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직전의 나라를 되살려내고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군주 소수림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인물은 고국원왕 시절 여러 치명타를 입으면서 하마터면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었던 고구려를 단기간에 부흥시키며 광개토대왕에서 안장왕 때까지 이어지는 고구려 전성기의 토대를 만든 군주입니다
바로 고구려의 17대 왕인 소수림왕인데요
그동안 교과서나 많은 역사책에서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기틀을 세운 왕정도로 무난하게 묘사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소수림왕은 단순히 기틀을 다진 정도가 아니라 거의 멸망 직전에 다다른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추락했던 국력을 회복해서 이후 광개토대왕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기반을 닦은 그야말로 고구려 최고의 명군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군주라고 하죠
게다가 그가 왕으로 있던 시절 고구려는 영토라고는 만주 동쪽의 산골짜기와 평안도와 함경도 등 대부분이 산지뿐인 척박한 상황에 불과했음에도 그런 뛰어난 업적을 세운 것입니다
소수림왕을 시작으로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안장왕 등의 뛰어난 군주들이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가면서 160년 가까이 고구려의 최전성기 시절이 이어졌는데 이 시기동안 고구려는 오늘내일하던 산골짜기 막장 국가에서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죠
때문에 그 어려운 상황에서 반전의 기반을 만들어낸 인물인 소수림왕의 평가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올라가고 있다고 하네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수림왕은 장대한 체격을 가졌으며 지략 또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역사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인의 평균키가 165cm 정도였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기록으로 봤을 때 소수림왕의 키는 그 이상이었을 거라 짐작되죠
고국원왕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55년 1월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나랏일을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이러한 경험 때문에 훗날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재위 초기부터 군주로서 나랏일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전연의 침략을 받은 이후 고구려의 태자가 사신으로 갔다 왔다는 기록 때문에 그 태자가 고국원왕의 장남인 소수림왕이라고 짐작하는 의견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당시에 장남이 사신으로 다녀온 경우가 많았기도 하고 훗날 소수림왕이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 태학 설립을 하면서 고구려의 체제를 정비했던 것도 태자시절 그가 전연에 사신으로 가서 경험한 것들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하지만 고국원왕 시절 세자를 사신단으로 보냈다는 기록은 340년인데 소수림왕이 태어난 정확한 년도를 알 수 없기에 짐작을 할 뿐이긴 하지만 340년은 그가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이거나 갓난아기에 불과했을 때입니다
고구려의 관례상 성년이 되는 나이는 15세 정도가 돼야 태자로 책봉되기 때문에 이때 전연에 사신으로 보내진 세자는 소수림왕의 이복형일 가능성이 크며 아마도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소수림왕이 태자 자리를 물려받은 것으로 짐작되죠
371년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사망하게 되자 소수림왕이 그 뒤를 이어 고구려의 17대 태왕이 되었습니다
당시 고구려를 둘러싼 주변의 정세를 살펴보면 370년 티베트계 저족의 우두머리 부견이 건국한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켰고 이후 점점 세력을 키워가며 화북 일대를 통일한 전진은 남쪽의 동진을 멸망시키는 것을 다음 목표로 삼게 되죠
그런데 만약 그들이 동진을 공격하러 병사들을 이끌고 출격했을 때 고구려에 빈집털이를 당하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구려에게는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하는데요
고구려 입장에서도 전진은 조상들의 원수인 전연을 멸망시켜 준 나라였던 데다 화북 일대를 통일한 강자인 전진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기까지 하니 굳이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그들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죠
그리고 백제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이 왕으로 있으면서 강성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던 시기라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것은 물론 오히려 강대한 주변국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 소수림왕이 즉위할 무렵 고구려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구상했던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외부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죠
소수림왕은 372년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파견한 승려 순도에게서 각종 불상과 경문을 전해 받는 등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375년에는 순도를 위해 초문사와 이불란사라는 절까지 지으면서 전진과 평화적인 관계를 만드는 동시에 불교를 호국사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에 익숙한 관리들을 육성했으며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을 만들었죠
이러한 정책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고국원왕 시절 엉망이 돼버렸던 고구려의 국력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소수림왕이 막 왕으로 즉위하던 때까지만 해도 고구려는 전연과 백제에게 연달아 털린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국원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를 '고구려의 잃어버린 40년'이라고 부를 정도였죠
하지만 소수림왕은 단 5년 만에 흔들리던 나라를 바로 세웠고 어느 정도 국력이 회복되기 시작하자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지 재위 5년째인 375년에는 백제를 공격해 수곡성을 점령했습니다
망해가는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갑작스런 기습을 받은 백제의 근초고왕은 반격을 가하고 싶어 했지만 하필 당시 백제에 흉년이 들면서 결국에는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소수림왕은 부왕때 당했던 굴욕을 조금이나마 갚는 데 성공하게 되죠
다만 1년이 지난 376년 고구려는 근구수왕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백제의 북쪽 변경지역을 다시 공격했지만 이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년 사이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한 백제의 근구수왕은 이를 참을 수 없었는지 고구려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위해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죠
소수림왕은 백제군의 공격을 잘 막아낸 후 오히려 그해 11월에 백제를 역으로 공격하기까지 했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하네요
이후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가 재위 14년째인 384년 11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여태까지 많은 역사책에서는 소수림왕이 그저 고구려의 기틀을 세운 왕정도로만 소개됐지만 소수림왕의 업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나라가 멸망할 위기를 극복한 것뿐만 아니라 100년이 넘는 전성기를 보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훌륭한 군주란 것을 알 수 있죠
소수림왕은 주변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체제를 완벽하게 정비해 고구려가 장기적으로 발전을 해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단기적으로는 본인 세대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고구려의 국력을 회복시키까지 했다는 것인데요
소수림왕의 무능한 아버지 고국원왕 시기에는 전연에게 털려 수도가 함락되고 왕비가 포로가 되었으며 전대 국왕인 미천왕의 능이 도굴되었고 심지어 왕마저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치욕의 역사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대로 나라가 망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지만 소수림왕은 단 5년 만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잡고 백제를 공격해 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단숨에 국력을 회복시키는 실로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던 상황 이후에 혼란을 수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소수림왕의 능력은 세계사에서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만큼 대단했기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광개토대왕보다 소수림왕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그가 대단한 점은 원래 기본적으로 한번 국가의 체제가 무너졌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국가를 지키는데 필요한 병사와 나라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인데 이 두 가지를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인구수를 필요로 합니다
인구가 많아야 그중에서 병사들을 뽑을 수가 있고 지휘관으로 쓸 좋은 인재도 구할 수 있으며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필요한 곳에 쓸 수 있죠
당시 후연과 백제의 침입으로 고구려는 만주의 동쪽 산골짜기로 밀려난 상황이었는데 한반도 북부는 도저히 사람이 살 곳이 못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인구수도 한반도 내의 백제와 신라에 비해 밀도가 적은 데다가 대부분의 국토가 산지였기 때문에 생산량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소수림왕이라는 명군이 나타나 당시 고구려보다 더욱 인구수와 자연조건이 좋은 나라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고구려라는 나라를 그들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 개혁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런 대단한 업적에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된 것이죠
이후 고구려의 왕위가 고국양왕을 거쳐 광개토대왕으로 이어지면서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전성기를 보낸 점에서 봤을 때 고려에 현종 그리고 조선에는 세종이 있었다면 고구려에는 소수림왕이 있었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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