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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왕평. 삼국지연의 최대 피해자 중 한명! 위기의 촉나라를 여러번 살렸던 촉한 제일의 방패!!

by 사탐과탐 2024.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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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최대 피해자 중 한명! 위기의 촉나라를 여러번 살렸던 촉한 제일의 방패!!
왕평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삼국지 연의를 보면 촉나라에는 수많은 명장, 용장, 지장들이 나오는데요

 

오호대장군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뿐만아니라

강유와 엄안, 그리고 위연, 마대, 관흥과 장포 등

많은 장수들이 촉나라를 위해 활약했었죠

 

그런데 삼국지 연의에서는 많이 나오지 않아 위에서 말한 장수들에 비해

인지도가 조금 떨어지지만

정사에서는 위나라에 맞서 최일선에서 싸운 촉나라의 명장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촉한 제일의 방패'라고 불리고 있는 왕평이죠

 

왕평은 촉나라 말기 촉나라의 국경을 책임진 핵심 무장중에 한명인데요

 

오늘은 연의에서는 찬밥신세 이지만

정사에서는 그 누구보다 멋진 활약을 했던 인물 왕평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는 언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익주 파서군 탕거현 출신으로 알려져 있죠

 

어렸을때는 외가인 하씨 집안에서 자랐기에 하평 이라고 불렸는데

성인이 된 이후 다시 왕평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왕평은 촉나라의 장수가 되기전에

조조의 휘하 장수였는데요

 

이민족들의 왕인 두호와 부호라는 인물들이

파군의 이민족들을 데리고 조조에게 귀순했는데

이때 왕평도 조조의 부하가 된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두호와 부호는 한중을 다스리던 장로 휘하에 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좀 특이한점은 왕평이 문맹이었다는 점이죠

 

그는 아는 글자가 10자를 넘지 못했다고 하고

글을 써야 할때는 자신이 말한것을 다른사람에게 적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글씨를 못썼을뿐 글쓰는 재주는 있었는지

그가 말한걸 쓴 글은 뜻과 도리가 모두 맞았다고 하죠

 

또한 사람을 시켜 [사기]와 [한서]를 비롯한 수많은 역사서들을 들었는데

글의 요지를 모두 잘 파악했다고 하는걸 보면

머리는 똑똑했던 걸로 보이고

다만 시기를 놓쳐 글을 배우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훗날 그가 하는 활약에는

여러차례 지장의 면모를 볼수 있죠

 

어쨌든 훗날 한중공방전이 벌어졌을때

조조를 따라 참전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촉나라에 투항하게 됩니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서황의 부장으로 있다가

그와의 불화로 인해 촉나라에 투항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이는 창작일뿐이고 정확히 어떤 이유로 촉나라에 항복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죠

 

그런데 유비는 항복해온 왕평을 굉장히 좋게 봤는지

항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문장 비장군으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사실 왕평은 이때까지만해도 출신도 불분명한데다가 글도 모르는 문맹이었으며

조조군 휘하에서도 공적을 세운것도 아닌 겨우 하급군관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왕평을 떡하니 비장군에 임명했던걸 보면

유비의 사람보는 눈은 대단했던걸 알수 있죠

 

그런데 이후 왕평의 기록은 전무한데요

 

제갈량이 1차 북벌을 떠날때 비로소 왕평이 다시 기록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관직이 높지 않았던 왕평은 참군 마속의 부장이 되어 종군하게 되죠

 

이때 위나라 장수 장합이 가정을 향해 진군해오자

제갈량은 마속에게 명해 그곳을 막으라 지시했는데

1차 북벌의 운명을 좌우할 가정전투에 왕평이 참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산으로 올라가 진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왕평은 산에 군이 주둔한다면 병사들이 이동하기에도 번잡하고

만약 적이 공격해 올때 빠르게 대처할수 없을거라며

계속해서 다른곳에 주둔해야한다고 간언을 했죠

 

하지만 마속은 왕평의 말을 듣지않았고 산위에 진지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장합군이 가정에 도착해서 산위에 마속이 진을 친걸보고

