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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당고종. 당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와 전쟁을 벌인 황제

by 사탐과탐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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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와 전쟁을 벌인 황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인물 당고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당태종이 고구려에 쳐들어와 안시성에서 개작살 난 이후

그가 죽을때 유언으로 고구려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했었죠

 

하지만 그의 아들인 당고종은 고구려를 또다시 쳐들어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구려는 그에 의해 멸망하고 말죠

 

당고종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이전에

백제까지 멸망시켰던 황제로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요

 

오늘은 이 당나라 고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당고종의 이름은 이치로, 628년 문덕황후 장손씨의 3남이자

당태종의 9남으로 태어났죠

 

그는 원래 9번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황제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당태종은 원래 위징이라는 뛰어난 신하를 태자 이승건에게 붙여

태자의 교육을 맡김과 동시에, 그의 조력자가 되어주도록 했지만

얼마안가 위징이 사망하자 태자의 위치가 불안정해졌죠

 

당시 당태종은 4남이던 이태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이에 태자 이승건은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고 여겨

한왕 이원창, 재상 후군집과 손을잡고 정변을 일으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정변은 실패하고 말았고 이승건은 폐위되어 서인으로 떨어져버리죠

 

그리고 태종은 이태를 황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외척이자 대신이던 장손무기가 반대했는데

이후 이태가 새로운 경쟁자이던 진왕 이치를 협박하는 일이 벌어져

이태 역시 황태자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당태종은 비록 서자이긴해도

능력만큼은 가장 뛰어났던 오왕 이각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자신과 친한 조카이던 이치를 태자로 삼고 싶어했던 장손무기는

이각이 태자가 되는것을 극렬히 반대했고

결국 9남이던 이치가 황태자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당태종은 이치를 태자로 삼긴했지만

이치는 성격이 소심한탓에 제대로 된 정치를

해나가지 못할것이라고 여겼고

그가 너무 염려가 된 나머지

장손무기를 비롯한 방현령과 이적, 소우 등

많은 유력한 중신들을 이치에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국정에 관해 의견을 말하도록했고

빡쎄게 교육을 시켜 황제의 자질을 갖출수 있도록 해주었죠

 

649년 7월, 당태종이 세상을떠나자

21살의 어린나이로 당나라 고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나 당태종의 우려와는 다르게

당고종은 황제가 된 이후 그나마 유능하게 당나라를 꾸려나가는데요

 

소심하던 사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외적으로 엄청난 전쟁을 일으켜 버립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백제였죠

 

당고종은 백제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신라를 계속 공격했기 때문에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사신을 보내도

백제가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심지어 간섭하지 말라는 답장까지 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손을 잡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당항성을 함락시켜 조공길까지 막아버리기 까지 했던 것이죠

 

그러던 654년 신라의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신라 왕위에 오르자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해 33개의 성이 함락당하는 등

신라는 엄청난 위기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때 김춘추는 당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당고종은 원군은 보내주지않고 백제를 공격할 타이밍만 보고 있었죠

 

그러다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뒤

방비도 소홀히 하며 나태한 모습을 보이자

이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당고종은 660년, 소정방에게 13만의 군사를 주고

백제를 공격하라 명했습니다

 

심지어 이때 고구려와의 국경지대에도 많은 수의 병사들을 배치시켜

고구려가 백제를 돕지 못하게 하기까지 했죠

 

그 소식을 들은 신라에서도 김유신에게 5만의 병력을 주어 백제를 공격하게 했고

그렇게 나당연합군이 결성 되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나 전쟁에 방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백제군은 나당연합군에 대패해

순식간에 엄청난 수의 병력을 잃었으며

계백 등 많은 장군들에게 결사항전을 하도록 했지만

결국 수적 열세로 인해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렇게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죠

 

당고종이 그다음 눈을 돌린 나라는 바로 고구려 였습니다

 

아버지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고구려에 복수를 해야했던 것이죠

 

그래서 백제가 멸망하기 전 당고종은 여러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도 못하고 퇴각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백제가 멸망하고나니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사이에 끼어버리면서 고립상태가 된것이죠.

 

이때를 기회라 여긴 당고종은 661년 8월 이적, 정명진, 소정방, 설인귀, 계필하력 등

수많은 장수들과 당나라 각지에서 차출된 병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약 3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로 진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여러 장수들이 부여성과 신성을 공격할때

샛길을 타고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해

순식간에 보장왕을 잡아 항복을 시키려는 계략을 꾸몄죠

 

그렇게 평양성까지 빠르게 진격하는데 까지는 순조롭게 해낼수 있었지만

문제는 평양성이 워낙 견고해 함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기간에 끝내려 했던 전쟁이 장기전이 되어버린 것이죠

