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는 이유로 벌어진 미국의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날 오후 숙소에 도착한 뒤 TV를 틀어보니
어떤 미국 영화가 하고 있었죠
그 영화는 테땡범들이 비행기를 빼앗아
미국의 높은 건물에 비행기로 때려박는 영화였고
그땐 그런 영화보다 친구들과 놀기 바빴기 때문에
대충 보다가 금방 꺼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는데
그 영화는 사실 영화가 아닌 실제였고
그 영상은 다들 잘 아는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의 영상이었던 것이죠
이 사건은 미국 본토가 처음으로 공격을 당한 일이었으며
이후 전세계는 충격에 휩쌓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로 밝혀진 오사마 빈 ㄹㄷ은 훗날
2011년 있었던 넵튠 스피어 작전으로 사살되고 마는데요
그런데 대체 오사마와 이 테ㄹ범들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일까요?
오늘은 이런일이 벌어지기 전
대체 과거에 무슨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과거 이란은 중동에서 대표적인 친미 국가 였습니다
1925년 이란에 세워진 팔레비 왕조는 모든걸 미국화, 서구화 하고 싶어했었죠
팔레비 국왕은 너무 미국을 좋아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백색혁명' 이라고 해서 토지개혁과 교육개혁,
그리고 농촌 개발 등 여러가지 근대화 사업을 추진했는데
이슬람 종교학자들의 비난에도 무릅쓰고
여성의 참정권까지 인정해 주었으며
히잡과 차도르 착용을 금지 시키기까지 했죠
이때 이란의 여성들은 히잡을 벗어던지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으며
미국에서 유행하던 락앤롤을 듣고 부르는 등
완전 서구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한국에도 만들어 진것이 있는데요
1977년 테헤란 시장이던 닉페이가 서울에 방문한적이 있는데
이때 각자 수도의 이름을 딴 길을 만들자 해서
한국에서는 강남에 테헤란로를 만들었고
이란 테헤란에는 서울로를 만든것이죠
그런데 친미 정권이던 팔레비 왕조가 엄청난 실수를 해버리는데요
이란 내부에서 일어나던 반발과 반대파를
비밀 경찰 사바크를 만들어 잔인하게 탄압해버렸던 것이죠
그리고 당시 팔레비 왕조는 석유 판돈을
국민들에게 나눠주지는 않고 자기들끼리 다 해처먹었는데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했지만
국민들은 내팽개치고 수익의 대부분을 팔라비 왕가와
왕실을 지지하는 고위층 등 일부 계층들이 독점 해버리다보니
그로인해 이란내의 빈부격차는 급속히 커져버렸던 것입니다
심지어 석유판 돈을 가지고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따
팔레비 왕조의 으리으리한 궁전까지 만들었죠
또한 사사건건 자신들에 반대하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박해하기 까지 했으며
이슬람 사원의 땅을 빼앗아 국민들에게 줘버리는 등 이슬람을 핍박 하자
무슬림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1978년 8월, 팔라비 왕조가 패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반미, 반정부를 외치던 사람들이 아바단의 렉스 극장으로
반정부 영화 '사슴들'을 보기 위해 수백명이 모였던 것이죠
그러던 오후 8시 21분,
어떤 남성 4명이 극장의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휘발유를 뿌린뒤 불을 지르고 도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그곳에 모인 약 400여명의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진것이죠
그러자 렉스극장 방화는 팔라비 왕조의 비밀경찰
사바크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 이후 '팔레비 왕조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며
엄청난 규모로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왕조가 무너졌고
이슬람 종교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죠
그렇게 친미 국가였던 이란이 순식간에 극렬한 반미 국가로 바껴버렸으며
히잡을 벗어던지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던 여자들에게도
다시 히잡과 차도르 등을 입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이란 혁명이 일어난 같은해 7월
바로 옆나라 이라크에서도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는데요
그가 바로 '사담 후세ㅇ' 이라는 인물이었죠
당시 이란과 이라크는 국경을 맞대고 있던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에다가 적국이었습니다
한편 이란 혁명이 일어나자 팔레비 국왕은 얼른 미국으로 도망쳤는데
그때 그를 받아준건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었죠
그러자 이란의 대학생들은 팔레비 국왕을
우리 스스로 재판하고 처벌하겠다고 하며
다시 이란으로 돌려 보내줄것을 요구했지만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이란 대학생들은 격분하며
테헤란에 있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 점령해버리기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대사관 습격보다 더 골때리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석유 수급 문제였죠
이란이 친미 정권일땐 석유를 별문제 없이 잘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미 정권이 들어서다보니
석유 수급에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에 미국은 이라크에 한가지 제안을 하는데 미국이 지원해 줄테니
이란이 혁명 때문에 나라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이란을 공격하라고 했던 것이죠
당시 이라크의 국방력은 세계 4위에 올랐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였는데
이라크는 그만 미국의 꼬임에 넘어가
1980년 8월, 마침내 이란을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지원도 받고 자체적으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이라크는
전쟁이 금방 끝날줄 알았지만
팔레비 왕가에 충성을 바치던 인물들로 구성된 이란군을 믿지 못해서
호메이니가 자체적으로 만든 친위대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맹활약으로
이라크의 공격을 이란이 잘 막아내면서 전쟁이 장기전에 빠지게 되죠
그렇게 1980년에 일어난 전쟁은 무려 8년동안 끝없는 소모전만 계속되다가
결국 이란과 이라크가 모두 지쳐서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결국 전쟁 전으로 돌아가는 종전협정을 체결하는것으로
전쟁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는 엄청난 결단을 내리는데
서방 국가들이 이라크만 도와주는걸 보고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친구는 없다'
