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로 태어나 권율의 측근에 이항복 제자까지 되었고 중립외교의 선봉에섰으며 이괄의 난에서 활약했던 종 2품까지 오른 조선시대 인생역전의 대명사 정충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오늘은 천민으로 태어났지만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활약을 해내며 생전에는 종 2품 벼슬자리에까지 올랐고 죽은 후에는 충무공의 시호를 받으면서 조선시대 최고의 인생역전 스토리를 써낸 정충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정충신은 아버지가 중인신분이었지만 어머니가 노비였기 때문에 노비종모법에 따라 노비의 신분이 되었죠
어린 나이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관아의 하급 아전으로 일하던 그는 17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 권율 아래에서 일하게 됩니다
하루는 권율이 장계를 왕이 임시로 머무르고 있던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당시 광주에서 행재소가 있는 의주목까지 가려면 이미 평양까지 점령한 상태인 일본군의 감시망을 뚫고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지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때 17살의 어린 나이인 정충신이 패기 넘치는 태도로 자원을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는 대나무 속에 장계를 감춘채 왜병이 보이면 숨거나 전투를 벌여 그들을 제거하면서 무려 20일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로 평안도 의주까지 장계를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선조는 큰 공을 세운 이 노비소년을 노비신분에서 해방시켜 줬고 병조판서이자 권율의 사위였던 이항복은 정충신의 싹수가 보통이 아니라 판단하고는 그를 잘 키워보자고 결심했죠
미천한 노비에서 역사적인 명장인 권율에게 총애를 받는 심복이 되었다가 전쟁 도중에 공을 세워 피신해 있던 선조의 명령으로 신분이 상승된 후 유명한 대학자 이항복의 제자로 들어가는 등 그야말로 소설의 주인공들이나 겪을만한 일들이 정충신에게 연달아 일어난 것인데요
1592년 행제소에서 실시한 무과에 응시해서 합격한 정충신은 1602년 조선의 사신 자격으로 명나라를 방문했으며 이후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1608년 조산보 만호직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1618년에는 스승인 백사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비론을 반대했다가 유배를 가는 일이 발생했죠
이때 이항복은 중풍에 걸려 혼자 지내기 불편한 상황이었는데 정충신은 몸이 불편한 스승을 위해 유배지까지 따라가서 스승을 간병했다고 하네요
그러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이 출병한 사르후전투에서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나자 여진족에 대한 정보에 밝았던 정충신을 조정에서 다시 불러들이게 되죠
1621년 만포첨사가 되어 국경수비를 담당하던 그는 광해군의 명을 받아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오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는 동시에 조선이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조정의 대신들이 아니라 광해군의 명을 받은 정충신을 비롯한 북방의 장교들이 주도했다고 하는데요
광해군 하면 폭군과 중립외교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지만 정작 광해군 시대에는 제대로 된 외교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북인 세력이 한 일이라고는 오랑캐와 싸우자며 헛소리를 하다가 정작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게 대패하자 우리 탓이 아니라는 변명을 늘어놓는 게 그들이 했던 외교활동이었으며 광해군은 그런 북인들을 대놓고 밀어주고 다른 당파는 배제하면서 균형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하죠
광해군이 외교적인 안목은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은 엉망이라 정작 중요할 때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 줄 인원들과 척을 지는 바람에 조정의 중신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광해군은 정충신 등의 북방장교들을 중심으로 외교를 진행하면서 홍타이지를 포섭하려 하거나 홍타이지와 그의 이복형인 다이샨을 이간질시켜서 후금 후계자 구도에 내분을 일으키려는 공작을 시도하거나 후금의 내부 군사정보 등을 빼내는 비밀 첩보 활동 등을 주로 벌였다고 하죠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훗날 청나라의 2대 황제가 되는 홍타이지를 견제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도 바로 정충신이었다고 하는데요
광해군 13년 8월 28일 광해군은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인 홍타이지를 조선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바꿈과 동시에 티 나지 않게 후금의 권력 다툼에서 홍타이지를 견제하도록 유도해 볼 것 그리고 후금 내의 정보를 몰래 빼내오라는 명을 정충신에게 내렸고 정충신은 그 임무를 무사히 잘 수행해 냈다고 합니다
인조반정 때도 묵묵히 최전방에서 업무를 수행하던 정충신이었지만 1624년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이괄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조정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죠
당시 정충신은 계속 근무지에 남아있으면 반란군 세력에게 포위당해 죽임을 당하거나 그들의 편에 서라는 협박을 받게 될 것이 뻔한 운명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정충신 또한 반역의 무리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던 정충신은 결국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성을 버리고 탈출을 하게 됩니다
이후 정충신은 황해도로 후퇴한 도원수의 명을 받아 평안도를 오가면서 군무를 돕다가 이괄이 본격적으로 병사들을 움직이자 충장공 남이흥과 함께 황주에서 그를 막으려 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죠
