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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윤동주.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만행

by 사탐과탐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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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입니다.
그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에 있었던 일본과 중국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저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와 삶의 고뇌에 대한 시를 쓰며 민족의 길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1930년대부터 문인들에 대한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이 심해져서 1940년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 용정에 명동촌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어릴 적부터 시인의 면모가 많이 보였던 그는 명동소학교 재학 시절 고종사촌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송몽규와 함께 문예지 새명동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 만주에서 지내던 시절에는 대체적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삼은 발랄한 형태의 시를 자주 썼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배웠습니다.

북간도에서 기독교계 학교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일제가 학교 담장조차 넘지 못했다고 전해지죠.

 

그러다 1935년 18세의 나이로 숭실학교에 전학을 가게 됐는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자퇴를 감행합니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함으로써 드러낸 것이죠.

 

학창시절 윤동주와 문익환

이후 상급학교로 진로를 결정할 무렵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대나 법대로 가기를 원했지만 윤동주 자신은 문과를 고집해서 부자간에 엄청난 갈등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부자 싸움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중재에 나서서 그는 결국 문과로 진학하게 되죠.

 

1938년에 경성으로 유학을 떠나며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을 하는데 이때부터 삶에 대한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의 시를 쓰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유명한 작품인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등도 이 시기의 작품들입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할 무렵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시집을 내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걱정하는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한글과 한국어 모두 엄격히 금지된 시대에 한글로 쓴 시를 출판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윤동주의 시를 보면 알겠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도 내포되어 있으니 주위 사람들로서는 만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출간하려던 시집의 원고를 3부 만들어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다른 한 부는 스승에게 전했으며 그는 일본 대학으로 유학 준비를 하게 됩니다.

 

윤동주와 정병욱

이때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로 창씨개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를 위하여 창씨개명계를 신고하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씨를 히라누마로 개명하게 되었습니다.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하기 5일 전에 참회록이라는 시를 짓는데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 반성과 성찰 등이 주제로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였죠.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시 도시샤대학 문학부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교토에서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게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다행히 시는 편지와 함께 강처중에게 보내서 무사할 수 있었는데 정병욱이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항아리에 담은 뒤 마루 밑에 묻어서 보관했고 편지는 모두 태웠다고 하죠.

 

수감 후 윤동주는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수감된 지 1년 7개월 만인 1945년 2월에 건강이 악화되어 불과 27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습니다.

 

윤동주의 죽음에는 심상치 않은 의혹이 있는데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윤동주가 복역 중 생체실험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당숙인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후쿠오카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습니다. 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릅니다." 라는 말을 했고 오래전부터 인체실험을 당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1980년에 일본인 한국 유학생인 고노오 에이치씨가 잡지 '현대문학' 10월 호에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 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 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 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규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 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죠.

 

현재 남아있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에 출판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이 1948년에 31편의 시집으로 늘어났고,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인 윤혜원 씨가 북간도 용정 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 시 85수를 품에 안고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현재는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 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윤동주와 그 가족들의 묘는 문화대혁명 때 파헤쳐 지는 바람에 소재조차 알 수 없었지만 1985년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 나선 오무라 마츠오 교수가 비석을 찾아내면서 다시 윤동주의 묘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죠.

발견 당시 무덤은 봉분조차 없었고 완전히 버려져 폐허였다고 합니다.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동생 윤형주가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가서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던 무덤을 비석도 다시 세우고 묘소도 제대로 정비했습니다.

 

재정비 된 윤동주 시인의 묘소

그런데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중국이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립니다.

 

우리 한민족의 민족저항 시인 윤동주 생가가 중국 측의 동북공정 작업으로 본면목이 크게 훼손되고 있는 것이죠.

 

대문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선명한 글씨를 새겨 놓았고 대표작 '서시'도 한자로 번역한 조형물을 설치했죠.

그래서 우리 외교부와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이를 시정해달라는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전문가들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개소리를 시전하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그가 지은 시 〈고향집〉에서 자신의 고향을 '따뜻한 남쪽'이라고 말했으며 자신은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만강을 건너기 전 남쪽'은 '한반도'를 뜻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윤동주는 자신의 고향을 '한반도'라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그리고 만주에서 살던 조선인들이 중국 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써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인 1949년 10월 1일 이후부터입니다.

 

따라서 윤동주는 조선 출신으로 재만조선인의 후예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중국 국적을 소유한 중국 조선족이 아니죠.

 

윤동주는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는 아니었고 당대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지만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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