뿐만아니라 샛길로 돌아간 소정방과 당나라군은

보급로가 끊겨버려 군량이 소진된데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싸울 힘조차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구려군의 공격에 죽거나 굶어죽을날만 기다리고 있을때

하늘이 도왔는지 때마침 신라의 김유신이 도착했고

당군은 신라군의 군량미로 배를 채운뒤 황급히 퇴각하고 말았죠

 

심지어 다른 장수들도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뚫어내지 못하고

전투에서 계속 패배만 해버렸고

전의를 완전 상실한 당나라군은 결국 전군을 후퇴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 군에 완전 참패를 당하고 말았고

당고종도 아버지 당태종의 말대로 고구려는 건드려선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런데 얼마안가 엄청난 소식이 들려옵니다

 

바로 자신들을 패배시켰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죽었다는 소식과

그의 아들 연남생이 지위를 이어받았다는 소식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연개소문의 동생이던 연정토가

모든 권력을 자신(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에게 물려 준것에 앙심을 품고

연개소문의 아들 세명을 이간질 시켜

서로 싸우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결국 연남생은 권력다툼에서 밀려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고

이를 기회라 여긴 고종은 이적과 설인귀, 소정방 등 많은 장수에게

50만의 군사를 줘 고구려를 공격해버렸죠

 

그 소식을 들은 연정토는

지레 겁을 먹고 당나라군을 막을 생각을 전혀 하지못하고

20여개의 고구려 성을 신라에 바치고 투항해버리기 까지 했죠

 

또한 신라에서도 김유신에게 20만의 병력을 주어

고구려 남쪽 지방을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고구려는

속추무책으로 당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결국 668년 부여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성이 함락되었고

그해 8월엔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9월에 보장왕의 항복을 받아 마침내 고구려도 건국 70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고종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결국 신라까지 넘보게 되는데요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고종은 이대로 신라까지 장악해버리자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미 눈치를 까고 있던 신라군은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과 힘을 합쳐

요동과 웅진 도독부를 선제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7년이나 이어진 나당전쟁에서

신라는 675년 매소성전투와 676년 기벌포해전때 당나라군을 작살내버렸고

당고종은 결국 신라를 정복하지 못하고 전군을 물리는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당고종의 욕심으로 시작된 나당전쟁은

서로 큰 손해만 보고 결말을 맞게 된것입니다

 

당고종은 한반도 외에도 토번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하필이면 이때 토번에는 최강의 무장이던 가르친링이 실권을 잡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꽤나 능력있는 장수였던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군은

670년, 대비천 전투에서 토번군에 포위되어 쓰디쓴 완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때 설인귀는 관직을 빼앗기고 서인으로 전락하지만

나당전쟁이 발발하면서 복귀할수 있었죠

 

어쨌든 나당전쟁도 마무리 된 이후인 679년에 다시 1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공격했지만 또다시 참패를 당했고

당고종은 토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이후부턴 견고히 방어만 하는 방법을 쓰게 됩니다

 

당고종은 여러 전투에서 많이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황제로

우리나라 사람들 기억속에 자리잡게 된것이죠

 

이런 대외정책말고 대내정책으로는

'영휘의 치' 라고 여러가지 훌륭한 정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는 중국의 3대 악녀로 불린 측천무후를 총애해

그녀가 훗날 정권을 잡고 수많은 신하들을 숙청해버리기도 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당나라엔 후사를 두지 못한 황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가 있었기에

아버지 당태종의 후궁이던 무조는

당태종 사후 감업사에서 비구니로 지내고 있었죠

 

당고종이 태자일때 무조를 잠깐 본적이 있는데

그때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당고종은 감업사로 찾아간 뒤 비구니가 된 무조를 궁으로 데려와

그녀를 정2품 소의에 책봉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홍을 얻기도 했죠

 

당고종의 총애를 등에 업은 무조는 소숙비를 몰아내고 비가 되었고

나중엔 황후 왕씨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모함해

당고종은 왕씨까지 폐위시키고 무조를 황후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승상이던 장손무기를 비롯해

황태자였던 이충까지 여러 죄를 뒤집어 씌운뒤 폐위 시키는 등

자신과 반대파였던 신하들은 무자비하게 숙청했죠

 

게다가 집권 초까지만해도 의욕적으로 정치를 행한 당고종은

660년 백제를 공격할 무렵부터는 자주 병에 걸려 병석에 누우면서

측천무후를 대리인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많이 의존하기 시작했는데요

 

뿐만아니라 674년, 병세가 심해져 더이상 정사를 돌보기 힘들게 되자

자신은 천황(天皇), 측천무후를 천후(天后)로 칭해 모든 정치를 맡겨버렸고

사실상 정권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제위를 측천무후에게 넘기려고 까지 했다가

재상이던 학처준의 반대로 취소하기도 했죠

 

그리고 당고종은 재위 34년째인 683년 12월,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생각보다는 유능했던 인물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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