'믿을수 있는건 핵무기 밖에 없다' 라고 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던 것이죠
한편 이라크의 상황도 엄청나게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미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또한 전쟁이 한창일때는 많이 올랐던 유가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폭락을 해버렸고
전쟁이 끝났으니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 해야하는데
그럴 자금이 한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후세ㅇ의 눈에 들어온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바로 이라크 아래에 붙어있던 작은 나라 쿠웨이트 였죠
사실 쿠웨이트 역시 산유국이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작은 나라 쿠웨이트의 석유 생산량이
이라크 전체 석유 생산량과 맞먹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후세ㅇ은 쿠웨이트를 공격해 점령하고
쿠웨이트에서 나오는 석유를 다 먹어버려야겠다 생각했죠
사실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도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과거 쿠웨이트는 원래 이라크 땅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명분으로 1990년 쿠웨이트를 공격했고
실제로 몇시간만에 쿠웨이트를 점령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석유 수급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던 미국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쿠웨이트에서 오던 석유 수급도 차질이 생길것이 우려되자
바로 후세ㅇ에게 쿠웨이트에서 군대를 철수 시키라며 압박을 가했죠
하지만 후세ㅇ도 전후 복구도 해야했기 때문에 돈들데도 많았으며
베트남전 패전 이후 미국도 아직 제정신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하고
미국의 압박을 개무시 해버렸고
그렇게 열받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걸프전이 발발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전 이후 열심히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었는데요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 미국은 자신들의 강력한 군사력을 만천하에 보여주기 위해
모든 최첨단 무기들을 총동원해 이라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이때 미국의 24시간 뉴스 방송국이던 CNN이
카메라가 달린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이 날아가
목표물을 정확히 공격하는 장면이나
전투기에 카메라를 달아 전투기가 전투를 수행하는 모습 등
전쟁의 생생한 모습을 현지에서 실시간으로 생중계 하기도 했죠
그렇게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과 자신들이 건재하다는것을
전세계에 생방송으로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후세ㅇ은 미국의 무시무시한 공격에 얼마안가 항복을 하고 마는데요
그렇게 이라크는 어쩔수없이 쿠웨이트에서 전군을 철수시켰습니다
이때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이라크를 잇는 도로를 통해 퇴각 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철수하는 이라크 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죠
미군은 길게 늘어져있는 이라크군의 선두와 후미를 폭격해
이라크군이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만든후 이틀동안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퇴각하던 이라크군은 거의 전멸하다싶은 피해를 받게 되었고
이때 받은 공습의 모습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 고속도로를 '죽음의 고속도로' 라고 부르고 있죠
퇴각하던 적군을 포격하는것은 정당한 포격이었지만
문제는 이 퇴각행렬에 민간인이 섞여 있었고
이로인해 미국내에는 반전 여론이 형성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라크 독재자 후세ㅇ을 처리하지 못하고 걸프전이 마무리 되었죠
그런데 걸프전이 이렇게 잘 마무리가 된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걸프전이 시작 되었을때부터 비극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것인데요
그 비극의 씨앗은 바로 사우디 아라비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미국 타도'에 대한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라크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을 장소가 필요했고
이때 미국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장소를 좀 빌려달라고 요청했던 것이죠
사우디 아라비아도 당시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군사기지로 쓸만한 장소를 빌려주게 되었는데
하필 빌려준 장소가 이슬람 최대의 성지인 메카의 옆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우디 아라비아의 젊은 청년들은
어떻게 우리의 성지인 메카 옆에 이교도인 미군이 주둔할수 있냐며
'이는 제 2의 십자군 전쟁이다'라며, '미국 타도!'를 외쳤던 것이죠
이 청년들의 대표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2001년 9월의 사건을 일으킨 최악의 악당
오사마 빈 ㄹㄷ 인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이슬람의 상징과도 같은 메카와 이슬람의 성지에
이단의 군대가 들어올수 있냐며
우리가 쫓아 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2001년 9월의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죠
심지어 이들 대부분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금수저 출신이었는데요
이들은 이후 사건을 벌이기 위해
모두 사비로 1등석이나 비즈니스석 항공권을 구입했었다고 합니다
오사마 역시 건설 관련 갑부 집안인 라덴 가문의 아들이었죠
사실 라덴가문은 친미 가문인데
오사마는 어릴적부터 광신도 끼가 있었는지
경전 공부에 병적으로 메달렸고
이슬람에 광적으로 심취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로 라덴가문에서는
오사마를 호적에서 파버리고
라덴 이라는 성씨 표기를 라딘으로 바꿔버리기 까지 했다고 하죠
또한 사건 발생 직후 가족들이 인터뷰를 한적이 있는데
대놓고 그런놈 모른다며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고 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것 같긴 하지만
종교에 너무 심취하는것도 굉장히 위험할것 같긴 하네요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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