왜냐하면 이괄은 1만 2천 명이 넘는 대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정충신과 남이흥은 원래 비어있는 평양성을 다시 점령하라는 임무를 맡은 탓에 1800명밖에 되지 않는 병사들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열 배 가까운 차이가 나는 이괄 군을 상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괄의 진격을 막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충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황주 전투도중 패배하는 와중에도 적군을 설득해 1천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냈고 그들을 같은 편으로 받아 들 인후 계속해서 이괄의 뒤를 쫓았다고 하죠
2월 7일 마탄 전투에서 관군이 반란군에게 대패하면서 패닉상태에 빠진 인조는 2월 8일 급히 공산성으로 피난을 떠났으며 2월 10일 이괄은 마침내 임진강을 넘어 한양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인조는 도망가는 와중에 적과 내통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북인인 기자헌 외 37명이나 되는 신하들을 모두 죽여버렸다고 하는데요
명분 없는 인조의 학살을 보고 실망한 백성들과 조정의 관료들 중에서는 이괄을 지지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나기 시작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각 관청의 관리들은 의관을 갖추고 나와 이괄을 맞이했으며 도성의 백성들은 길을 닦고 이괄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죠
이후 이괄은 한양에 머물며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살아남은 북인들을 등용하는 한편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려고 했지만 애초에 왕인 인조를 잡는데 실패한 상황에서 왕을 추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한양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스스로 관군의 포위를 기다리는 행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한양에 도착한 정충신은 도원수 장만에게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안령(무악재)을 점거하면 한양을 내려다볼 수 있으니 불안해진 적들은 성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고 만약 적이 공격해 오면 우리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으니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죠
남이흥도 그 의견에 동의하면서 2월 10일 저녁 정충신은 야밤에 병사 2천 명을 끌고 나가 안령을 점거하는데 성공합니다
정충신의 예상대로 이괄은 관군이 안령에서 계속 자리를 잡고 있으면 한성의 백성들이 혼란에 빠진 끝에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걱정에 빠졌고 결국 한성을 지키는 것을 포기한 채 정면대결을 결심하게 되죠
이괄은 안령을 점령한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며 곳곳에 방을 붙여 곧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니 구경하고 싶은 자는 오라는 식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고 하죠
그렇게 2월 11일 수많은 백성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양군의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이괄의 군대는 북방에 배치되었던 조선의 최고 정예군이었지만 이에 맞서는 관군은 급하게 긁어모은 허접한 병력인 데다 병력수도 2천 명밖에 안 되는 등 모든 면에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전투가 벌어지자 선봉을 맡은 선천 부사 김경운이 전사하고 토벌군의 모든 병력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죠
하지만 정충신이 높은 곳에 튼튼한 진지를 지어 놓았기 때문에 초반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이괄 군의 진격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고 전투가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이괄의 예상과는 달리 4시간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으면서 많은 피해를 입은 이괄 군도 점점 지쳐갔습니다
이때 갑자기 이괄의 진영을 향해 엄청난 돌풍이 불었는데 이 틈을 탄 관군이 이괄 군을 향해 고춧가루를 뿌리는 화학전을 펼치면서 분위기가 점점 이괄 군에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죠
그런 상황에서 이괄 군의 부장인 한명련이 화살에 맞아 부상으로 전선을 벗어난 데다 때마침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란 군관이 탄환에 맞아 죽자 번뜩이는 생각이 떠오른 남이흥은 "역적 한명련이 죽었다 한명련이 죽고 역적 이괄이 도망친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고춧가루 공격을 받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이괄의 군대는 그 소리를 듣고는 정말로 자신들의 장수가 도망갔다 생각하고는 대혼란에 빠져서 이괄 등 장수들의 명령도 무시한 채 모두 도망가버렸죠
정충신의 수비력과 남이흥의 번뜩이는 계책에 힘입은 기적 같은 역전승이었습니다
성벽 위에서 전투를 구경하고 있던 한성 주민들은 이괄 군이 패배하자 서대문을 지키던 이괄 군을 몰아낸 다음 성문을 걸어 잠가버렸는데요
이괄은 간신히 다시 한양으로 들어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병사들 대부분이 도망가버린 데다 백성들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을 깨닫고는 한양을 버려둔 채 도망을 치게 됩니다
기세가 오른 관군은 이괄을 끝까지 추격하려 했지만 정충신은 이괄이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무리하게 쫓으면 피해만 커질 것이고 어차피 이괄은 머지않아 죽을 운명이라고 말하며 추격을 말렸죠
결국 이괄은 정충신의 예상대로 경기도 광주까지 도망쳤다가 밤중에 잠을 자던 도중 부하 장수에게 배신당해 한명련과 함께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정충신은 반역자인 이괄과 평소 친한 사이라는 것 때문에 역적으로 의심을 받던 상황에서 오히려 이괄의 난을 제압하는 공을 세우며 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죠
지금까지 천민으로 태어나 조선 최고의 인생역전 스토리를 써낸 정충신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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