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끝과 조선의 시작을 있게한 사건 한반도의 운명을 갈랐던 사건인 위화도 회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위화도 회군이란 고려 말기인 1388년, 요동정벌을 위해 출격한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다시 돌려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향하면서 일으킨 쿠데타를 말하는 것인데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도 유명합니다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 시절까지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인 편이었지만 공민왕 말기로 갈수록 점점 사이가 좋지 못하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32대 왕인 우왕 시기에는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는데요
그 와중에 명나라의 사신이었던 채빈이 고려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1374년에는 공민왕까지 시해당하자 당시 명의 황제인 홍무제는 고려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고려에 대해서 강경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 명나라는 고려의 재정에 직접적인 부담이 될 정도로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며 외교적인 압박을 가했죠
그나마 북원의 세력이 남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북원의 세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고려와 몽골 세력이 힘을 합친다면 명나라에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고 만일 명나라가 북원을 공격하려 할 때에도 고려가 방해가 될 위험 또한 있었기 때문에 1377년에는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던 고려인 358명을 풀어주는 등 명 태조가 고려에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387년 명나라에 대항하던 북원출신의 장수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고 1388년에는 북원이 완전히 멸망해 버리면서 명나라가 입장을 바꿔버리게 되죠
이런 상황 속에서 명나라는 1387년 12월 고려에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는 한편 고려의 사신을 입국시키지 말도록 하면서 고려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철령위 설치 사건이란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한 땅이었으니 이 지역을 모두 요동에 포함시켜 명나라의 땅으로 만들겠다고 주장한 것인데요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명나라가 주장한 것은 고려에게 있어선 1356년에 회복한 쌍성총관부 지역을 명나라가 다시 가져가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죠
쌍성총관부 지역이 고려의 영역이 된 이후 벌써 20년이 더 지났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철령위 요구를 전달한 명나라 외교관이 돌아가자마자 고려는 즉시 5도의 성곽을 수리하는 한편 주요 장수들을 서북의 국경지대로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동시에 명나라로 사신을 파견해서 철령 이북이 고려의 영토임을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하도록 했죠
최영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명나라가 요동지역에 설치한 관아인 정료위를 공격할지 아니면 화친을 맺을 것인지를 논의했는데 모든 재상들이 화친을 맺는 것에 찬성했기 때문에 조림이라는 신하를 명나라로 보내 화친을 맺고자 했지만 조림은 명나라로 가보지도 못한 채 요동에서 다시 고려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전부터 이미 명나라를 공격할 마음이 있었던 최영은 그 이후부터는 요동 공격을 주장하는 세력의 핵심이 되어 우왕과 함께 요동 원정을 논의했죠
이자송이라는 인물이 최영의 집을 직접 찾아와 요동 공격을 반대했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최영은 이자송을 곤장으로 두들겨 패서 유배를 보낸 다음에 바로 죽여버리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때마침 명나라가 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와서 철령위를 세우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때부터 우왕도 명백하게 명나라를 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죠
이후로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동안 우왕은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최영과 단 둘이서만 논의했지만 이번 요동 정벌은 예외적으로 처음으로 이성계에게도 이야기를 꺼냈는데요
워낙에 중대한 사안이었던 데다 이성계가 고려 말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견미 등을 소탕하는데 최영과 더불어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우왕이 이성계에게도 동의를 구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죠
그런데 요동을 공격하자는 우왕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오히려 네 가지 이유를 든 사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 정벌을 반대했습니다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꾸로 공격하는 것은 안 될 일이며 둘째로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좋지 못하고 셋째로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공할 수 있다
그리고 넷째로 장마철이라 무기가 상하기 쉽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다
참고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이성계의 발언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사대주의 발언으로 오해를 받아 비판받기도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전쟁을 벌이기엔 신생 강대국 명나라의 국력에 비해 부정부패와 잦은 전란으로 고려의 국력이 약해졌으니 선제공격은 무모하다는 상식적인 말을 한 것일 뿐이라고 하네요
