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퇴각하려는 왜군을 섬멸하려던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이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위인으로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을 꼽을수 있을것 같은데요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이자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결 짓는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초로 야간에 벌어진 전투였는데 기를 쓰고 살아서 도망치려는 왜군과 이 악물고 약 7년간 조선을 유린한 것에 대한 복수을 하려던 조선군의 불타는 의지가 맞붙게 되다보니 역대 해전 중 가장 처절하고 치열했던 전투이죠
명량해전에서 엄청난 병력차이를 극복하고 이순신이 왜군을 다시 격파했던 덕에 다시 조선이 제해권을 장악할수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조명 연합군은 직산에서 왜군을 저지하면서 왜군은 육군과 수군이 함께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수륙병진 전략을 포기할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더이상 아무것도 할수 없게 된 왜군은 전쟁을 지속할 여력을 잃게 되었으며 남해안 부근에 왜성을 쌓은 뒤 그 안에 짱박혀 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보급마저 끊겨버렸기 때문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의 애마까지 잡아먹으면서 버티고 있던 최악의 상황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고니시는 뜻밖에 비보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 본토에서 날아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이었죠
이미 전쟁을 지속할 의지도 없거니와 보급도 잘 되지않는 판에 그 소식을 듣자마자 왜성을 쌓고 버티던 일본의 다이묘들은 즉시 전군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보는 이순신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왜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죠
만약 그냥 그대로 보냈다가는 일본이 안정이 된 이후 다시 재침략을 할수도 있었고 조선 국토와 백성을 잔인하게 유린한 왜놈들을 철저히 박살내버릴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목숨걸고 도망치려는 왜군과 절대 곱게 보낼수 없다는 조명 연합군의 앞에는 아수라장과 같은 최후의 전장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죠
이때 이순신은 사천쪽에 머물고 있던 왜군까지 모두 유인해 모조리 섬멸하기위한 계책을 짰는데요
먼저 고니시가 있는 순천 왜성을 공격하는척 하고 고니시를 살리려고 오는 왜 수군을 박살내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598년 11월 10일, 조명 연합수군은 15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고니시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라 좌수영에서 출발해 11월 13일 장도에 도착하게 되었죠
이때 고니시는 살아 돌아가기 위해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에게 지속적으로 뇌물을 보내고 화해요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니시는 이순신에게도 뇌물을 보냈는데 이순신은 이를 보고 굉장히 어처구니 없어했으며 뇌물을 가져온 일본 사신을 확 죽여 버리려다가 참고 그냥 보내줬다고 하죠
하지만 뇌물 덕택인지 진린은 계속해서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결국 답답해진 이순신은 조선 수군만이라도 순천 왜성을 공격하겠다고 말한뒤 출진하려는데 평소 이순신의 놀라운 전공과 인품을 흠모해온 진린은 어쩔수없이 이순신과 함께 출진하게 되었죠
좀 독특한 점은 진린이 이순신을 너무너무 좋아했다는 점인데요
진린은 이순신을 두고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라며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고 심지어 콧대높은 명나라 고관대작이던 진린이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이순신에게 '노야(老爺)'라는 존칭을 쓰며 그를 부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이 탄 가마가 이순신의 가마보다 앞서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심지어 전쟁이 끝나면 자신과 함께 명나라로 가서 같이 살자고 조르기까지 했다고 하죠
어쨌든 조명 연합수군은 순천왜성을 포위했는데 절박해진 고니시는 진린에게 부탁해 도망칠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워낙 이순신이 강경한 탓에 그러지 못했고 그러면 배 한척만 포위망을 벗어날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고니시는 배 한척을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할수 있었죠
그리고 1598년 11월 18일, 조선수군이 순천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이는 공격하는것 처럼 보이기 위한 위장술이었고 그들의 목표는 고니시를 포함해 시마즈 외 다른 일본 장수들이 이끄는 왜 수군이었죠
이때 이순신은 난중일기의 마지막 내용을 기록하는데요 "11월 17일 진린의 진영에서 왜선 한척이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산도까지 조선 수군이 쫓아갔다" 라는 기록이 난중일기의 마지막 기록이라고 하죠
어쨌든 고니시의 구원요청을 받은 시마즈는 곧장 여러 장수들과 함께 5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1598년 11월 18일 오후 6시경, 순천 왜성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밤 10시경, 왜군의 구원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가만히 있다가는 협공을 당할것이었기 때문에 즉시 물목이 좁은 노량해협으로 병력을 이동 시켰고 그렇게 약 7년간의 길고긴 임진왜란을 종결짓는 사실상 최후의 결전이 임박했죠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 경, 이순신은 노량 근처 섬에 복병을 숨겨놓고 왜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군이 노량 근처에 진입하자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하면서 노량해전이 시작되었죠
별 걱정없이 지나가던 왜군은 조선 수군의 기습을 받고 크게 당황했으며 죽도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진린의 함대도 북을 치며 왜군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왜군의 함선이 우후죽순 침몰하기 시작했고 왜군은 그대로 퇴로를 찾다가 관음포에 다다르게 되었죠