옳다구나 여긴 장합은 즉시 마속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고

이에 산위에 마속군은 식수가 떨어져

얼마 못가 탈진상태에 빠지고 말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이틈을 노린 장합의 군대는 곧장 마속을 공격했고

그렇게 마속이 이끄는 촉군은 개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마속이 산위에 진지를 세운것이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위군쪽에서도 이걸 의아하게 생각했었다고 하죠

 

어쨌든 마속을 포함한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은

장합의 공격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때 오직 왕평이 지휘하는 1천명의 병사들은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킨뒤 북을 치며 함성을 울리자

그곳에 복병이 있을거라 생각한 장합은

더이상 깊숙히 들어가지 못하고 철수했으며

그 틈을 타 왕평은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 한뒤 철수를 할수 있었던 것이죠

 

장합군의 공격을 받자마자 최고 지휘관이던 마속은 무책임하게 달아나버렸고

다른 장수들도 혼란을 수습하기는 커녕 도망치기 바빴을때

유일하게 왕평만이 도망치지 않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위나라의 뛰어난 장수인 장합을 당황하게 하면서

급박한 상황을 수습했던 걸 보면

이 가정전투에서는 왕평의 담대함과 책임감,

그리고 훌륭한 통솔력과 지략을 엿볼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갈량의 1차 북벌이 허무하게 실패한뒤

이후 마속은 사형에 처해졌고

제갈량과 조운도 벼슬이 강등 되었으며

그 외에 장휴와 이성 등 대부분의 장수들이 처벌을 받는 와중에

오직 왕평만이 승진을 하게 되었죠

 

그는 토구장군이 되었고 정후에 봉해졌으며

촉한의 정예부대인 무당비군 오부를 지휘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평은 이민족의 왕이던 두호와 부호를 따라 조조에 투항했고

촉에선 이민족 부대를 통솔하게 했기 때문에

그가 이민족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존재하고 있죠

 

어쨌든 모두가 처벌받고 있을때 홀로 승진을 했던걸 보면

왕평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231년 제갈량이 4차 북벌을 떠날때도 참전하게 되는데요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한 뒤

왕평에게 따로 군사를 주어 남쪽을 지키게 했죠

 

그리고 제갈량과 사마의가 상규에서 만나게 되지만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고

사마의는 오직 방어만을 외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장합과 가허, 위평 등 많은 장수들이 사마의에게

'왜 촉나라와 제갈량을 호랑이처럼 무서워 하냐'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려고 그러냐' 라는 등

나가 싸울것을 요구하게 되죠

 

그러자 사마의는 장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신이 직접 제갈량을 공격할때

장합에게는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왕평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장합은 왕평을 뚫어내지 못했고

결국 물러날수 밖에 없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장합은 당시 위나라를 대표하는 장수였지만

가정전투에서도 그렇고

유독 왕평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4차 북벌때도 왕평은 제갈량의 기대에 부응하며 위나라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보급 문제로 인해 북벌은 실패하고 말았죠

 

그리고 이어진 5차북벌때도 왕평은 제갈량과 함께 참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5차북벌도 실패를 하고 마는데

제갈량 사후 수습과정에서 왕평은 또다시 촉나라를 구하는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되죠

 

제갈량이 죽자 양의는 제갈량이 살아있을때 내렸던 명령과 절차에 따라

전군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평소 양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위연은 철수를 거부하면서

촉군 안에서 내분이 일어난것이죠

 

위연은 먼저 남곡구를 선점하고

후퇴하는 양의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는데

이에 양의는 왕평을 보내 위연을 공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왕평은 위연의 군대와 대치를 하게 되는데

이때 위연에게 크게 “공(제갈량)이 죽어 그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너희 놈들이 감히 이처럼 구느냐!” 라고 소리쳤죠

 

그러자 위연에게 잘못이 있다는걸 깨달은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고

병력이 없어진 위연은 아들 몇명과 함께 한중으로 도망치다가

마대에 의해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마터면 촉군끼리 큰 내전이 벌어질수도 있는 상황에

왕평의 외침 한마디로 아무런 피해 없이 마무리 될수 있었기에

거의 나라를 구했다고 할 정도의 활약을 한 셈인것이죠

 

이후 왕평은 한중 방어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는데요

 