그럼에도 우왕이 계속해서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주장하자 이성계는 한발 물러서 공격의 시점을 가을로 연기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성계는 실제로 요동을 공격해서 잠시나마 점령했던 제1차 요동정벌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서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 타협안을 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우왕은 이성계의 주장을 무시한 채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이성계 입장에서는 이때 자신이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죠
게다가 최영까지 3가지 근거를 들어 이성계의 사불가론을 반박하면서 결국 최영과 이성계 조민수를 지휘관으로 삼은 5만의 요동정벌군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요동정벌군이 출발하게 되자 최영이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사실에 큰 불안함을 느낀 우왕은 갑자기 최영의 출전을 말리며 만약 최영이 끝까지 출전을 한다면 자신도 요동정벌에 참여하겠다는 억지를 쓰기 시작했는데요
끝내 우왕의 억지를 이기지 못한 최영이 요동정벌 참여를 포기하면서 요동 정벌을 반대했던 이성계가 원정군을 지휘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총사령관인 최영 없이 군대를 이끌고 나선 이성계와 조민수 등은 압록강을 건너가 1388년 음력 5월 7일 위화도에 도착했죠
이곳에서 이성계, 조민수 등은 우왕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나 군대가 오도 가도 못할 지경에서 수백 명이 익사했으며 군량미도 떨어져 가는 상황이라 요동까지 가기는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대신 환관 김완을 보내 원수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며 정벌을 이어가도록 격려했죠
하지만 이성계와 조민수는 그런 환관 김완을 자신들의 진영에 붙잡아둔 채 지금 굶어 죽는 병사들이 많아서 군대가 진군하기 어려우니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다시 한번 했지만 최영과 우왕은 이마저도 단호히 거절을 해버렸습니다
조정의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두고 회군을 요구한 시점에서 이성계와 조민수의 반란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하는데요
이에 이성계는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 모은 뒤 내가 합당한 근거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지만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이미 늙어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주상 주변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는 주장을 했고 그의 의견에 장수들이 동의하면서 원정군의 회군이 결정되었습니다
일단 회군이 결정되자, 원정군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진군을 개시했죠
당시 원정군의 회군 루트에는 압록강과 청천강 대동강 등이 있어 강을 건너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으며 원정군은 총 5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라 빠르게 움직이기가 힘들었음에도 무려 400km나 되는 거리를 10일 만에 주파하는 괴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내키지 않은 채로 북상하던 원정군이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가는데 20일이 걸렸음을 생각하면 회군 당시에는 두 배 먼 거리를 오히려 절반의 날짜만으로 통과한 셈인데요
위화도 회군이 벌어질 당시 고려의 주력은 모두 원정군에 속했으며 그나마 남은 병사조차 왜구를 막기 위해 파견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우왕과 최영은 급히 끌어모은 8천여 명의 병사로 이성계와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영은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성계와 조민수의 선발대를 격파하고 이후 조민수의 본대까지 격파하는 활약을 보였지만 끝내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우왕과 최영은 결국 이성계, 조민수 군에게 체포되었죠
이후 이성계는 어린 창왕과 공양왕을 잠시 동안 허수아비 왕으로 앉혔다가 519년 결국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사실상 '요동 정벌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평가한다고 하죠
당시 고려는 수십 년간 왜구의 침략에 시달린 데다 홍건적의 침입 때는 20만 명이나 되는 홍건적에 의해 국경은 물론이고 수도인 개경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이 함락당하면서 국가가 멸망의 상황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매우 큰 피해를 입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요동을 정복하기는커녕 요동에 대한 무력시위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명나라군은 원나라를 비롯한 이민족들과의 싸움은 물론 치열한 내전까지 경험하면서 성장한 정예병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요동을 공격해 본 경험까지 갖고 있던 이성계의 정벌 반대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견이었다는 것인데요
그냥 명나라에 경고를 보내는 수준의 공격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냐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요동이 갖는 위치적 중요성을 생각하면 주원장이 고려의 공격을 그저 단순한 경고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은 편이며 최악의 경우 기선 제압을 위해 역으로 고려를 침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걸기에는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다는 평이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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