하지만 이 역시 이순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것이었는데요
관음포 근처에도 매복중이던 이순신의 조선 수군 본대가 사지(死地) 인지도 모르고 이곳으로 몰려 들어온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기습을 펼친 조선수군 함대와 진린의 명 수군 함대, 그리고 조선 수군 본대에 왜군은 완벽하게 포위되어버린 것이죠
심지어 때마침 불어온 북서풍에 조명 연합 수군은 화공을 펼쳤고 순식간에 왜군의 함대가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상촌집>에 의하면 '불타는 왜군 함대가 워낙 많아서 밤 바다가 환해졌다' 라는 기록이 있을정도였죠
이순신의 계책에 완전히 말려든 왜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해 버렸으며 이때부터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군 지휘관이던 시마즈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생각된 명나라 수군을 공격해 포위를 뚫고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렇게 명 수군을 향해 빠른속도로 공격해 들어가자 결국 명나라 장수 등자룡이 전사하고 그가 타고 있던 판옥선 마저 불타고 말았습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왜군은 죽자사자 조명 연합수군에 달려들었는데 그로 인해 조명 연합수군의 유례없는 피해를 입게 되었죠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주로 멀리서 포격을 가해 왜군 함선을 작살내는 전법을 구사했던 반면 왜군의 전술은 판옥선에 올라타 근접전을 벌이는 방법을 구사했었는데요
하지만 노량해전 당시엔 어두운 밤에 이루어진 전투이다보니 조선 수군의 전법은 잘 이용하지 못한채 각 군의 배들이 복잡하게 뒤엉킨채로 근접전이 주로 이루어 졌던 것이죠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벌어진 해전 중에서 가장 적선과의 거리가 가까웠던 전투이기도 했으며 그러다보니 근접전 능력이 그나마 더 뛰어났던 왜군에 의해 엄청난 사상자가 나오게 되었고 처참한 대 난전이 펼쳐지게 된것입니다
심지어 얼마나 가까웠으면 적의 얼굴 표정까지 적나라하게 다 보였다고 하죠
그러다보니 조선의 수많은 장수들도 전사를 하게 되었으며 그만큼 노량해전의 전투는 무지막지하게 치열하고 피 튀기는 혈전이었던 것입니다
이 기세를 몰아 왜수군은 진린이 타고 있던 대장선에도 달려들었지만 이순신의 함대가 와서 진린의 함대를 구해주었고 다시 포위진을 펼친후 다가오는 왜군 함대에 포격을 가했죠
결국 명 수군을 돌파한다는 시마즈의 계획도 실패하고 말았으며 퇴로가 막힌 시마즈 군은 다시 조선수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왜군에서 쏘아진 총탄 한발이 이순신의 몸을 꿰뚫고 말았고 그렇게 이순신은 쓰러지고 말았죠
그리고 이순신은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戰方急愼勿言我死 : 전방급신물언아사)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순신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굉장히 유명한데요 이 유언이 기록된 건 유성룡의 <징비록>입니다
흔히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말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라는 말인데 사실 '적에게' 라는 표현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죠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적에게 알리지 않는건 당연한 일이고 만약 숨기려면 "아군에게 알리지 마라" 라고 하는게 더 맞는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려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라." 라는 유언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듯 기록마다 유언의 내용이 약간씩은 다 다르다고 하죠
게다가 이순신의 유언은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유언의 정확한 문구는 알지 못하지만 이런식의 유언을 남긴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명 연합수군은 이순신의 죽음을 모른채 남은 왜군을 소탕하여 11월 19일 정오까지 전투가 지속 되었죠
그리고 치열했던 노량해전의 결과 선조실록에 따르면 군선 100여척을 빼앗고 200여척은 침몰시켰으며 수백명의 적군을 참수했고 물에 빠져 죽은 적의 수는 셀수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놀라운 전과를 보고들은 선조는 믿을수 없다며 이 수치는 과장되었다고 의심했을 정도로 왜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당시 구원군으로 온 왜군은 500여척이 되었다고 하니 거의 60%나 되는 함선을 궤멸시켰다고 볼수 있죠
거기다가 왜군의 이름 있는 무사들 수십명이 전사했으며 정확한 수치는 알수 없으나 선두를 맡았던 시마즈 군의 피해가 가장 컸는데 시마즈는 자신이 탄 대장선이 피해를 입자 다른 배에 구출된 이후 작은 배로 옮겨탄뒤 겨우 도망칠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목표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는일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때 고니시는 자신을 구하러온 시마즈를 총알받이 삼아 자신은 몰래 남해군 밑으로 돌아서 부산으로 도망친뒤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수 있었죠
하지만 고니시는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해 처형당했는데 노량해전에서 꽁지 빠지게 도망친 이후 고작 2년을 더 산 셈이되었습니다
어쨌든 퇴각 하던 왜군을 마지막까지 격멸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혔고 일본의 재침공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죠
하지만 조선의 피해도 엄청났는데요
이순신을 비롯한 방덕룡, 고득장, 이영남 등 수많은 장수들과 병사들이 전사했고 왜군 대장급 인물들을 몰살시키지 못한것 때문에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량해전이 너무나도 유명한 이유는 왜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것도 있고 임진왜란을 사실상 마무리 짓는 전투이기도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이기 때문인것 같죠
임진왜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신걸 보면 이순신 장군은 어쩌면 임진왜란을 막으라고 내려준 하늘의 선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선조의 질투 때문에 목숨이 위험했을거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 말이 맞을수도 있을것 같네요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이자 임진왜란을 종결짓는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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