거기장군 오의를 보좌하던 왕평은

나중에 오의가 죽자 한중을 방어하는 사령관이 됩니다

 

238년에 대사마 장완이 한중에 주둔하자 그를 보좌했는데

243년 장완이 병에 걸려 부현으로 거처를 옮기자

왕평은 진북대장군에 오르면서 한중 방어선의 1인자가 되었죠

 

그로부터 1년후인 244년

왕평이 촉나라 제일의 방패라고 불려지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바로 위나라 대장군인 조상이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한중지역으로 침공해 들어온것이죠

 

촉나라에서 조상의 침공을 알아차렸을땐

위나라의 선봉은 이미 한중의 코앞까지 와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230년에 조진의 촉나라 침공 이후 14년만에 이뤄진 위나라의 대침공이었고

당시 한중에는 3만명 정도의 병력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왕평 뿐만아니라 한중을 방어하던 많은 장수들이 당황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당시 촉나라에는 부현에 장완과 강유 등 촉나라 주력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들이 지원군으로 올때까지 시간을 끄는것이 매우 중요했고

어떻게 해서든 지연전을 펼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군사회의가 열리고 많은 장수들은

'낙성과 한성까지 모든 병력을 물린뒤

우리는 성에 들어가 죽어라 방어를 하면서

장완과 강유가 주둔하고 있던 부현에서

지원군이 올때까지 버티자' 라는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왕평의 냉철한 판단력이 발휘 되는데요

 

왕평은 부현에서 한중까지 거리가 멀기 때문에

군사들을 물리고 방어만 하다가

만약 성이 함락되게 되면 끝장이라며

소수의 병력이라 할지라도 험한 촉나라의 산악지형을 이용해

적의 진군을 지연시키고

부현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 공세로 전환하자는 계책을 내놓은 것이죠

 

이는 유비가 살아있을때 한중 수비 전략이라고 제시했던 계책으로

소규모 부대들을 험한 산악지형에 촘촘하게 배치해

끊임없이 적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면서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나중에 후방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 공세로 전환해 적을 요격하고

그 사이에 수비군이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방식의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부분의 장수들은 왕평의 계책에 의문을 가졌지만

오직 유민이라는 장수만이 왕평의 전략이 맞다고 생각해

즉각 왕평과 작전을 실행했죠

 

왕평은 먼저 흥세산을 점거해 100여리에 걸쳐 엄청나게 많은 촉나라 깃발을 꽂아

병력이 많아보이게끔 수를 부풀렸고

적은 병력으로 험하고 좁은 산길을 틀어막아

적군이 쉽게 진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왕평이 주장한 지연전은 딱 맞아 떨어져

위군은 흥세산을 뚫지 못하고 전쟁은 지지부진해졌죠

 

위군은 제대로된 전투 한번 치루지 못했지만 심각한 보급문제에 시달렸으며

이미 소나 말, 당나귀 등이 죄다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왕평의 예상대로 부현에서 비의가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했고

곧장 공세로 전환한 촉나라군에 의해

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해 버렸죠

 

그렇게 왕평의 탁월한 계책으로 또다시 촉나라를 위기에서 지켜낸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흥세전투가 조상의 실각, 사마씨의 집권,

서진의 건국을 가능하게 했다는 전투라는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과 함께

삼국지 4대 대전으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 왕평이 맹활약한 이 흥세전투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죠

 

어쨌든 흥세전투 이후 왕평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4년후인 248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비록 문맹이었지만

왠만한 장수들보다는 더 뛰어나고

훌륭한 전투능력과 통솔력을 가지고 있었던 장수였던것 같네요

 

왕평의 성격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는데

그는 항상 법도를 지키며 행동했고

말할 때는 농담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언제나 바르게 앉아 하루를 보냈기에

무장의 모습보다는 선비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고 하죠

 

하지만 그의 말투는 너무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어서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촉나라에는 구부라는 왕평에 버금가는 뛰어난 장수가 있었는데

기록이 없어 무슨 활약을 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전에는 왕평과 구부가 있더니

후에는 장익과 요화가 있구나" 라고 말했다고 하죠

 

그만큼 당시 사람들에게도 촉나라 제일의 방패로써

인정받고 있었던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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