
그만큼 가정에 무관심했고 가문에도 신경을 안 썼으며 도박만 하던 난봉꾼이었던 것입니다.
김용환은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기 시작해서 밤새도록 했는데 새벽녘이 됐을 때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걸고 마지막 베팅을 하는 게 특기였다고 하는데요.
이때 노름에서 따면 괜찮았는데 돈을 잃었을 때는 갑자기"새벽 몽둥이야!!"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박장 주위에 숨어있던 부하들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도박하던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모든 돈을 다 쓸어 담아 유유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종가가 망하는 걸 볼 수 없었던 일가친척들이 다시 사준 집과 논밭도 매번 또다시 다 팔아버리고 노름판에서 사라졌습니다.
김용환은 결국에 현재 가치로 200~300억 원 상당의 재산을 도박으로 전부 말아먹고 말았죠.
하지만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도박에서 돈을 딸 때도 많았는데 돈을 땄을 때도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새벽 몽둥이를 외치고 난 후 쓸어 담은 돈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재산이 늘었어야 맞는 건데 항상 그는 그 많은 돈을 도박에서 다 잃었다고만 한 것이죠.
그럼 그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김용환이 도박으로 잃었던 그 많은 돈들은 사실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지고 있었습니다.
300억이나 되던 재산이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사라지게 되면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내졌다고 일본군이 의심하고 결국에는 밝혀질 것이라고 우려한 김용환이 스스로 파락호 쓰레기를 자처하며 가족과 문중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일본군까지 모두를 속이며 독립군 군자금을 댄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릴 적 의병활동을 하던 의성 김씨 일족의 김회락은 전투에서 패전해서 학봉 종가 종택에서 은신했지만 결국 일본군에게 잡혔고 김회락, 김흥락, 김승락 등은 일본군에게 포박당해 집 마당에 꿇어앉게 되었고 집안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하는 등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때 김회락이 총살을 당했는데 어린 김용환은 이 모습을 목격하고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가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김용환은 주로 영남, 충청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했는데 삼일운동 이후에는 만주 길림의 서로군정서와 독립운동 단체 '의용단'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친일 매국노들, 친일 부자들에게 '사형선고장'을 보내는 등 여러 활동을 하다 1922년 결국 일본제국 경찰에게 체포되게 되었고 이후 풀려난 뒤 독립군 군자금을 어떻게 의심받지 않고 조달을 하나 생각하다 도박을 해서 다 잃은 척 하자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죠.
그러다 일제가 만주 독립군 군자금을 추적하다 그중 일부가 '안동의 김용환에게서 나왔다'라는 증언으로 인해 이렇게 치밀하게 군자금을 댔지만 결국 일제의 주요 감시 인물로 지목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이 시집가는 날에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도 사실 도박에 빠져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군 군자금 관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잡혀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1945년 염원하던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1년 후인 1946년 7월에 임종을 맞게 되었는데 임종 전 독립군 동지이던 하중환이 "이제는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라고 물었지만
김용환은 "선비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은 3년 상이 끝나던 1948년, 하중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외동딸 김후웅에게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김후웅은 훗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담은 시를 발표했는데 이 시의 제목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라는 시였습니다.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그럭저럭 나이 차서 16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 오라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 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 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가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 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라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슬픔이 묻어있는 시였습니다.
막대한 재산도 모두 군자금으로 보내고 최고의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명예도 버렸으며 주위 사람들과 일가친척, 가족들에게 개망나니 파락호라는 욕을 들어먹고 하나뿐인 딸에게도 미움과 원망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버려가며 헌신한 김용환 독립운동가님은 파락호나 망나니가 아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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