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이 외교권을 팔아먹었다면 윤덕영은 나라를 팔아먹었다!!
이완용보다 더 심했던 매국행위 반민족행위자 윤덕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조선말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버린 이완용을 떠올리실 텐데요
그런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 이완용보다 훨씬 더 악랄한 매국노가 존재했으니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윤덕영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받은 땅이 이완용보다 더 많았을 만큼 누구보다 더 악랄한 매국행위를 했던 윤덕영이지만 사람들이 매국노하면 이완용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게 된 이유는 이완용은 워낙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해 유명해졌지만 윤덕영은 반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럼 지금부터 그가 어떤 매국행위를 했는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윤덕영은 1873년 12월 27일 서울에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윤용선은 오랫동안 의정 대신을 역임한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였기 때문에 윤덕영은 할아버지의 덕을 보면서 189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기도 했죠
게다가 윤덕영의 동생 윤택영의 딸인 조카가 황후에 책봉되기까지 하면서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듯 출세를 거듭하게 됩니다
윤덕영은 조카가 황후가 된 다음 해인 1908년 시종원경이 되었고 황후의 태부자리까지 겸하게 되면서 궁중을 그의 손아귀에 넣게 되죠
물론 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황후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며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윤덕영이었다고 합니다
190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에 사망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장충단에서 이토를 추모하는 모임을 열기도 했죠
당시 일본은 송병준과 이용구, 이완용을 내세워 일진회를 조직하는 등 일제와 대한제국의 병합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을 하며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이었는데요
일제는 조정의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회유 및 협박하면서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도록 해서 합방 계획을 점점 진행시켜 나갔으며 이제 남은 것은 고종을 포섭하여 허락을 받는 일뿐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제3대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합방을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진행시키려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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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서는 황실을 설득해야만 했기 때문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대한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쉽게 말하면 순종의 장인과 형제사이인 윤덕영이 황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계획을 완성시키려 했습니다
그렇게 윤덕영을 비밀리에 관저로 초대한 후 대한제국과 일본의 합방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그에게 적극적인 협력을 구했죠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윤덕영에게 이제 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되었으며 각 방면 대표자의 합의가 이미 있었다고 말하고는 그에게 고종과 순종을 설득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당시 이완용은 고종에게 7일간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이제는 결단을 내려달라며 계속해서 그를 재촉했는데요
하지만 고종이 비록 나라를 빼앗긴 무능한 황제이기는 했어도 한나라의 군주로서의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끈질기게 설득을 계속하는 이완용을 앞에 두고서도 그에게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하죠
그런 고종의 단호함에 이완용도 결국 포기를 한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소식을 들은 일본에서도 크게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윤덕영이 본인이 직접 고종을 설득하겠다며 나섰고 처음에는 고종을 찾아가 좋은 말로 그를 달래며 설득을 했지만 고종이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점점 본색을 드러내며 고종을 협박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먼저 윤덕영은 덕수궁에 있는 모든 창고를 봉인해 버린 후 물건을 관리하던 상궁들마저 모두 내쫓았는데 이런 그의 협박에도 고종이 꿈쩍도 하지 않자 이제는 고종의 과거 여자 문제를 들먹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꿈쩍하지 않던 고종이 갑자기 주저앉으면서 그의 시선을 피하자 기회를 잡은 윤덕영은 고종 앞으로 가서는 자신의 청을 들어줄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을 하며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고종의 앞에 계속 서 있었다고 하네요
윤덕영의 집착과 집요함에 두 손을 든 고종은 나라를 넘겨줬다는 오명을 쓰기는 싫었는지 아들 순종을 대신 내보내 윤덕영을 상대하도록 했다고 하죠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이 고종을 몰아붙이던 윤덕영의 태도는 내시들과 상궁들을 비롯한 궁의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으며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활약상을 전해 듣고는 그 냉혹함과 집요함에 치를 떨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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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 회의에 윤덕영과 민병석은 고종을 모시고 참석했으며 이후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갑자기 문서에 서명하는데 쓰일 옥새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 숨어서 이를 몰래 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옥새를 들고 도망을 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치마 속에 옥새를 숨기며 온몸을 던져 불의에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감히 누구도 황후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때 그녀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이 직접 나서서 황후에게서 옥새를 뺏었다고 하죠
그렇게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해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뿐만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땅까지 받게 됩니다
윤덕영은 신하로서 고종에 대한 예의나 의리 같은 것은 내다 버린 채 고종에게 계속해서 나라를 팔아넘길 것을 재촉하는 어전 회의를 개최하는 등 경술국치의 배후에서 활약한 공로(?)가 매우 컸으며 윤덕영 본인 또한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1등 공신이었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죠
1917년 이완용이 고종에게 말하길 고종이 직접 도쿄로 가서 다이쇼 덴노에게 한일병합을 시켜줘 고맙다고 직접 말해라"라고 권하자 고종이 자신은 절대 그런 짓을 할 수 없다고 격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러자 윤덕영은 고종을 압박하기 위해 왕가의 재산들에 직접 빨간딱지를 붙이고 궁인들에게도 이 딱지를 떼면 가만 안 두겠다며 그들을 협박했죠
그래도 고종이 계속 친일파들의 요청을 거부하자 윤덕영은 또다시 고종의 과거 여성편력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계속했습니다
결국 고종은 아들 순종을 도쿄로 보내겠다며 사실상의 항복을 하고 말았죠
악덕 친일파로 유명한 윤치호도 윤덕영의 악행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저자의 친일은 차마 표현할 수 있는 영어단어가 없을 정도이다" 라고 혀를 찰 정도였다고 합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비밀스러운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이왕궁 비사'의 저자 곤도 시로스케도 이런 윤덕영의 행동에 대해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 한일 병합 이후 중대한 안건을 해결하였다" "그 집요함, 대담함, 거칠 것 없음 그리고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많은 궁궐 내의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 수단의 악랄함, 냉혹함, 거기에 끈질김은 참으로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죠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았던 사람이 바로 윤덕영인데 옥인동의 약 54%, 지금의 서촌 부지, 수성동 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그리고 인왕산 자락까지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그곳에는 그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고 하죠
이완용이 가진 땅의 4배나 되는 규모로 축구장 8개의 면적 정도 되는 19,467평이 모두 그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땅에 벽수산장이라는 매우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는데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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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와 땀, 눈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팔아넘긴 대가로 일제로부터 자작직위와 매국 공채 5만 원을 받은 그는 1917년에는 순종에게 일본 왕실의 참배를 할 것을 강요했으며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거쳐 출세를 거듭한 끝에 1925년에는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다고 합니다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하거나 공헌한 조선인 공로자들의 명단을 선정한 '조선공로자명감'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윤덕영이 1910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대한제국과 일본의 병합을 맞아 온갖 정성을 다해서 일을 성사시켰다며 윤덕영에 대한 극찬이 실려있을 정도라고 하는데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위원을 지냈으며 그의 아내 김복수는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의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다고 하니 그야말로 끼리끼리 잘 맞는 상대를 만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왕실과 나라를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 죽음을 맞으면서 그 화려한 친일의 막을 내렸죠
몇몇 역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윤덕영은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라 불릴만하며 이완용이 외교권을 팔아먹었다면 윤덕영은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완용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반면 윤덕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이유는 이완용이 전면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다면 윤덕영은 그저 뒤에서 조용히 맹활약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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